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3

2014.06.23

브라주카, 너 정말 빠르구나

6개 패널로 터치감과 안정성 높아 골 풍년 만들어

  • 변지민 과학동아 기자 here@donga.com

    입력2014-06-23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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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주카, 너 정말 빠르구나
    “어!” 6월 18일 이른 아침, 출근길 곳곳에서 외마디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국과 러시아의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H조 경기. 후반 23분 이근호 선수가 아크서클 오른쪽에서 찬 중거리 슛이 골키퍼 손을 맞고 ‘어이없이’ 골문으로 빨려 들어간 뒤였다. 슈팅치고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골키퍼 정면으로 날아간 공이 골로 연결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출근길 스마트폰으로 경기를 시청하던 많은 이가 갑작스러운 골에 내뱉은 탄성이 지하철 안 곳곳에서 들렸다.

    “이근호 선수도 잘 찼지만 ‘브라주카’가 워낙 빠른 공이라 골키퍼도 당황했을 겁니다.”

    기존 공인구보다 20% 빠른 속도

    골이 들어간 직후 한 해설위원은 월드컵 공인구 ‘브라주카’를 칭찬하며 “정확도가 높고 빠른 공”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 월드컵에서 ‘골 풍년’이 벌어지는 것도 브라주카 덕분이라는 설명과 함께. 대다수 언론도 ‘기존 공인구보다 20%나 빠른 속도’라며 비슷한 레퍼토리로 브라주카를 치켜세운다. 그렇다면 정말 브라주카는 빠르고 정확할까.

    브라주카가 2010 남아공월드컵 공인구인 ‘자블라니’보다 빠른 것은 사실이다. 공이 날아갈 때 공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항력)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공이 초속 10~20m로 날아갈 때만 브라주카가 자블라니보다 항력이 작다. 초속 10~20m면 선수들이 패스를 주고받는 속도다. 패스를 짧게 주고받을 때는 공이 훨씬 빠르게 날아간다는 말이다. 실제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이 예전보다 빨라졌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초속 25m를 넘어가면 오히려 항력이 커져 공이 상대적으로 느려진다. 여기서부터는 오히려 브라주카가 자블라니보다 항력이 커진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근호 선수가 강력한 중거리 슛을 때렸을 때는 브라주카 속도가 분명 초속 25m 이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빠른 속도에서는 오히려 공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가는데, 어떻게 이근호 선수가 브라주카 덕을 볼 수 있었을까. 언론에 나온 이야기들은 단편적인 정보만 접하고 섣불리 내린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브라주카, 너 정말 빠르구나

    2014 브라질월드컵 공인구 ‘브라주카’.

    브라주카의 물리적 특성을 소개할 때 거의 모든 언론이 취재원으로 삼는 인물이 있다. 일본 쓰쿠바대 스포츠과학연구소 홍성찬 박사다. 우리나라에 그만큼 축구공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과학자가 없을뿐더러, 공을 차는 로봇과 실험장까지 갖추고 축구공을 연구하도록 후원해주는 대학도 없다. 어쨌든 그는 이번에 ‘네이처’ ‘내셔널지오그래픽’ ‘워싱턴포스트’ 같은 세계 유수 언론에 연구결과가 실렸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축구공 마니아’다. 속도에 따른 브라주카와 자블라니의 항력 변화도 그의 연구결과다.

    홍 박사는 브라주카가 목표 지점으로 매우 정확하게 날아간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단 여기에도 조건이 붙는다. ‘자블라니에 비해서’다. 무슨 뜻인지 궁금하면 2010 남아공월드컵을 떠올려보자. 자블라니는 당시 골키퍼들로부터 어마어마하게 원성을 샀다. 무슨 공이 날아오다 뚝 떨어지거나 옆으로 휘는 등별별 기행을 다 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깨비 공’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렇다고 딱히 공격수들에게 유리하지도 않았다. 원하는 방향으로 정확히 날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블라니가 이처럼 워낙 엉망이었던지라 상대적으로 브라주카의 정확성이 높아진 듯 보이는 것이다. 실은 2006 독일월드컵 공인구 ‘팀가이스트’와 비슷한 수준이다. 자블라니가 얼마나 엉터리 공이었느냐면, 심지어 공을 놓는 방향에 따라서도 날아가는 궤적이 달라졌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다. 공 겉면에 있는 검은색 패널을 위로 향하게 하느냐 아래로 향하게 하느냐에 따라 공을 찼을 때 도달하는 위치가 수십~수백cm 달라졌다. 이러니 ‘로또 공’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반면 브라주카는 패널을 어느 방향으로 놓든 거의 일정하게 날아간다. 이것도 홍 박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브라주카가 ‘자블라니보다는’ 정확성이 높다. 또 브라주카는 굴러갈 때 정확성이 높다. 브라주카에는 바람개비 모양의 패널이 총 6개 있는데, 패널 수가 역대 최소라 구(球)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2년 공인구 ‘피버노바’ 때까지는 월드컵 공인구의 패널이 32개로 동일하다 2006년 14개, 2010년 8개로 계속 줄어들어 이번 월드컵에서는 6개까지 줄었다. 공이 구에 가까워질수록 바닥에서 굴렸을 때 목표 지점까지 정확히 굴러간다. 엉터리 팀가이스트도 바닥에서는 제대로 굴러갔다. 다음 월드컵 때는 패널이 몇 개로 더 줄어들지 전망해보는 것도 ‘축구공 마니아’의 관전 포인트다.

    짧은 패스 조직력 강한 팀 유리

    브라주카, 너 정말 빠르구나

    2010 남아공월드컵이 끝난 뒤 영국 런던대 하비에르 로페즈 페냐 교수가 네덜란드 팀과 스페인 팀의 경기력을 수학적으로 분석해 그린 그림. 선수 11명이 어떻게 패스(선)를 주고받았는지 한눈에 보인다.

    “브라주카만 봤을 때 어느 나라가 우승할 것 같습니까.”

    홍 박사를 만난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다. 홍 박사는 “짧고 빠른 패스를 통해 조직력으로 승부하는 팀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브라주카가 중거리 슛에서는 속도가 잘 안 붙지만, 패스할 때는 속도와 정확성이 모두 높아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물론 공만 본다면요”라고 홍 박사는 웃으며 덧붙였다.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나라가 있는가. 있다면 유럽 축구를 좀 아는 사람일 것이다. 힌트를 주겠다. ‘티키타카(Tiki-Taka)’, 즉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짧은 패스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전술을 구사하는 나라! 그래도 모른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힌트를 주겠다. 2010 남아공월드컵 우승국은? 그렇다. 바로 스페인이다.

    브라주카, 너 정말 빠르구나

    6월 18일(한국시간)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H조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은 이근호 선수.

    남아공월드컵이 끝난 뒤 영국 런던대 하비에르 로페즈 페냐 교수는 16강에 오른 나라들의 경기력을 수학으로 분석한 흥미로운 연구를 발표했다(그림 참조). 수학자인 페냐 교수가 사용한 방법은 그래프 이론으로 선수 사이의 패스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11명의 선수가 어떻게 패스(선)를 주고받는지 경기 영상을 돌려보며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 결과 우승팀인 스페인의 패스 수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많았고, 삼각형 구도(선수 3명이 주고받는 삼각 패스)로 조직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페인이 패스를 한 횟수는 독일보다 40%가량, 네덜란드보다 2배가량 많았다. 게다가 특정 선수가 특별히 돋보이지 않고 모든 선수가 많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조직적인 경기를 펼쳤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스페인처럼 조직적인 축구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긴 하지만, 패스 수가 훨씬 적었다.

    이 연구는 2010년 경기 결과를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라 지금도 똑같이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4년간 절치부심한 어느 나라가 강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치고 올라올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스페인이 1차전에서 네덜란드에 4점차로 대패했고, 칠레에도 져 예선 탈락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올해는 과연 어떤 나라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까. 어쩌면 조직력이 강한 우리나라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브라주카, 너 정말 빠르구나

    6월 18일 한국과 러시아의 경기에서 러시아 골키퍼 이고리 아킨페예프가 후반 23분 이근호의 중거리 슛을 잡으려다 놓치는 모습. 공은 아킨페예프의 손을 맞고 머리 뒤쪽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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