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1

2015.06.08

워싱턴 정치의 속살, 클린턴 모금 행사 찾아가보니

후원금 2700달러 내야 입장 가능…취재도 촬영도 ‘절대 금지’

  • 부형권 동아일보 뉴욕 특파원 bookum90@donga.com

    입력2015-06-08 13:0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워싱턴 정치의 속살, 클린턴 모금 행사 찾아가보니
    “그동안 나와 언론의 관계는 때때로 복잡 미묘했다. 어떤 비밀 유지도, 사생활 보장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 언론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싶다.”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선거(대선) 유력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부 장관은 3월 워싱턴의 한 언론계 행사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영부인 시절 남편(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을 겪으면서 ‘언론 기피증’이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연방 상원의원(뉴욕 주) 선거에 나서기 전 참모들로부터 기자회견 등 언론 대응법에 대해 개인 과외를 받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2008년 민주당 대선경선에서도 미국 내 주요 언론이 자신보다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더 우호적이어서 불이익을 봤다는 피해의식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외부에 알리지 마라”

    클린턴 전 장관은 2016년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면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2008년의 ‘강한 여성 지도자’에서 ‘자상한 어머니(할머니) 모델’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나는 그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최근 그의 선거자금 모금 행사를 직접 취재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 가운데 하나는 ‘클린턴 전 장관이 여전히 언론 기피증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구심이었다.

    “비공개 행사니 밖으로 나가주세요.”



    6월 1일 오후 2시쯤 미국 뉴욕 퀸스 ‘플러싱 메도스코로나 공원’ 안에 있는 대형 연회장 ‘테라스 온 더 파크’. 퀸스가 지역구인 민주당 조지프 크롤리, 그레이스 멍 연방 하원의원이 클린턴 전 장관을 위해 주최한 선거자금 모금 행사장이었다. 참석자들은 신분 확인 절차를 거친 뒤 명찰을 받고 경호팀의 보안 검색까지 통과한 뒤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기자가 이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찍자마자, 자신을 ‘클린턴 캠프의 언론 담당 스태프’라고 밝힌 젊은 여성이 다가와 “이곳을 어떻게 알았느냐. 취재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클린턴 캠프는 ‘힐러리가 1일 퀸스에 간다’는 사실을 e메일 등을 통해 이 지역 지지자와 자원봉사자들에게도 알렸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는 후원금 2700달러(약 300만 원) 이상을 내고 사전 허락을 받은 인사에게만 “외부에 알리지 마라”는 ‘엄중한 요청’과 함께 통지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계, 중국계 등 아시아계 유력 인사 100여 명만 참석했다.

    그래서일까. 행사 시작 전 취재진은 기자밖에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건물 밖에서 클린턴 전 장관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행사 시작 예정시간인 2시 30분 무렵 클린턴 캠프의 다른 여성 스태프가 밖으로 나와 기자에게 다시 물었다.

    “진짜 여기 왜 온 것이냐.”

    “힐러리 전 장관에 관심 많다. 한국 독자들도 ‘그가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이 될 것인지’ 궁금해한다.”(기자)

    “고맙다. 그는 정말 훌륭하다. 하지만 오늘 행사는 비공개이고, 취재할 수 없다.”

    “알았다. 사진만 한 장 찍고 갈 테니 신경 쓰지 마라.”(기자)

    오후 3시쯤 순찰차를 타고 온 뉴욕 경찰 3명이 행사장 앞에 도열했다. ‘이제야 오는군’ 생각했지만, 그러고도 다시 20분이 흘렀다. 그제야 검은색 대형 승합차 2대와 승용차 등 차량 서너 대가 건물 입구 왼쪽 주차장 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사진을 찍으며 발걸음을 옮기자 아까부터 기자를 예의주시하던 ‘클린턴 캠프 경호팀’ 관계자가 큰 소리로 “No(안 된다)!”라고 외치며 가로막았다. 경찰 한 명도 출입구에서 30m 정도 떨어진 화단을 가리키며 “여기 있지 말고 저쪽으로 이동해달라. 경호팀의 요청이니 협조해달라”고 말했다. 흡사 사건사고 현장의 ‘폴리스라인’ 밖으로 밀려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 정문 대신 건물 뒤 주차장을 택한 ‘뒷문 입장’이었다.

    “이미 들어와 있다”

    그 무렵 현장에 도착한 ‘더 차이나 프레스’ 등 중국 기자 3~4명이 기자에게 “힐러리가 안으로 들어갔느냐”고 물었다. 그중 한 사람이 행사장 안에 있는 중국계 인사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더니 “(힐러리가) 이미 들어와 있다고 한다”고 알려줬다. 건물 뒤 주차장으로 들어간 그 검은색 승합차에 클린턴 전 장관이 타고 있었다는 얘기다.

    4시 5분쯤 주차장에 있던 검은색 승합차와 승용차들이 건물 출입구 앞으로 이동했다. 화단 뒤쪽으로 쫓겨난 기자들은 클린턴 전 장관이 나오는 모습을 담기 위해 일제히 카메라를 꺼내 들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자 경찰 한 명이 취재진 쪽으로 건너왔다.

    “사진 촬영도 해선 안 된다. 경호팀의 요청이다. 협조해달라.”

    “이해할 수 없다. 사진도 못 찍나. 이 정도면 ‘언론의 자유’ 침해 아닌가.”(기자들)

    “원래 사진 취재는 자유롭게 하는 건가.”

    “그렇다. 당연한 것 아닌가.”(기자들)

    “그래도 안 된다. 나도 어쩔 수 없다.”

    결국 기자들은 각자 화단 나무 뒤에 숨어서 파파라치처럼 사진 취재를 해야 했다. 클린턴 캠프 측은 이날 행사 참석자들에게도 ‘캠프의 전문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제공할 테니 개별 사진 촬영은 자제해달라’고 몇 차례나 당부했다고 한다. 한 캠프 관계자는 “클린턴 전 장관이 자신의 모습이 함부로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아직은 대대적으로 언론 등에 등장하는 게 대선 전략상 좋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오후 4시 20분쯤, 취재진은 모두 떠나고 경찰과 경호원만 즐비한 건물 앞으로 클린턴 전 장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바로 차량을 타고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40여m 떨어진 나무 뒤에서 망원렌즈를 이용해 사진 몇 컷을 찍는 동안 기분이 묘했다. 대중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정치인의 모습을 연예인의 비밀 결혼식장 취재하듯 몰래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 나라. 알수록 더 기묘한 워싱턴 정치의 속살이다.

    힐러리의 적수(敵手), 공화당 루비오

    워싱턴 정치의 속살, 클린턴 모금 행사 찾아가보니

    2014년 1월 방한한 마코 루비오 미국 상원의원이 서울 종로구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민주당이 대표하는 진보 진영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정치인은 클린턴 전 장관 외에도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마틴 오말리 전 메릴랜드 주지사 등이 있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에서 클린턴 전 장관의 당내 지지율은 70~80%대로 압도적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젊은 세대 사이에서 클린턴 전 장관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다. 최근 하버드대 교지 ‘더 하버드 크림슨’이 올해 졸업생 중 절반가량인 760명의 설문 답변을 분석한 결과 응답자의 63%가 클린턴 전 장관을 지지했다. ‘미국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을 기대하기 때문일까. 여학생의 지지율은 71%에 달했다. 하버드 졸업생의 정치 성향은 진보가 62%인 반면, 보수는 9%에 불과했다. 다만 클린턴 전 장관이 오바마 대통령만큼 젊은 진보층 사이에서 폭발력을 갖고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2014년 같은 조사에서 응답한 졸업생 중 80%가 ‘2012년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투표했다’고 밝힌 바 있다. 클린턴 전 장관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하는 셈이다.

    클린턴 전 장관을 상대할 공화당 유력주자로는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가 가장 많이 거론된다. 아버지 부시, 형 부시에 이어 한 집안에서 사상 최초로 3명의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을지 여론의 관심이 높다. 미국 국내 언론은 두 사람의 대결이 성사되면 ‘클린턴 왕조 vs 부시 왕조’의 흥미로운 승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최근 ‘뉴욕타임스’는 ‘클린턴 캠프가 가장 두려워하는 공화당 후보는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플로리다 주)’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클린턴 캠프와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 ‘Marco Rubio Scares Me(마코 루비오가 나를 겁나게 해요)’란 네 단어가 회자되고 있다는 후문. 루비오 의원이 클린턴 전 장관에게 위협적일 수 있는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극명하게 대조적인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먼저 나이. 클린턴 전 장관은 68세로 손녀가 있는 할머니다. 루비오 의원은 그보다 24세나 어린 44세다. 한 세대 가까이 차이 나는 엄마와 아들 뻘이다. 루비오 의원은 늘 “그(힐러리)는 20세기 사람이고 나는 21세기 정치인”이라고 주장한다. 클린턴 전 장관이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면 루비오 의원은 쿠바계 이민자 집안 출신의 히스패닉이다. 유권자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히스패닉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이지만, 루비오 의원은 히스패닉 지지층을 적잖게 확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화당 주자 가운데 한 명이다.

    미국 언론들은 “루비오 의원은 강력한 대중연설가인 데다 젊고, 대중에게 호소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토리가 있다”고 평가한다. 기자는 5월 13일 뉴욕 맨해튼 68가에 있는 외교협회(CFR)에서 진행된 루비오 의원의 좌담회를 취재한 적 있다. 직접 들어보니 역시나 강력한 흡입력이었다. 안보, 경제, 인권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쏟아지는 질문에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막힘없이 자신의 신념을 풀어냈다. 그다음 날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언론은 ‘루비오 의원이 (공화당 내 다른 어떤 주자보다) 좌중을 압도하는 힘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미국 대선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루비오 의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