주간동아 1144

2018.06.27

문화

TV 드라마,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다

사법개혁 요구하는 현실 반영하듯 법정드라마 봇물

  • 입력2018-06-26 10: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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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으로 법조계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5~6월 공교롭게도 한국 TV 드라마는 법정드라마로 넘쳐났다. 장동건-박형식 주연의 KBS 수목드라마 ‘슈츠’, 정재영-정유미 주연의 MBC 월화드라마 ‘검법남녀’, 이준기-서예지 주연의 케이블TV방송 tvN 주말드라마 ‘무법 변호사’, 고아라-김명수(현 대법원장과 동명이인) 주연의 종합편성채널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다. 

    이들 드라마는 판사, 검사, 변호사로 이뤄진 법조 3륜(三輪)을 골고루 다룬다. 6월 14일 종영한 ‘슈츠’는 미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변호사들의 세계를 소개했다. ‘검법남녀’는 법의학자의 도움을 받는 검사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미스 함무라비’는 판사들의 세계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무법 변호사’는 정의의 여신을 가장한 악의 화신과도 같은 향판(鄕判)과 그에 맞서는 조폭 출신 변호사의 대결을 그린다.

    드라마와 현실의 싱크로율

    물론 판사, 검사, 변호사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정의를 구현하고자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전관예우, 엄격한 서열문화, 가부장적 권위주의, 실적만 중시하는 관료주의, ‘좋은 게 좋은 거지’ 식의 짬짜미 판결, ‘승포판’(승진을 포기한 판사)과 ‘승목판’(승진에 목맨 판사)의 대립…. 심지어 부패 사슬의 최정점에 오만한 엘리트주의로 똘똘 뭉친 법관이 앉아 있다는 내용까지 등장한다. 

    보통 법정드라마 속 주인공은 정의 구현을 앞세우는 검사나 변호사인 경우가 많다. 흥미롭게도 요즘 법정드라마에는 판사가 주역과 악역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다. 따뜻한 이상주의자와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젊은 판사 커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보수적인 법원 조직을 변화시켜나가는 ‘미스 함무라비’, 공정한 심판자의 가면 뒤에서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거대 악이 돼버린 사법권력을 비판하는 ‘무법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이들 드라마의 내용은 국민 눈높이와 크게 어긋나 있는 사법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여론과 맞물려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특히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드라마 속 내용이 묘한 싱크로율을 보이면서 드라마가 현실을 추동한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먼저 현실을 보자. 5월 31일 김명수 대법원장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법관사찰 문제와 관련해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한다. 그러자 6월 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판결에 개입한 사실이 없다며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선다. 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단독판사회의·배석판사회의는 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한다. 그러자 5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회의는 “형사고발, 수사의뢰, 수사촉구가 법관과 재판 독립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제동을 걸고 나선다. 이에 맞불을 놓듯 11일 경기 일산 사법연수원에 모인 전국법관대표회의는 “헌법 가치를 훼손했다”며 “형사절차를 포함한 성역 없는 진상조사”를 요구한다. 

    이 기간 문유석 현직 판사가 대본을 쓴 ‘미스 함무라비’에선 역시 부장판사 대 배석판사의 대결구조 아래 전체판사회의가 소집되는 내용이 방영됐다. 초임판사인 박차오름(고아라 분)은 자신의 승진을 위해 임신한 여성 배석판사를 가혹하게 몰아붙여 유산시키고도 발뺌만 하는 성공충(차순배 분) 판사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린다. 처음엔 이를 만류하던 선배 배석판사 임바른(김명수 분)은 전체판사회의를 소집해 이를 정식으로 공론화하는 카드를 꺼내 든다. 

    부장판사들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며 이를 탐탐치 않게 여겨 대부분 회의 참석을 보이콧하고, 배석판사 가운데 일부는 이에 공감을 표해 회의에 참석하지만 결국 정족수 부족으로 무산된다. 하지만 뜻있는 부장판사들이 회의에 참석한 모습을 보고 감동한 박차오름은 “자신과 싸워 이겨낸 만큼만 나섰고, 이길 수 없을 때 울면서 철수했다”는 산악인의 발언을 인용하며 “우리는 웃으면서 철수할 수 있다. 이미 이렇게 많은 분이 함께 첫발을 내디뎠으니까”라고 말한다.

    ‘3분의 2 민주주의’

    ‘무법 변호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악의 뿌리로 사법 권력을 정조준한다. 기성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사법권을 남용해 권력과 돈을 움켜쥔 차문숙 판사(이혜영 분)가 거악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차문숙과 그의 하수인으로 뒷골목 깡패에서 기성시장 자리까지 오른 안오주(최민수 분)에 맞서 그들에게 어머니를 잃은 조폭 출신 변호사 봉상필(이준기 분)과 차문숙을 멘토로 여기다 그 실체를 알고 경악하는 여자변호사 하재이(서예지 분)의 활약이 펼쳐진다. 

    이 대결의 공식 전장은 법정이다. 차문숙과 봉상필은 법정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오로지 법 논리에 입각한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법정 밖에선 증거 조작과 인멸, 증인 매수와 협박, 폭행,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개싸움이 펼쳐진다. 사실 법조 최고 명문가 출신인 판사가 악의 화신이고 조폭 출신이 변호사가 돼 정의 구현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현실 사법체제에 대한 거대한 조롱 내지 풍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응답하라 1994’로 스타덤에 오른 고아라와 아이돌그룹 인피니티 출신 김명수(예명 엘)의 매력에 폭 빠지거나, 이혜영과 최민수의 악역 명품 연기에 심취해 이들 드라마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대해선 으레 그러려니 하고 간과할까. 

    이들 드라마가 드라마로만 끝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라마의 문제의식이 현실에 엇비슷하게 투영되는 상황이라면 반향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적폐청산과 미투운동(#Me Too), 보수궤멸론 등으로 간과되고 있지만, 올해는 어쩌면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된 채 엘리트주의의 외딴섬으로 남아 있던 사법권 개혁의 원년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드라마의 원작이 된 소설 ‘미스 함무라비’와 에세이 ‘개인주의자 선언’을 쓴 문유석은 현직 부장판사다. 이 책들과 함께 베스트셀러 순위 상단에 머무르고 있는 ‘검사내전’의 저자 김웅은 현직 부장검사다. 한국 사법부의 문제점을 비판한 ‘검사내전’ 말미에 적힌 다음 내용을 떠올리면 최근 법정드라마의 인기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듯하다. 

    ‘우리나라 판사는 국민이 뽑은 것이 아니니 국민이 심판할 방법이 없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데, 우리나라 국민은 주권 중 하나인 사법권을 행사해본 적이 없다. 국민은 판사를 뽑아본 적도 없고, 그래서 국민의 의사를 사법권에 관철시킬 도구도 없다. 그래서 헌법과 달리 우리는 국민이 행정권과 입법권만 행사하는 3분의 2 민주주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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