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4

2015.04.20

봄꽃 흐드러진 낙산에서 만나는 서울의 미소

도시를 연인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도시 개발의 첫걸음 돼야

  •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jerome363@uos.ac.kr

    입력2015-04-20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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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꽃 흐드러진 낙산에서 만나는 서울의 미소

    화사한 봄꽃과 연둣빛 새잎이 아름다운 낙산 풍경.

    딱 이맘때다. 봄꽃이 화사하게 세상을 물들이던 봄날이었다. 벚꽃이 눈송이 날리듯 바람에 날아가던 공대 연못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처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며칠 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문예회관 소극장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노랑과 분홍과 연두색의 줄무늬 니트에 품이 너른,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고 저만치서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작은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보며 내 얼굴에도 봄꽃이 피었다.

    지금도 그날 그 장면이 영화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만나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혼인을 했다. 아이 넷을 낳아 키우며 지금까지 알콩달콩 사랑하면서 살고 있다. 아내와 처음 만났던 그 장소와 그 순간을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연인과 사랑에 빠지듯 우리 도시와도 사랑에 푹 빠져볼 수는 없을까. 서울을 연인처럼 대할 수는 없을까.

    바로 그곳, 대학로 뒤편에 나지막한 산이 있다. 지금 우리가 낙산이라 부르는 그 산은 한양도성을 감싸는 4개의 산, 즉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하나다. 북쪽 백악(북악)산과 남쪽 목멱산(남산), 동쪽 낙산과 서쪽 인왕산까지를 내사산이라고 부른다. 조선왕조가 수도 한양을 건설하며 내사산의 산등성이와 언덕을 이어 성곽을 쌓았으니, 이 4개 산은 서울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발그레 홍조 띤 서울 풍경

    낙산을 부르는 이름은 꽤 많다. 산 모양이 낙타를 닮아 낙타산(駱駝山)이라 불렀고, 궁궐에 우유를 공급하는 관청 타락색(駝酪色)이 있다는 이유로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이야 흔하디흔한 게 우유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송아지를 갓 낳은 어미 소의 젖을 짜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일을 담당하던 관청이 바로 낙산에 있었다고 한다.



    낙산을 타락산이라 부른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타락했다는 뜻의 타락(墮落), 우유를 뜻하는 단어 타락(駝酪) 말고, 타락이란 단어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불그레해진다는 뜻이다.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장에 따르면, 불가에서는 부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닫는 순간 얼굴에 홍조를 띠는 것을 타락이라 표현한다.

    꼭 진리를 깨닫지 않아도 좋다. 연인을 만날 때나 기분 좋게 술을 한잔 걸쳤을 때, 뭔가 설레는 꿈을 꾸고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도 사람 얼굴에는 붉은빛이 감돈다. 그런데 왜 낙산을 이런 이름으로 불렀을까. 불그레한 산이라니.

    요즘 낙산을 바라보면 그 연유를 절로 알게 될 것이다. 봄꽃, 특히 붉은 진달래가 산자락에서부터 뭉게뭉게 피어 올라가고, 연둣빛 새잎이 가지가지 솟아나 파스텔화처럼 번져가는 낙산을 바라보면 꼭 뽀송뽀송 솜털이 돋아난 아기의 붉은 볼을 보는 것 같다. 홍조 띤 여인의 얼굴 같고, 술기운이 살짝 오른 정다운 친구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진리를 깨친 구도자의 얼굴도 아마 이러했으리라.

    낙산만이 아니다. 요즘 서울 어디를 봐도 참으로 곱고 예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이 지천이다. 노란 개나리꽃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한강변 응봉동 언덕과 흑석동 언덕 역시 더없이 아름답다. 무에 그리 급한지 버선발로 뛰어나와 임을 반기듯 잎이 채 피기도 전 꽃부터 피운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목련으로 이어져온 봄꽃 향연은 이제 철쭉과 라일락의 무대로 넘어갈 것이다. 산과 언덕뿐 아니라 동네 골목마다, 집집마다 울긋불긋 꽃대궐이 서고 꽃향기가 천지에 진동할 것이다.

    우리 도시를 물건으로 보지 말자. 건물이나 시설물이 도시의 전부가 아니다. 도시에는 수많은 생명이 산다. 사람도 있고,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도 도시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새들도 도시 주인이고 벌과 나비, 꽃과 나무도 생명체 도시를 구성하는 우리 이웃이다.

    도시는 생명체다. 한 발 더 나아가 도시를 인격체로 보면 어떨까. 도시를 사람처럼, 연인처럼 대하면 어떨까. 도시를 물건으로 여기면 도시계획이나 도시설계는 물건을 만드는 일과 다름없어진다. 그러나 도시가 어디 그런가. 도시는 결코 공장에서 물건 만들 듯 뚝딱 만들어낼 수 없다. 도시를 생명체로 보면 도시설계는 생명을 돌보는 일이 되고, 도시를 연인으로 대한다면 도시설계는 어쩌면 사랑의 다른 이름이 될지도 모른다. 연인 같은 도시 서울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닐까.

    봄꽃 흐드러진 낙산에서 만나는 서울의 미소
    사라진 우리 이름들

    낙타처럼 생긴 낙타산(駱駝山), 우유를 공급하던 우유산(駝酪山), 도를 깨쳐 홍조를 띠듯 봄이면 붉은 진달래꽃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불그레한 산까지 이름도 많고 이야기도 많은 우리 산을 일본 사람들은 이름 글자와 뜻까지 싹둑 잘라 낙산(駱山)이라 개명했다. 그 비극을 모른 채 우리는 연인 같은 이 산을 그냥 낙산이라 부르며 살고 있다.

    이름을 잃어버린 건 낙산만이 아니다. 관악구 봉천동, 신림동 이름이 어느샌가 중앙동, 성현동, 대학동, 청룡동, 신사동으로 바뀌었다. 강남구 신사동과 은평구 신사동에 이어 관악구에도 신사동이 생겼다.

    도로명 위주의 새 주소 체계를 도입하면서 익숙했던 동네 이름이 사라지는 것도 큰 문제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새 주소는 ‘강남구 삼성로 212’다. 삼성로 212란 주소를 보고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연상할 수 있을까. 서울 남부순환로는 강남구, 서초구, 동작구, 관악구, 금천구, 구로구, 양천구를 지나 강서구까지 30km 넘게 이어진다. 해당 구 이름을 앞에 쓰긴 하지만 그래도 남부순환로 몇 길이란 주소만 보고 위치를 가늠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도로명 위주의 새 주소 체계는 효용성뿐 아니라 오래오래 이어온 동네이름을 지워간다는 점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진달래꽃 다 지기 전에 낙산에 가보자. 멀리서 홍조 띤 낙산을 가만히 바라보자. 연인 같은 도시 서울을 보며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금 잘 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이에게 하듯 우리 도시에게 잘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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