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9

2015.08.03

뚱뚱한 것이 아름답다

풍성한 양감과 감각적 색채…몸을 둘러싼 왜곡된 가치관 뒤엎는 ‘비만 천국’

  • 정민영 아트북스 대표 artmin21@hanmail.net

    입력2015-08-03 14: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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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뚱뚱한 것이 아름답다
    왜 ‘백주부’가 떠올랐을까. 둘 다 독학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검증된 ‘흥행보증 수표’이기 때문일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페르난도 보테로(1932~ )의 작품을 감상하다 문득 떠오른 인물이 백주부였다. 백주부는 최근 ‘쿡방’(요리하는 방송) 스타로 등극한 외식사업가 백종원 씨의 애칭이다. 그의 요리는 ‘눈맛’까지 디자인하는 셰프들의 멋들어진 요리와 차이가 난다. 집 안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요리를 선보인다. 그런데 백주부는 설탕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알려졌다시피 현대 사회에서 설탕은 건강의 적으로 통한다. 백주부는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음식은 설탕이 들어가야 맛있다며 ‘설탕 예찬론’을 편다. 그 덕에 사람들은 그동안 설탕을 사용하면서도 찜찜했던 기분에서 벗어나는 묘한 해방감을 맛본다.

    이 지점에서 비만한 사람을 그린 보테로의 그림이 겹쳐진다. 그림 속 인물들은 고무풍선처럼 빵빵하다. 복부비만인 체형은 4등신에 가깝다. 터질 듯한 엉덩이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같은 넓적다리가 시선을 압도한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빅사이즈’다. 우리 시대 미적 기준에 따르면 비만은 악(惡)이다. 세상은 ‘착한 몸매’를 소유한 자들에게만 환호하고, ‘숏다리’나 ‘몸꽝’인 비대한 사람은 투명인간 취급한다. 비만 남녀는 착한 몸매로 거듭나야 할 부정적인 존재일 뿐이다. 다이어트 대상이지, 그 자체로 대접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대중매체와 동일한 시각으로 외모를 판단한다. 그리고 연예인처럼 자기관리에 전력을 기울인다. ‘식스팩’을 만들고, 다이어트를 하며, 사회가 원하는 몸매를 소유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변형’의 도구로서 양감

    보테로의 ‘비만 천국’은 예술작품이지만 은연중에 외모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그늘을 직시하게 한다. 비만인의 소외처럼 가장 효과적인 억압은 존재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리고 배가 나온 퉁퉁한 몸집을 가진 자들이 실은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임을 확인시키고, ‘비만은 아름다울 수 없다’는 편견을 깬다.

    “나는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지 않는다.” 보테로의 말이다. 마치 스타벅스가 커피를 팔면서도 ‘커피가 아닌 문화를 파는 기업’이라고 소개하는 것처럼 아리송하기만 하다. 캔버스에 그린 것은 분명 뚱뚱한 사람들인데, 자신은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기보다 양감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무슨 수작일까.



    보테로의 그림은 엄연히 미술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먼저 양감을 ‘변형’으로 바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콜롬비아 태생인 보테로는 미술관을 학교 삼아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변형이 미술사의 오랜 전통 속에서 지속돼왔음에 주목한다. 조토와 라파엘로, 그레코와 루벤스, 피카소 같은 대가들은 모두 자기 방식으로 대상을 변형했고, 그 변형을 통해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양감과 형태의 중요성을 강조한 13세기 이탈리아 미술에서 보테로는 결정적인 영감을 받는다. 이를 바탕으로 초상화나 정물화, 풍경화 가릴 것 없이 굳건한 형태와 풍만한 양감을 표현하는 데 몰두한다.

    그러니까 보테로가 그린 것은 뚱뚱한 사람이 아니라 부피감 있는 뚱뚱한 세상임을 알 수 있다. 무표정과 부동자세, 정면을 향한 시선 등 인물의 표정이 몰개성적인 것도 실은 두툼한 양감을 살리기 위한 조형적 처방이었다. 보테로에게 바나나, 야자수, 꽃, 동물, 우산, 칼 등의 소재나 남녀는 기본적으로 형태를 가진 덩어리로 존재한다. 그가 뚱뚱한 사람보다 양감 표현에 밑줄을 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뚱뚱한 것이 아름답다
    거칠고 모난 것조차 순하고 둥글둥글하게

    양감과 더불어 감각적인 색감 또한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양감은 빛이 연출하는 명암의 강약으로 표현한다. 보테로는 양감을 명암으로 내지 않았다. 그 대신 색채로 부피감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림이 밝다. 그림자도 아예 없거나 있어도 최소화했다. 그림자는 색채를 지저분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고자 그림자 대신 어두운 톤으로 양감을 빚었다. 이로써 각 소재는 스스로 지닌 색채의 힘으로 빛이 난다.

    화려한 색감은 그림을 심각하게 하지 않는다. 풍성한 양감과 감각적인 색채가 어우러진 작품 스타일은 주제가 무엇이든, 심지어 거칠고 모난 것조차 순하고 둥글둥글하게 만든다. 그래서 투우는 잔인하지 않고, ‘차량 폭탄’(1999) 같은 끔찍한 주제도 큰 충격을 주지 않는다. 에로틱한 사랑조차 에로틱하지 않다. 과장된 양감은 사납고 냉혹한 것을 제거하며, 세계를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보테로의 과장된 세계는 가벼움으로 가득 찬 풍선 같다.”(미술사가 마리아나 한슈타인)

    다인종에, 열정적이고 삶을 즐기는 여유가 있는 라틴아메리카 토착문화에서 뚱뚱한 것은 비호감이기보다 건강, 풍요, 생의 기쁨 같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뚱뚱한 사람은 기분 좋음, 감각적 즐거움, 좋은 성품 등을 의미한다. 보테로는 라틴아메리카의 이 같은 문화적 클리세이를 작품으로 승화해 자기 브랜드화했다.

    사람들의 선입관과 달리 보테로의 비대한 체형은 부정적인 몸매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뚱뚱보를 치료 대상이자 다이어트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 눈에 보테로의 인물과 세계가 비정상적이지만 그 세계는 밝고 건강하다.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소비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호는 외모”라고 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몸매는 과시적 수단을 넘어 자신을 표현하는 스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재산을 관리하듯 외모를 관리한다. 외모는 중요한 사유재산이다. 수많은 이가 배고픔을 견디며 다이어트에 몰입하는 이유다. 대중매체는 또 유명 배우나 가수들의 조각 같은 몸을 탐닉하며 과시적인 몸매를 향한 대중의 욕망을 부채질한다.

    2015년 만나는 ‘페르난도 보테로전(展)’은 인체에 대한 색다른 해석으로 조형적인 즐거움을 주는 한편, 담론의 전쟁터가 된 몸을 둘러싼 왜곡된 현실을 비추는 효과까지 낸다. 백주부의 요리가 억압된 사람들의 마음에 빛을 줬듯이, 보테로전은 성공과 생존을 위해 애쓰는 개인들의 외모 관리를 ‘아름다움을 향한 자연스러운 욕망’이라 믿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관리 이데올로기까지 슬쩍 건드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보테로의 비만 남녀를 거울삼아 다시 군살 없는 몸매를 향한 다이어트에 더욱 매진할 것이다. 둘러보면, 전시장 밖 어디에도 뚱보를 위한 자리는 없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 2전시실, 10월 4일까지, 문의 02-580-1300.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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