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7

2017.12.13

사회

“지치고 외롭지만  오늘도 나는 다시 일어난다”

40, 50대 기업 중간관리자들이 털어놓은 중년의 ‘속내’

  • 입력2017-12-12 14:47:47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기업에서 중간관리자 임무를 맡고 있는 40, 50대 중년들의 정신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기업에서 중간관리자 임무를 맡고 있는 40, 50대 중년들의 정신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거래처 사람들과 거하게 술을 마신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힘들다. 옷가지를 거실 한가운데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늘 그렇듯 아내가 미리 타놓은 식탁 위 꿀물 한 잔을 의무적으로 들이켠다. 씻으려고 들어간 화장실 거울 속에는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반반인, 까칠하고 주름진 얼굴의 한 남자가 서 있다. 애써 무심한 척하려 해보지만 거울 속 남자가 말한다. “딱 하루만 쉬었으면….” 

    나이로는 40, 50대이고 직장에서는 중간관리자 또는 관리자 임무를 맡고 있는 이들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건강지표들은 계속해서 나빠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조울증 관련 진료 인원 3명 중 1명 이상이 40, 50대로 전 연령대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조사한 병원 응급실을 찾은 자살·자해 시도자 연령대 비율도 40대(19.7%)가 가장 높았다. 청소년, 노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나마 조금씩 올라가고 있지만 ‘낀 세대’로 불리는 중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여전히 미흡해 정신건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는 우리나라 40, 50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3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한 뒤 분석한 책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진심’을 펴냈다.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보다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줌으로써 스스로 답을 찾게 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홍진표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은 “우리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중년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많은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되는 수준이다. 먼저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으며 무엇이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지를 파악하고자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 가지 희망적인 부분은 그들이 성공과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여러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중간관리자는 아파요”

    한 직장의 ‘허리’를 맡고 있는 중간관리자는 오늘도 외롭다. 겉으론 평온해 보이지만 날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전쟁터’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한다. 2012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근로자 정신건강 관련 자료에 따르면 45~54세 근로자의 정신질환 발병 건수는 직전 연령대인 35~44세와 비교할 때 3.52배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1.54, 캐나다 1.19, 영국 1.16에 비해 현저히 높은 수치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리직급으로 들어서면 정신건강이 급속히 악화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로 직장생활 25년 차인 A씨는 지난해 부장으로 승진한 이후부터 날마다 위염에 시달리고 있다. 직장 초년병 시절에나 겪었던 심리적 불안도 새삼 자신을 위협해온다. 다음은 A씨의 말이다. 

    “그토록 원하던 자리인데 요즘은 그냥 다시 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승진하고 3개월가량은 기분이 괜찮았어요. ‘악착같이 버틴 보람이 있구나. 역시 나는 부장이 될 만한 그릇이었어’라는 자부심에 업무 스트레스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 요즘은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퇴근을 못 하겠어요. 윗사람이 찾을까 봐 저녁 약속도 따로 못 잡아요. 아래 직원들을 관리하는 일도 쉽지 않고요. 남은 인생을 이렇게 회사의 ‘노예’로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요.”

    ‘책임’의 또 다른 말, 압박과 위협

     40, 50대 중년의 속내를 진솔하게 담아낸 책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진심’.[사진제공·한국경제신문]

    40, 50대 중년의 속내를 진솔하게 담아낸 책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진심’.[사진제공·한국경제신문]

    가정에서 소외되는 중년이 많지만, 중간관리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쌓아온 안목과 통찰력이라면 가족도 분명 잘 돌볼 수 있다.[shutterstock]

    가정에서 소외되는 중년이 많지만, 중간관리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쌓아온 안목과 통찰력이라면 가족도 분명 잘 돌볼 수 있다.[shutterstock]

    과도한 업무량과 스트레스로 결국 ‘번아웃(burn-out) 증후군’에 시달리는 이도 늘고 있다. 번아웃 증후군의 주요 증상은 △일의 능률이 떨어지면서 성과 저하가 나타난다 △쉽게 우울감과 초조함을 경험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냉소적으로 변한다 △점차 모든 것에 무기력해진다 등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평사원과 관리직급의 번아웃 증후군 양상이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Executive Burnout’ 저자인 샤르마 교수에 따르면 평사원의 번아웃 증상은 스트레스가 높아짐에 따라 서서히 증가해 끝내 병리적 수준에 이르는 반면, 관리자급의 번아웃은 두드러진 증상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심각한 상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관리자는 팀 성과를 들고 최전방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온갖 평가와 비교, 비판이 쏟아진다. 기술용역업 종사자인 B씨는 “사장이나 오너가 평사원을 깨겠나. 당연히 담당 임원이나 부장급을 깬다. 그러면 ‘에이, 기분 잡쳤네’ 하고 끝낼 게 아니라 질책에 대한 변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변화 자체가 불가능할 땐 ‘나더러 나가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공포감마저 밀려온다”고 토로했다. 

    결국 이런 순간을 매번 견뎌내고, 내일 또 다가올 두려움을 이겨내는 게 관리직의 역할이다. 성과에 대한 압박과 위협을 버텨내는 것, 사람들은 이걸 좋은 말로 ‘책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렇게 높아진 책임에 비해 결정권이나 주도권은 여전히 부족하다. 오너가 아닌 이상 내 위에 누군가는 꼭 있기 마련이다. ‘밑에선 들이받고, 위에선 찍어 누르는’ 게 어쩌면 중간관리자의 숙명이다. 

    업무를 조정하거나 며칠이라도 휴가를 쓰면 좋겠지만 대개는 그럴 경황이 없다. 그러다 결국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혹자는 ‘돈이 있으니 자기 건강쯤은 알아서 챙겨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정작 그들은 자신의 ‘멘탈’을 돌볼 여력이 없다. 

    그러는 사이 ‘외로움’이란 불청객이 불쑥 찾아온다. 직장과 가정, 사회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묻는 질문에 직장인 C씨는 “등대지기”라고 답했다. 

    “미래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혼자 생각할 때가 많아요. 몇 년 전부터 지방에서 일하게 됐는데 상대하는 사람이 주로 아래 직원이나 거래처 사람이에요. 그래서 마음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어 혼자 고민만 하죠. 집에서 아내와 대화를 나누기는 하지만 일상적인 얘기가 대부분이고, 깊은 고민을 털어놓을 기회는 많지 않아요. 아이들은 컸다고 다 자기 일 하기 바쁘고. 어느 날 문득 이러다 회사에서 쫓겨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오죠.”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정년’이다. 법적으로 정년은 늘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경제위기, 구조조정, 명예퇴직 관련 뉴스가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그것만도 무서운데 인간의 수명이 계속 늘어나 노후 생활비마저 더 많이 필요해진 상황이다. 가장 무서운 건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자식들에게 돈을 대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 

    관리자급은 ‘자녀 교육’과 ‘부모 봉양’으로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연령대라 어깨가 더 무겁다. 월급은 올랐다지만 나가는 액수가 더 크다. 그러니 지금 직장에서 성과를 내고 내부 영업도 잘해 월급 받는 기간을 최대한 늘리는 게 최선이다. 직장인 D씨는 이렇게 말한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하면 가장 먼저 ‘앞으로 뭘 먹고 살지’라는 걱정이 들어요. 지금 받는 월급만큼 어디 가서 돈을 버나 싶은 거죠. 직장에서도 힘들지만 직장 밖에서는 희망이 더 보이지 않아 불안해요.” 

    실제로 일단 관리직급이 되면 이직이 어렵다. 부장급은 실무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설령 이직한다 해도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임원 한번 돼보자!’ 하는 승부욕에 휩싸이는 것. 결국 관리직은 경제적 이유, 승진 욕심 등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웹툰 ‘미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직장인이 봉급과 때에 걸맞은 승진 아니면 무엇으로 보상받겠나?’

    “내가 믿는 건 당신뿐”

    관리직급이 직장에서 롤러코스터 같은 부침을 겪으면서도 다시 의미를 찾고 힘을 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가족’ 때문이다. 배우자와 자녀, 그리고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안정적으로 직장에 다니고자 하는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마음으로 악착같이 회사에 다니느라 정작 가족과는 심리적 거리감이 생기고 만다. 

    50대 후반 은퇴자인 E씨는 “30년 넘게 일하고 은퇴한 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지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한 달에 한두 번 같이 연주회에 가고,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밥도 먹기로 했지만 한 달가량 지나자 가족 모두 E씨에게 “도대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뭐냐”며 면박을 주기 시작했다. 

    E씨는 “그동안 조직이 짜준 시간표대로 사느라 자유가 주어진 후에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반면 아내는 집안 대소사부터 아이들 교육, 취미생활까지 살뜰하게 챙겨왔더라. 젊어서는 밖으로 나돌다 나이 들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반갑기보다 귀찮을 수밖에. 그걸 깨닫는 순간 가족에게 왕따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한 기분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은 대부분 현재 삶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으로 ‘배우자’를 꼽았다. 더욱 눈길을 끄는 점은 나이와 직급이 올라갈수록 배우자에게 위로받고 있고 앞으로도 위로받고 싶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항간에는 이런 얘기도 나돈다. ‘부부가 50대가 되면 지성이 평준화되고, 60대가 되면 재물이 평준화되며, 70대가 되면 목숨이 평준화된다.’ 중년에게 배우자만큼 좋은 친구는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관리직급이 되면 시급한 사안들을 다루게 될 때가 많아 오히려 퇴근시간이 늦어진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수록 경제·사회적으로 더욱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이지만, 이런 그들의 입에서 늘 입버릇처럼 나오는 말이 있다. “아이들 어릴 때, 셋방살이 하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어.” 

    하지만 중간관리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쌓아온 안목과 통찰력이라면 가족도 충분히 잘 돌볼 수 있다. 반대로 가족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채워주려 노력하다 보면 그 습관이 회사에서 팀원들을 대할 때 좋은 영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러한 선순환이 직장과 가정 가운데 어디서부터 시작돼야 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삶의 장면마다 녹아 있는 행복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견하면 된다.

    “나도 아들에게 큰절 받을 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자식을 향한 마음도 애틋해진다. 하지만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공부하느라 얼굴 보기 어렵고, 집에 있어도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대화의 기회는 날로 줄어든다. 

    11월 23일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있던 날, 어느 대견한 아들의 사연이 온라인상에서 화제를 모았다. 수능을 보려고 고사장으로 들어가던 아들이 갑자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와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놀란 아버지는 얼른 차를 돌려 고사장 정문으로 달려갔고, 아들은 허겁지겁 도착한 아버지를 향해 아스팔트 위에서 큰절을 올렸다. 그간 묵묵히 자신을 뒷바라지해준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아버지의 차량 블랙박스에 고스란히 담겨 온라인상에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당일 뉴스로 이 사연을 접했다는 직장인 F씨는 “뉴스를 보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도 자식을 키우고 있지만 과연 나는 사연 속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감사의 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도 대견하지만 그렇게 아들을 키운 아버지가 부럽고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대부분 자식에게 애정표현을 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같이 뭘 해야 할지 몰라 어쩌다 함께 시간을 보내더라도 데면데면한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자녀와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면 무조건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조언한다. 거창한 걸 하지 않더라도 함께 시간을 공유하며 그간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자녀와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다는 것. 

    같은 맥락에서 현재 호주에서 유행하는 ‘RUOK’ 캠페인을 들 수 있다. 이는 주위 사람들에게 “요즘 잘 지내(Are You OK)?”라고 간단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회사나 학교에서 시작해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에게 안부카드를 보내는 릴레이 운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부모와 자녀 사이라도 종종 진심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다소 어색하겠지만 의식적으로 자녀에게 말을 걸고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다 보면 서로 감추고 있던 진심과 사랑을 알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건 지나온 세월만큼 ‘후회’도 많아짐을 뜻한다. ‘그때의 나는 왜 그랬을까’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회들이 나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하지만 후회가 또 다른 기회로 돌아올 수도 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마음 깊은 곳, 자신이 진정으로 외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들어봐야 한다. 이런저런 푸념과 변명도 좋고, 허무맹랑한 꿈도 좋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 때 타인에게도 친절해질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버텨준 자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스스로 인정해야 한 발 더 나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홍진표 소장은 “중년에게 조심스레 바라는 건 자기 자신에게 더 묻고, 더 답하고, 더 감사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