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1

2015.08.17

해고당해도 되는 사람은 누구?

정부 “해고 요건 완화 아니다”…노동계 “사측에만 유리한 쉬운 해고”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5-08-17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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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고당해도 되는 사람은 누구?
    #1 지난해 초 A사는 ㄱ씨를 비롯해 3년간(2011~2013) 인사평가 결과가 연속 하위등급인 근로자 111명을 대상으로 역량 향상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사측은 상반기와 하반기 과정을 마치고 평가해 역량이 향상된 직원들을 현업에 복귀시켰다. ㄱ씨는 역량 향상 교육을 이수하고도 2014년 평가에서 최하위 평가가 나와 올해 1월 대기발령을 받았다. 7주간의 대기발령 동안 ㄱ씨와 일하기를 원하는 부서가 없어 3월 해고됐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해고 사유가 정당하다”며 ㄱ씨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 B사는 2009년 4월쯤 2006~2008년 인사평가에서 최하위 등급을 받은 ㄴ씨를 비롯한 하위 1%의 직무능력 부진자 가운데 52명을 역량 향상 교육 대상자로 선정했다. ㄴ씨는 e메일로 교육 불참 사유서를 제출하고 교육에 참석하지 않았고, 무단 불참을 이유로 정직 1개월 처분을 받았다. 이후 재교육 기간에는 주별 업무수행보고서는 총 24회 중 2회, 월별 업무개선계획서는 총 6회 중 4회를 제출했고 개선제안보고서는 제출하지 않았다. 재교육 대상자 39명 중 최하위였던 ㄴ씨는 2010년 2월 해고됐다. 중앙노동위원회와 법원은 “정당한 해고 사유로 인정된다”며 ㄴ씨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기각했다.

    정부가 왜 해고 가이드라인까지 만드나

    일반해고에 대한 정부 가이드라인의 윤곽이 나왔다. ‘직무능력사회 정착을 위한 공정한 인사평가에 기초한 합리적인 인사관리.’ 한국노동연구원이 8월 2일 배포한 보도자료의 제목이다. 보도자료에는 6월 24일과 2012년 5월 29일의 대법원 판결,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올해 7월 14일자 판정이 담겼다.

    위 두 사례의 핵심은 △직무 부적합이나 직무 능력 부진 자체가 해고 사유는 아니지만 △공정한 인사평가에 따른 합리적 인사관리가 실시됐음에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해고가 정당하다는 것. 여기에는 ‘공정한’ 인사평가와 ‘합리적·체계적’ 인사관리라는 전제가 있다. 또 다른 사례는 회사가 노동조합 가입 등의 이유로 특정 직원을 퇴출하기 위해 인사평가 제도를 악용한 사례로, 대법원은 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을 퇴출시킬 목적으로 인사평가를 악용하는 것은 공정한 인사평가의 본래적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다. 아울러 공정하게 실시된 인사평가 결과는 근로자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인사관리에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반해고는 법적으로 요건이 명시된 징계해고, 정리해고와 달리 업무 성과가 미비하거나 근무 태도가 불량한 근로자를 해고하는 것을 말한다. 현행 근로기준법(제23조 1항)은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휴직·정직·전직·감봉, 그 밖의 징벌을 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정당한 이유’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며 일반해고의 기준과 절차를 행정지침 형태로 제도화하려는 정부의 계획은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과 함께 노사정 대화 재개를 막아온 대표적인 걸림돌이다.

    해고 등 기업의 인사권은 정부가 개입해 왈가왈부할 사안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근로자와 사용자 간 문제지만 사용자 측의 일방적 의사로 해고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이런 부분을 개선하겠다는 취지에는 공감하나, 가이드라인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의 가이드라인이 기존 취지와 달리 근로자를 쉽게 퇴출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부당해고, 임금체불 구제가 전문인 박소민 동서노무법인 대표노무사는 “정부가 노사관계의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면서 기준에 맞추라는 건 너무 유연성이 없는 처사”라며 “대기업 외에도 중소기업 등 수많은 기업과 근로자가 놓인 상황이 각기 다른데 하나의 기준에 맞추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이어 “인사평가나 역량 향상 프로그램 등이 비교적 정교한 대기업은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반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중기업이나 사규가 없는 소기업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또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대기업에서 해고 인원을 정해두고 어떻게든 하위에 속하게 만들어 저성과자를 내보낸다는 명목으로 끼워 맞추기 식 구조조정을 하는 명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성혜 동국대 법대 교수는 “우리 법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없다’고 돼 있는데 ‘정당한 이유’란 게 사실 상당히 추상적이다. 우리는 독일의 해고제한법을 원용해 부당해고 여부를 판단해왔다. 정부의 지침 없이도 판례 등을 통해 해고가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기준이 어느 정도 세워진 상황이고 취업규칙의 명확한 규정들도 있는데, 모든 해고 사유가 아닌 ‘저성과자’에 대한 해고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는 건 균형도 맞지 않고 과도한 규제로 보인다”고 말했다.

    해고당해도 되는 사람은 누구?
    가이드라인 만들어도 악용 여지 있어

    법은 추상적일 때 오히려 포괄적일 수 있다. 법에 모든 사항을 열거할 수도 없을뿐더러, 법이 지나치게 명확하면 예외가 많아지기 때문에 입법 과정에서 일부러 법을 추상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조 교수는 “행정 해석은 법이 불분명할 때 유권해석을 해주는 것인데, 일단 기업 내 ‘성과’에 대한 평가가 주관적이라 정부가 아무리 가이드라인을 잘 만들어도 평가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어 가이드라인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은 4월 노사정 대타협 결렬 이후 답보 상태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8월 1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달 중 내기로 했던 저성과자 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대한 지침 발표를 보류했다”며 노사정 대화 재개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같은 날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상임집행위원회 회의를 열고 “쉬운 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 등이 빠지지 않으면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8월 7일 성명을 통해 “김대환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이 4월 논의 내용을 토대로 그 연장선상에서 논의를 이어나갈 생각이라고 했는데 ‘4월 논의 내용’이란 결국 정부의 개악안, 즉 ‘임금 삭감과 쉬운 해고, 비정규직 양산’ 방안이며 이를 놓고 다시 노동계를 압박하겠다는 것”이라면서 노사정위원회 해체와 김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고용노동부는 8월 12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5차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박 대통령의 ‘4대 개혁 대국민담화’ 후속조치로 노동개혁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는 논란의 중심인 취업 규칙과 일반해고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기자와 통화에서 “정부의 직접적인 철회 입장 표명이 있기 전까지 별다른 조치는 없다. 8월 22일 서울광장에서 개최하는 ‘노동시장 구조개악 저지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준비에 주력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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