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5

2017.07.05

그냥 좋은 장면은 없다

몰입의 기쁨 알려주는 ‘소실점’

선원근법의 역동성과 끌림이 주는 기대감

  • 신연우 아트라이터 dal_road@naver.com

    입력2017-07-04 10: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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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으로 가는 KTX. 기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맞은편 자동문은 쉴 새 없이 푸싱, 푸싱 소리를 내며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한다. 단체여행을 가는 앳된 얼굴의 여대생들이 우르르 들어와 빈자리에 앉고, 뒤이어 스페인어를 쓰는 외국인 가족이 자리를 잡는다.

    아기를 안고 들어오는 엄마는 떼쓰는 아기를 달래며 좌석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다른 좌석에 앉은 남자는 자리 주인이 오자 멋쩍은 표정으로 일어선다. 기차는 푸싱, 열차 칸 문이 몇 번 더 열리고 닫힌 후 서서히 출발한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더니 이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한다.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천장이 만드는 긴 선이 문이 있는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 보였다. 선들이 만나는 곳에 시선이 집중돼 빠른 KTX가 더욱 속도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휘어지거나 방해받지 않고 쭉 뻗은 직선은 설레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거침없이 달리도록 돕는 것 같다.



    레옹의 미래를 말해주는 소실점

    화가의 시선을 고정하고 시선과 동일한 위치에 점을 하나 찍은 후 그림 속 건축물의 모서리를 그 점으로 이으면 선이 그려진다. 선들이 하나로 모이는 지점이 바로 ‘소실점’이다. 회화에서 중앙의 소실점 하나에 모여드는 선원근법은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효과가 있다.

    예술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이 저서 ‘미술과 시지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들이 만나는 소실점은 강한 역동적인 효과를 낳아 선들이 숨 가쁘게 초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미지를 형성하며, 나아가 초점을 뚫고 무한히 앞으로 전진하는 공간을 만든다.



    킬러와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레옹’(1994)에서 앞으로 진출하는 선원근법과 소실점이 종종 등장한다. 영화 초반 청부살인업자 레옹이 지하철을 타는 장면이 나온다. 업계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인 그가 마피아 두목의 숙소를 급습하고 성공적으로 일을 마무리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손을 씻고 새 길을 가려 하는 레옹은 아무도 없는 지하철에 홀로 서서 굳게 닫힌 열차 문을 바라본다.

    뒤돌아선 레옹의 시선 끝에 굳게 닫힌 문이 있다. 그가 가는 길에서 마주한 답답한 마음이 선들이 맞물리는 점에 자리한다. 영화 후반 레옹이 다시 깊은 선원근법의 공간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어두운 복도를 걷는 그가 향하는 곳은 활짝 열려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이다. 문까지만 도달하면 그토록 기다리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열린 문은 희망의 상징으로, 긴 복도의 구조가 만드는 선들의 소실점에 있다. 그 점으로 레옹과 관객의 시선이 함께 빨려 들어간다. 이 두 장면에서 중심으로 모이는 선들은 깊이 있는 공간을 연출해 공간 속 인물이 나아가는 미래 이야기를 그려낸다.



    삶의 원동력은 행복이 아닌 ‘몰입’

    선원근법의 깊이감은 너무 사실적이라 오히려 비현실적인 환상 공간을 창조한다. 깊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속도감까지 더해 아찔한 분위기를 표현하기도 한다.

    LG전자가 네덜란드에서 진행한 프로모션은 비현실적인 선원근법의 깊이감을 활용했다. 광시야각 기술인 IPS 디스플레이를 홍보하는 광고에서 제품의 효과를 극대화해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엘리베이터 바닥에 IPS 디스플레이를 설치해 여기에서 영상이 상영되도록 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잠시 뒤 갑자기 바닥이 무너져 깊고 깊은 아래 공간으로 떨어지는 영상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생생한 공간에 놀라 구석으로 물러서다 ‘가짜’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내 안도하며 즐거워한다(광고 영상은 유튜브 youtu.be/NeXMxuNNlE8 참조). 중심으로 시선을 모아 깊은 공간감을 연출한 선원근법과 소실점이 마음을 자극하고 행동까지 일으키는 시각적 몰입을 유도했다.

    소실점이 이끄는 방향은 한눈팔 사이도 없는 몰입의 길이다. ‘몰입’의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미국 클레어몬트대 피터드러커대학원 교수는 삶을 훌륭하게 가꿔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빠져드는 몰입이며, 몰입하는 어떤 일이 끝난 다음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소실점은 흐트러진 시선을 끌어모으고, 모든 힘을 동원해 도전할 수 있는 열정적인 몰입이다. 소실점으로 가는 길이 흥미진진한 이유는 목적지에 도달한 다음 일어날 미래가 기대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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