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4

2017.11.22

그냥 좋은 장면은 없다

‘붉은 노을’이 슬퍼 보이는 이유

열정과 고통을 동시에 의미하는 빨강

  • 입력2017-11-21 14: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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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한 장면.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한 장면.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 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서울 광화문 한복판을 걷던 중 어디선가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반가운 마음에 노랫소리를 따라갔더니 자그마한 무대에서 남성 트리오가 활기차게 몸짓을 하며 가요 ‘붉은 노을’을 부르고 있었다. 세 목소리가 만드는 아름다운 화음이 쌀쌀한 가을바람을 뚫고 멀리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열띤 호응을 보냈다. 

    경쾌한 리듬에 맞춰 따라 부르다 가사를 곱씹어보니 꽤 슬픈 내용이다. 사랑한다고 아무리 외치고 외쳐도 너는 대답이 없고, 붉게 타는 노을처럼 내 마음도 타들어간다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자신의 불타는 마음을 붉은색에 빗대 표현한 것이다. 

    빛의 파장 가운데 눈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은 400~700nm에 해당하는 파장을 말한다. 물건 자체에 색이 칠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 ‘빨주노초파남보’ 스펙트럼으로 펼쳐지는 빛의 파장이 물체에 반사돼 나타나는 결과다. 700nm의 장파장에 속하는 붉은색은 흥분을 불러일으켜 신체적 · 정신적 활동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붉은색을 보면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박동 수가 올라가며, 붉은색으로 칠해진 장소에서는 실제 온도보다 따뜻하게 느낀다는 신경생리학 실험처럼 붉은색은 에너지를 높이는 색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열정과 생명력의 상징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혼란과 분열을 상징하는 고통의 색이기도 하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유명한 그림 ‘절규’ 속 하늘도 붉은색이다. 뭉크의 연작 ‘생의 프리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이 작품은 뭉크가 가진 내면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해가 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울함이 몰려와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죽을 것 같은 피로감이 들어 난간에 기댔다. 친구들은 저 앞을 걸어갔고 나 혼자 공포에 떨었다.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 

    뭉크의 이 같은 고백처럼 ‘절규’는 석양이 지는 어느 날 오후 친구들과 걸으며 실제로 겪었던 죽음의 공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로로 굽이치는 붉은 하늘이 아래로 서서히 내려와 진푸른색의 피오르와 도시, 비명을 지르는 사람까지 압도하는 분위기다. 입을 크게 벌린 인물은 빈약한 양 볼을 손으로 감싸며 굳어버린 듯하다. 극도의 두려움으로 혼란스러워진 마음은 심장의 온도를 높인다.


    공포의 상징이 된 뭉크의 ‘절규’ 속 붉은 하늘.

    공포의 상징이 된 뭉크의 ‘절규’ 속 붉은 하늘.

    노랑  ·  주황  ·  빨강으로 변한 ‘마츠코’의 인생

    붉은색이 표현하는 내면의 고통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의 하늘에서도 잘 나타난다. 평생 사랑을 갈구하며 헌신하고 버림받기를 반복한 마츠코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 그리고 중년까지 마음의 온도가 하늘의 색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하늘은 소녀 마츠코의 노란색 하늘이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아픈 동생이 먼저다. 작은 슬픔이 쌓이고 쌓여 마츠코의 마음엔 상처가 남았다. 

    새파란 하늘이 어울릴 것 같은 귀여운 소녀 앞에 조금 어두운 노란색 하늘이 펼쳐진다. 두 번째는 성인이 된 마츠코의 주황색 하늘이다. 마츠코는 고운 외모와 여린 심성을 가진 여성으로 성장했다. 교사가 된 그는 학생들과 함께 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곧 닥칠 사건으로 그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소녀의 노란색 하늘은 한층 짙어져 주황색 하늘이 됐다. 

    세 번째 하늘은 붉은색이다. 펑퍼짐한 몸에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사자 갈기처럼 산발을 한 중년의 마츠코가 붉은 노을 앞에 앉아 있다. 감각을 깨우는 에너지를 가진 붉은색과 반대로 삶의 열정이 말라버린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어두운 밤으로 넘어가기 전의 붉은 하늘은 깊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처럼 보인다.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으로 변화하는 하늘의 색은 마츠코 내면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지는 상처의 색이 짙은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이다. 

    절규하는 사람과 마츠코의 하늘에서 붉은색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상징한다. 그러나 붉은색은 가까이 다가가며 확장하는 성질이 있는 난색(暖色  · warm color ) 계열 중 가장 강렬한 색이다. 에너지를 북돋우고 마음을 열어주는 색이기도 하다. 하늘은 그들의 마음을 거울처럼 반사했다. 하늘의 붉은색은 고통을 상징하는 구실을 넘어 상처 입은 내면을 알아주고 공감하며 기꺼이 그 고통과 하나 되는 자비로운 마음이 아닐까. 

    가을과 겨울에 발 하나씩 걸치고 있는 요즘, 추위에 몸과 마음이 서서히 움츠러드는 동안 시선은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 나뭇잎으로 향한다. 자연이 선물하는 따뜻한 색에 마음을 녹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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