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21

2018.01.10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처음으로 음악에 빠져든 날들을 추억하며

헬로윈의 ‘Keeper Of The Seven Keys Part 1’

  • 입력2018-01-09 13: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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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헤비메탈밴드 헬로윈(오른쪽)과 1987년 발표된 정규 2집 앨범 ‘Keeper Of The Seven Keys Part 1’. [헬로윈 공식 홈페이지]

    독일 헤비메탈밴드 헬로윈(오른쪽)과 1987년 발표된 정규 2집 앨범 ‘Keeper Of The Seven Keys Part 1’. [헬로윈 공식 홈페이지]

    그래도 공부에 매진한 때가 있었다. 등수가 2등쯤 떨어지면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때가 정말로 있었다. 아, 이제 두 문장을 썼는데도 가물가물할 따름이다. 바야흐로 1987년, 중학교 1학년 때였다. 20년이 좀 넘는 과거 일이지만 확실하다. 이 글을 쓰고자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때의 일기장을 들춰봤기 때문이다. 당시 일기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중간고사 때는 내가 3등이었는데 이◯◯보다 이번에는 못했다. 죽고 싶다.’ 고작 성적 때문에 죽고 싶다는, 지금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인 걸 보니 그때는 어쨌든 학업에 매진하는 소년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다음 해 일기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엄마가 마이마이 카세트를 사줬다.’ 그렇다. 그것이 재앙이었다. 기억한다. 가족과 공유하는 게 아니라 나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미디어. 나는 그 카세트로 음악 테이프를 들은 게 아니라 라디오를 들었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그리고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별밤). 특히 별밤이 문제였다. 당시 별밤에서는 일요일마다 음악 차트를 방송하곤 했다. 그때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던 노래는 대충 이랬다. 부활의 ‘회상1’,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 그리고 조지 마이클의 ‘Faith’가 꽤 오랫동안 1위를 유지했다. 조용필과 구창모, 전영록, 이선희, 그리고 송골매를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 시간에 TV로 보는 게 유일한 음악감상이던 내게 그것은 신천지의 음악이었다. 그래도 공부는 계속했다. 역시 민망함을 무릅쓰고 당시 성적표를 확인해보니 그다지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그게 증거다. 

    늘 집까지 같이 걸어오던 친구가 있었다. 그 녀석과 함께 걷는 길에는 작은 레코드 가게가 하나 있었다. 어느 동네에나 있는, 딱 그만한 규모의 가게였다. 부활 얘기를 하고 조지 마이클 얘기를 하니, 그 녀석이 나를 레코드 가게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 돈으로, 그러니까 무려 2500원을 지불하고 테이프를 하나 사서 건넸다. 독일 헤비메탈밴드 헬로윈의 ‘Keeper Of The Seven Keys Part 1’이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표지였다. 집에 와서 테이프를 마이마이 카세트에 걸었다. 그 전에 가끔이나마 기록되던 일기는 그날부터 아예 사라졌다. 중3 성적표는 그날 이후 나의 행적을 무척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찌어찌 연합고사를 봤다. 그리고 어머니가 약속했다. 연합고사 점수가 180 이상이면 미니 컴포넌트를 사주겠다고. 성적보다 오디오가 중요했다. 당연히, 거짓말을 했다. 오디오가 들어왔다. 성적이 발표됐다. 테이프로는 부족해 LP반으로 다시 샀던 헬로윈의 음반은 그날로 박살 났다. 그 모습을 보며 다행이라 여겼다. 주말마다 독서실에 간다고 꾸준히 거짓말을 한 뒤 청계천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사 온 LP반이 잔뜩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몰랐으니까. 

    한 살을 더 먹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이 됐다. 처음으로 음악에 빠진 날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새해에는 음악을 좀 더 열심히 들어야겠다고. 음악에 대한 초심을 떠올리며 나태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겠다고. 청계천 음반도매상을 누비던 소년이 상상할 수 없던 다짐이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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