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8

2015.07.27

‘만능간장’이 필요한 과로사회의 초상

정시 출퇴근·2주 연속 휴가·출산 전후 휴가만 보장해도 큰 변화

  • 김영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과로사회’ 저자 culmin@daum.net

    입력2015-07-27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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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능간장’이 필요한 과로사회의 초상
    요즘 장안의 화제인 ‘백주부’ 백종원 씨의 만능간장은 그야말로 만능이다. 이거 하나면 두부조림, 가지볶음, 감자조림, 달걀장조림, 꽈리고추볶음, 호박조림 같은 각종 반찬부터 비빔밥, 어묵국, 순두부찌개, 궁중떡볶이까지 못해낼 음식이 없으니 말이다. 만능간장 열풍은 주부를 넘어 남편과 자취생 마음까지 사로잡고, 우리 밥상 풍경을 바꿔놓았다. 이 인기의 배경에는 ‘만들어봤는데 맛이 좋고 꽤 간단하다’는 입소문이 있다. 눈여겨볼 대목은 만능간장이 요리 시간을 혁신적으로 줄여준다는 점이다.

    사실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 직접 요리를 해먹는 건 꽤 비합리적인 선택이다. 재료를 준비하고 손질해야 하는 수고는 정해졌는데,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한다 해도 맛이 없을 수 있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요리 후 남은 재료를 처리하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다.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요즘 한국인에게 좀 더 합리적인 선택은 댓글로 맛이 보증되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좋아요’가 많이 달린 식당에서 외식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실제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농협경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의 1차 신선식품 소비는 계속 줄어드는 반면, 2차 가공식품이나 간편식 소비는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능간장은 시간 비용을 대폭 낮추는, 시간빈곤 시대에 적합한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시간빈곤에 시달리다 보니 요즘엔 육아 스타일도 달라졌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듯, 아이와의 애착은 정성과 노력만 있다고 형성되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일정 정도의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으니 요즘 부모들은 관계의 빈자리를 ‘파워레인저 트레인포스’나 ‘엘사 얼음성’ 같은 ‘신상’ 장난감으로, 혹은 입소문 난 키즈 카페로, 때로는 스마트폰 게임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장남감이나 전자기기가 문제라고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서비스를 통해서만 ‘부모다움’과 ‘우리는 정상 가족’임을 확인하는 빈도가 많아지고 그 의존도가 높아진다면 ‘나는 집에서 현금인출기야’라고 자조하는 아빠 혹은 엄마가 많아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만화 ‘미생’의 오과장이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간 제주도에서 확인한 것이 오직 아이들과의 묘한 유격, 공감 부재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장시간 노동, 만악의 근원

    이런 현실은 장시간 노동에 따른 시간빈곤으로 뒤틀릴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부모-자식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리적 여유가 있어야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관계를 만들고 공감하며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시간빈곤은 관계를 단절하고 공감 능력까지 퇴화시킨다. 최근 한 조사에서 아이를 돌보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남성 응답자들은 ‘아이와 노는 방법을 몰라서’(29.7%), ‘아이와 소통이 되지 않아서’(20.7%)라고 답했다. 이들이 아이와 노는 방법이나 소통할 방법을 모르는 건 아이와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엔 시간 부족이 있다. 이렇게 시간빈곤은 접촉 부재, 관계 단절, 공감 상실이라는 악순환의 근원이 된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핵심은 장시간 노동이다. 한 사회의 시간 구조는 우리의 식생활이나 육아 패턴을 비롯해 가족관계, 사회관계, 여가활동, 수면 패턴의 모든 부분을 규정한다. 그러고 보면 장시간 노동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시간빈곤이라는 구조적 한계 위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장시간 노동이라는 말에는 노동시간이 길다는 뜻과 함께, 퇴근의 불규칙성과 체력 소진 등의 개념까지 담겨 있다. 그러니 장시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남는 시간에도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기획하기 어렵다. 반면 ‘좀 더 짧은 시간의 일’ 혹은 ‘좀 더 규칙적인 퇴근’은 일과 후 운동이나 취미생활, 자기계발, 여가활동, 봉사활동, 사회참여 등을 더욱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이렇게 돼야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 수 있고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빈곤이라는 비정상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 방법으로 ‘시간의 민주화’를 제안한다. 시간의 민주화는 시간빈곤이라는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방법론이며, 시간빈곤의 퇴치는 과로사회에 발 딛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제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2주 연속 휴가를 보장하라”

    ‘만능간장’이 필요한 과로사회의 초상
    시간의 민주화를 위해 먼저 필요한 건 2인분의 일을 1명이 짊어지는 기형적인 노동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동시간의 상한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연간 노동시간뿐 아니라 월간, 주간, 일간 노동시간의 상한을 명확히 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장시간 노동문화는 개선할 수 없다.

    이와 더불어 시민 개개인이 시간의 권리 누리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적 토대를 탄탄히 다져야 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자유시간의 가치는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인다. 개미와 베짱이라는 안경으로 보면 ‘동료의 칼퇴근’ ‘신입사원의 2주 연속 휴가’ ‘출산휴가 석 달’은 ‘미친 짓’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보면 ‘이기적이네’ ‘아줌마 다 됐네’ ‘여자는 이래서 안 돼’ ‘평생 놀고먹지 그래’ 같은 언어폭력이 생겨나고, 이것들은 노동자의 시간권리를 휴지조각으로 만든다.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나라에서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신입사원의 휴가 총량이 프랑스 신입사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프랑스 신입사원은 2주 남짓한 바캉스를 떠나는데, 한국의 신입사원은 고작해야 여름휴가 4~5일을 쓰는 데 그친다. 정규직이 아니면 이마저도 없다. 결국 문화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필자가 노동시간 상한을 명확히 정하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동시에 ‘온전히 2주 연속 휴가’를 쓸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 달리 말하면 문화적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시 출퇴근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2주 연속 휴가, 출산 전후 휴가 등만 다 쓰게 해도 우리 사회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면 만능간장, ‘신상’ 장난감, 키즈 카페, 가공식품, 피로해소제, 자양강장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일상을 살아나가면서 퇴화된 공감 능력을 되살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기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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