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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전통식초를 살려라

전통식초 독립선언서

‘발효의 정점’ 한국 고유 식초 복원과 시장 키우기 본격화

전통식초 독립선언서

전통식초 독립선언서

경북 예천의 초산정. 발효를 마친 식초는 땅 속 옹기에서 숙성과정을 거친다.

7월 25일 오후 7시 서울 서초동 한국전통발효아카데미 사무실에 전국 식초 장인들이 모여들었다. 사라진 전통 발효식초를 현대 과학을 통해 살려내고 제대로 알리기 위한 (사)한국전통식초협회 발기인 대회가 열린 날. 행사장에 모인 식초 장인 30여 명은 전통식초 육성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우리 식탁에서 빙초산을 추방하며, 주정식초와 전통식초의 성분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탈리아 발사믹식초, 미국 사과식초처럼 우리나라를 대표할 전통식초를 살려내자는 데도 의견 일치를 봤다.

회장으로 추대된 한상준 초산정 대표는 “그동안 식초협회가 없어 개인이 전통 발효식초를 연구하다 보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며 “우리가 나서 국내 관광산업과 연계한 식초 마을을 조성하고, 전통식초학회 세미나 등을 열어 전통식초의 우수성을 적극 알려야 한다”며 식초인의 각성을 촉구했다. 한국전통식초협회는 9월 초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설립등기를 준비 중이다.

‘1만 년의 묘약’ 뛰어난 효능

식초시장에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단순히 신맛을 내는 조미료였던 식초의 숨겨진 효능이 속속 알려지면서 식초가 건강식품으로 재조명받는 단계를 넘어, 이제는 전통 발효식초를 직접 만들어 먹으려는 ‘식초인’까지 대거 등장하고 있다. 대기업이 점령한 주정식초시장에 전통식초의 반격이 시장된 것이다.

식초는 고대 바빌로니아 고문서에도 등장하고, 로마제국 시대에는 클레오파트라 등 많은 귀족이 건강과 미용을 위해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전한다. 식초를 ‘1만 년의 묘약’이라고 하는 이유다. 식초에 들어 있는 풍부한 유기산과 아미노산이 혈압을 낮추고, 비만과 당뇨를 예방하며, 간 해독을 돕고, 암에 대한 면역력을 높이며, 피부를 좋게 하는 효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전통식초 독립선언서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 한의서 ‘향약구급방’에 식초를 약으로 쓰는 방법이 기록돼 있고 조선시대 실용지식서 ‘규합총서’에는 쌀식초 제조법이 등장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식초는 풍을 다스린다. 고기와 생선, 채소 등의 독을 제거한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각 가정 부뚜막 위에는 ‘초단지’가 있었고, 먹다 남은 술을 초단지에 부어두면 자연발효가 일어나 식초가 만들어졌다. 탁주 등 술을 병에 넣고 초파리 같은 벌레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산소만 들어가도록 솔가지나 볏짚으로 병 입구를 막아 따뜻한 부뚜막에 보관하면 신맛이 나는 식초가 만들어진 것이다. 알코올이 시간이 지나면서 초산발효로 식초가 된 것인데, 프랑스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는 이 과정에서 초산균이 그 구실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역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家釀酒) 문화와 함께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전통식초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주세령’(1907) 공포로 전통주가 거의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졌다. 일제 당국으로부터 주조 면허를 받아야 하면서 집안 행사 때마다 수시로 빚어왔던 술을 만들 수 없게 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더욱이 해방 후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한 ‘양곡관리법’(1965)이 시행되면서 쌀로 빚던 술은 출처 불명의 수입 밀가루로 대체됐다. 그나마 명맥을 잇던 전통주가 사라지자 전통식초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식초 효능이 알려지고, 때마침 불어온 웰빙(well-being) 바람을 타고 국내 식초시장은 2008년부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올해 식초시장 규모는 15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1969년 한국농산이 사과식초를 선보인 이후 조미식초시장이 커졌고, 2005년부터는 식초음료가 등장하면서 시장 규모를 키운 탓이다.

식초는…

‘신맛 나는 조미료’… 인류 역사와 동행


전통식초 독립선언서

전통식초를 만들고 있는 백용규 교수.

식초(食醋)는 영어로 ‘Vinegar’라고 하며, 프랑스어 Vin(와인)과 Aigre(신맛)의 합성어인 ‘Vinaigre’가 어원이다. 식초란 술이 발효해 신맛이 나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에 ‘신맛이 나는 포도주’가 조미료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오래전부터 술로 식초를 만들어 ‘신맛이 나는 조미료’로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양에서도 한나라 이후 문헌에 식초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며, 술의 역사가 보통 5000년으로 추정되기에 식초도 인류 역사와 함께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발효식초는 곡물이나 과일을 발효해 알코올도수 6~8%인 술을 만들어 옹기에 넣고, 산소가 잘 들어가도록 옹기 입구를 삼베보자기로 덮은 후 30~35도에서 따뜻하게 약 한 달간 보관하면 초산균에 의해 만들어진다. 현미식초의 경우 고두밥에 누룩과 물을 혼합, 발효해 술을 만들고 그 술을 이용해 다시 초산발효를 한 후 옹기에서 오랜 시간 숙성 과정을 거쳐 만든다. 식초 효능을 제대로 체험하려면 이러한 자연발효식초를 하루에 소주잔으로 한 잔(60ml) 정도 꾸준히 섭취하는 것이 좋다.

합성식초는 빙초산 또는 초산을 물에 희석해 만든 액이다. 한국산업규격(KS)에서는 발효식초를 원재료에 따라 곡물식초, 과실식초, 주정식초로 세분화했다. 석유에서 화학적으로 뽑아낸 빙초산을 먹는 물에 희석해 만든 식초는 합성식초라고 한다.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기업의 주정식초는 대형 초탑에 산소를 인위적으로 빠르게 공급해 며칠 만에 원하는 산도를 만들어내는 ‘속초법’을 이용한 것이다. 반면 자연발효식초는 효모로 알코올발효를, 다시 초산균으로 초산발효를 진행해 만든다. 자연발효식초 한 병이 나오려면 적어도 3개월 이상, 일반적으로 6개월 정도는 소요된다. 물론 흑초는 1년 이상 숙성해야 마이얄 반응(아미노산이 당과 결합해 갈색화하는 현상)에 의해 흑갈색의 식초가 된다.

문제는 자연발효식초와 주정식초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르고 영양성분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대한민국 식품공전은 둘 다 발효식초로 정의한다는 점. 병 표기사항에도 식품 유형은 모두 ‘발효식초’라고 쓴다. 따라서 시중에서 파는 제품명에 ‘100% 발효식초’라고 쓰여 있다고 우리 조상이 만들어 먹던 전통방식의 발효식초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주정식초는 원재료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글자로 ‘주정’이라고 쓰여 있다.

백용규 영산대 겸임교수(이학박사)·대한민국 신지식인 100bat@daum.net


일제강점기 거치며 사라져

안타깝게도 한국은 장류, 젓갈, 김치 등 발효식품 종주국으로 꼽히면서도 ‘발효의 정점’인 전통식초는 여전히 일제강점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 현미식초(흑초), 중국 쌀식초(미초), 이탈리아 청포도(발사믹)식초 등이 그 맛과 품질을 인정받아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지만 한국에선 우리 고유의 전통식초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식초가 차지하는 시장 규모는 1~2%대로 추정될 정도다.

전통주가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진 전통식초 자리는 석유에서 추출한 빙초산과 주정(에틸알코올)을 속성 발효해 첨가물을 넣은 주정식초가 차지했다. 흔히 패스트푸드를 주문하면 따라오는 오이피클이나 무절임에 사용하는 식초가 빙초산이다.

전통식초 독립선언서

7월 25일 오후 서울 서초동 한국전통발효아카데미에서 열린 한국전통식초협회 발기인 대회 모습(왼쪽). 시중에서 판매하는 사과식초의 식품유형은 ‘발효식초’이지만 작은 글자로 ‘주정’이라고 쓰여 있다. 음용식초는 산도가 낮아 ‘음료베이스’로 돼 있다.

공장서 속성 발효한 주정식초

전통식초 독립선언서

서울 한 대형마트의 식초음료 매장.

지난해 종합편성채널 채널A ‘먹거리 X파일’에도 등장한 빙초산은 석유나 석회석을 원료로 하고 글루탐산나트륨, 인공감미료 등 여러 식품첨가물을 더해 합성식초(희석초산)라고 부른다. 단무지, 치킨 무, 케첩, 각종 소스와 절임류에 들어가는 빙초산은 일본이나 서구에서는 공업용으로만 허가돼 제초제나 섬유 염색제에만 사용한다. 이러한 강산성 석유정제물을 우리나라에서는 중금속만 제거해 식용으로 쓰는 것. 가격이 싼 데다, 잡내가 없고 절임이 쉬워 식당에선 암암리에 흔히 쓰고 있다. 이에 대한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최근 한 치킨업체는 빙초산 사용 치킨 무 대신 발효식초를 사용한 치킨 무를 선보였다.

주정식초는 석 달 가까이 걸리는 식초 생산기간을 줄이고 단가를 낮추기 위해 알코올발효 없이 주정(에탄올)을 물로 엷게 희석해 초산발효에 필요한 공기를 인위적으로 불어넣어 2~3일 만에 속성 발효한 식초. 조미식초는 대부분 주정식초인데, 주정식초는 신맛을 내는 초산 외에 아무 맛이 없어 첨가물을 넣어 맛을 낸다. 현미 엑기스가 들어가면 현미식초가 되고, 사과 엑기스가 들어가면 사과식초가 되는 것이다. 이는 식품 제조 공정상 원재료가 4% 이상 들어가면 원재료명을 식초 이름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만든 주정식초는 발효식초에 속하지만 식초 효능이 온전히 발현되는지는 알 수 없다. 식초 효능은 풍부한 유기산과 아미노산 등에서 나오는데, 주정식초의 경우 신맛은 다량 함유했지만 다양한 유기산과 비타민, 항산화성분인 폴리페놀 함량이 떨어지기 때문. 백용규 영산대 겸임교수의 설명이다.

“주정식초는 대형 초탑에 산소를 인위적으로 빠르게 공급해 며칠 만에 원하는 산도를 만들어내는 만큼 자연발효와 숙성 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자연발효식초의 영양적 가치와 생리활성물질을 흉내 낼 수는 없다. 문제는 영양성분을 제대로 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술은 기호식품이지만 식초는 음식에 풍미를 더하거나 건강을 위해 먹는 것인 만큼 영양성분이 중요하다. 따라서 초산, 구연산 같은 유기산 함량과 폴리페놀 함량, 단백질 함량, 필수아미노산 함량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소비자의 선택을 돕기 위해서라도 영양성분 표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내 대기업이 생산한 마시는 식초 ‘마시는 홍초’(대상), ‘백년동안’(샘표), ‘미초’(CJ)는 엄밀히 따지면 음료수다. 식품 유형에 ‘식초’가 아닌 ‘음료베이스’로 표기된 것도 이 때문. 식품공전에 따르면, 산도가 최소 4% 이상이어야 식초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국내 마시는 식초시장 매출 1위인 ‘마시는 홍초’에는 초산이 2% 포함돼 음료로 분류된 것. 소량의 식초에 액상과당, 정제수, 올리고당 등이 첨가돼 만들어진 식초음료라고 보면 된다.

CJ 관계자는 “식초냐 음료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식품표기법상 초산 함량이 낮아 음료베이스로 표기했을 뿐 식초 효능은 갖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1호 식초 박사’인 계명대 식품가공학과 정용진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스에 비유하면 전통발효식초는 100% 생과일주스, 주정식초는 일반 주스라고 보면 된다. 주정식초가 효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질적인 부분에서 전통발효식초보다 많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식초 효능만 생각한다면 전통발효식초를 권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전통식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전통발효식초 제조법 재정비 필요

하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전통발효식초 제조법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주정식초에 비해 가격이 10배가량 비싼 점과 일부 전통식초 장인이 식초 효능을 과장해 판매하는 것도 소비자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한국전통식초협회 황윤억 수석부회장은 “식초 효능이 많이 알려지면서 전통식초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실제 전통식초의 명맥을 잇는 식초 장인은 거의 없다”며 “전통 발효기술을 복원, 개발하는 연구부터 성분 분석을 통한 과학적인 데이터를 축적하는 일까지 식초 장인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단순 조미료에서 벗어나 장수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식초. 1907년 주세령 이후 끊긴 전통식초 명맥을 한국 식초인들이 다시 이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인터뷰 | 한국전통식초협회 산파역 황윤억 수석부회장

“전통식초 우수성으로 변화 바람 일으킬 것”


전통식초 독립선언서
한국전통식초협회 황윤억 수석부회장(사진)은 “명맥이 끊긴 전통식초를 연구해 소비자에게 제대로 알리는 게 협회의 목표”라며 “대기업 주정식초 일색인 국내 식초시장에 변화 바람이 불 것”이라고 말했다. 황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초 서울 서초구에 식초학교를 열어 전통식초 대중화 사업에 뛰어들었고, 협회 창립을 위한 산파역을 맡은 인물. 다음은 일문일답.

식초 장인들이 식초협회를 만든 이유는.

“소비자는 식초 효능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데 시중에서 판매하는 식초가 기대만큼 효능이 있는지는 잘 모른다. 우리는 전통식초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통해 전통식초의 우수성을 알리고, 그 연구 성과물을 바탕으로 대기업 위주의 식초시장에 뛰어들어 한판 전투를 벌일 생각이다. 빙초산을 우리 식탁에서 추방하고, 주정식초 일색인 발효식초시장에서 건강한 전통식초시장을 개척하려는 거다. 생각해보라. 식초에는 아미노산과 폴리페놀이 풍부하다고 하는데 시중 식초병엔 그 성분이 얼마나 들었는지 표기돼 있지 않다. 우리가 먼저 전통식초에 든 성분을 공개하면 소비자가 그것을 알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협회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큰가.

“식초 장인과 한의사, 요리사 등 식초 관련 종사자의 관심이 높다. 현재 200여 명이 참여하고 있고, 일반인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 일반인은 인터넷에도 식초 관련 정보가 거의 없고, 있어도 틀린 정보가 많아 전통식초를 제조하는 데 애를 먹는다며 찾아온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식초 장인들과 함께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일반인 중에는 ‘전통주 공부는 안 하고 식초 제조법만 배우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식초는 전통주 공부를 해야 만들 수 있다.”

주정식초를 생산하는 대기업이 긴장할 수 있겠다.

“대기업은 전통식초와 빙초산, 주정식초의 영양성분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한다. 전통식초가 시장에서 선전하면 대기업 역시 질 좋은 식초를 선보일 테고, 결국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식초학술대회 개최와 전통식초 성분 분석, 초산균막 연구, 전통식초 육성법 제정 등을 통해 대기업 식초와 경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통해 현재 주정식초에 비해 10배 정도 비싼 전통식초 가격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전국 식초 장인을 모으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일부 유명 식초 장인은 굳이 협회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일제강점기 이후 명맥이 끊긴 전통식초를 재현하려고 해도 연구 데이터가 없어 일본이나 중국에서 배워온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 데이터를 공유하는 협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각 지방자치단체도 전통 양조식초사업을 지원하고 있고, 농업 등 한국 고유문화와 관광산업을 연계한 산업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다.”




주간동아 2014.08.18 951호 (p24~28)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이근희 인턴기자·원광대 한의대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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