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1

2014.03.31

“세상 다 가진 기쁨 기부하면서 느꼈죠”

우리 시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된 사람들

  • 윤솔 인턴기자 zzyori0206@gmail.com

    입력2014-03-31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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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안, 노신희 부부

    후배들 마음껏 공부 20억 원 토지 ‘선뜻’

    “세상 다 가진 기쁨 기부하면서 느꼈죠”

    중앙대 명예약학박사 이기안, 노신희 부부.

    3월 26일 오전 11시 서울 동작구 흑석로 중앙대 캠퍼스 연구개발(R·D)센터 3층 대강당에서 일흔 넘은 노부부가 다정하게 학사모를 쓰고 포즈를 취했다. 이기안(75), 노신희(72) 부부다. 지난해 중앙대에 20억7000만 원(공시지가 기준)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한 이들은 이날 명예약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두 볼이 부풀도록 웃음 지었다. 손에 든 꽃만큼이나 화사한 빛이 얼굴에 감돌았다.

    이씨 부부가 기부한 토지는 평생 함께 약국을 경영하며 번 돈을 모아 마련한 것. 이씨는 막대한 자산을 모교에 기부한 이유에 대해 “특별한 건 없다. 그저 가진 것을 나누는 것뿐”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는 줄곧 그렇게 살아왔다. 아내 노씨와 함께 1983년 가톨릭약사회를 창립한 뒤 아프리카 수단에 의약품을 보내고, 서울 미아삼거리 성가복지병원에 후원금을 냈다. 요즘은 매주 일요일마다 이주노동자를 무료로 진료하는 서울 종로구 ‘라파엘클리닉’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이씨 부부가 이번 기부를 통해 바라는 건 후배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 중앙대는 이 뜻에 따라 토지 매각 자금의 절반을 ‘100주년 기념관’ 건립에 사용하고, 나머지로 ‘약학대 이기안·노신희 장학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씨는 “학생들이 우리가 지원한 돈으로 공부할 걸 생각하면 무척 좋다. 아내와 둘이 말로 다 못 할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류양선 씨

    남을 위해 쓴 돈 진짜 부자로 만들어

    “세상 다 가진 기쁨 기부하면서 느꼈죠”

    젓갈을 팔아 기부를 해온 ‘젓갈 할머니’ 류양선 씨.

    서울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젓갈가게를 운영하며 번 돈으로 평생 어려운 사람을 도와온 류양선(81) 씨도 나눔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다. 류씨를 만난 곳은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 10층. 오른쪽 어깨 인대가 파열돼 두 차례 수술을 받은 그는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보호기구로 감싼 모습이었다. 회복이 덜 된 손가락과 손목이 덜덜 떨렸다. 류씨는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3월 18일 제주 서귀포교육청에 한자교재 1000권을 기증했다.

    “내가 한글도 제대로 못 배웠으니께, 돈 벌어 애기들 공부시킬라고. 어린 학생들이 한자를 열심히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기부했지.”

    기부 얘기를 시작하자 류씨 눈에 기운이 가득 찼다. 그는 193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사를 지었다. 일손이 모자라 공부는 꿈도 못 꿨다. 한글을 익힐 무렵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는 아버지 말에 학교를 그만뒀다.

    “시골에서 누가 딸한테 공부를 갈쳐. 논밭에서 일하지, 바느질하지, 길쌈하지, 이삭 줍지, 밤에는 베 짜지….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녀. 등유로 불 켜고 밤에 공부하려 하면 아버지가 기름 아깝다고 불을 꺼버렸어. 책은 거름통에 던져버렸지. 주워서 다시 공부하려니 냄새가 나서 그게 돼?”

    배우지 못한 아쉬움은 오래갔다. 어른이 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아픔을 넘겨주지 말자’고 마음먹은 이유다. 류씨는 1983년 전남 완도의 한 초등학교에 책을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돈이 생기는 대로 보육원, 도서관, 농어촌학교에 책과 신문 등을 기부했다. 98년에는 충남 서산에 있는 ‘고향 대학’ 한서대에 2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증하기도 했다. 지난 31년간 그가 기부한 액수는 언론에 알려진 것만 24억 원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정확한 액수를 모른다고 했다. “내 손을 떠나면 그만이다. 그거 뭐라고 적어놓나”라는 것이다.

    그는 2012년 7월 국민추천포상 수상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데 대해서도 “감사패, 훈장 같은 건 다 ‘채찍질’이다. 더 많이 기부하라고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상금, 장려금도 전부 다 도로 기부했다고 한다.

    류씨를 기쁘게 하는 건 세상의 칭찬이 아니라, 자신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전하는 작은 감사 인사다. 그는 “어떤 젊은이가 ‘할머니 덕분에 공부해서 은행에 취직했다’며 찾아왔을 때, 한 초등학생이 내가 기증한 책 보고 전교에서 1등 했다고 편지를 보내줬을 때 참 좋았다”며 “남을 위해 쓰는 돈은 나를 진짜 부자로 만든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더 나눠야겠구나 생각한다”고 했다.

    “기부할 때만큼은 지구가 다 내 거여. 내 것 같어.”

    여전히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젓갈을 팔고 있는 류씨가 한 말이다.

    최정선 씨

    어려울 때 받은 사랑 계속 베풀고 싶어

    “세상 다 가진 기쁨 기부하면서 느꼈죠”

    동국대에 기부금을 전달한 최정선 씨(오른쪽).

    3월 6일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5000만 원을 기부한 최정선(53) 씨는 “어린 시절 내가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싶어 장학금을 냈다”고 밝혔다. 그는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라면 2개에 밀가루를 풀어 여섯 식구가 세끼를 해결했다. 이마저 떨어지면 먹을거리가 아예 없었다. 친척들이 준 쌀로 밥하고 이웃이 나눠준 반찬을 먹었다.”

    최씨의 말이다. 이토록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건 담임교사가 그를 육성회장 장학금 수혜자로 추천한 덕분이었다. 최씨는 “당시엔 장학금을 받는 게 장관상을 받는 것보다 더 좋았다. 나도 크면 그분처럼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생업에 뛰어든 그는 이후 꾸준히 장애인단체를 후원하는 등 작은 기부를 실천했다. 그리고 이번에 비로소 어린 시절 꿈을 이뤘다. 최씨는 “2011년 뒤늦게 방송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진학했다. 주위를 보니 학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동기가 많더라”며 “아직 내가 경제적으로 크게 여유로운 건 아니지만 최소한 밥을 굶지는 않으니 내가 가진 것을 나누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평생 모은 5000만 원을 기부한 느낌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기분은 직접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올해부터 방송대에도 장학금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죽기 전 모든 재산을 모아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싶다”는 또 다른 꿈도 털어놓았다.

    임주원 씨

    희망의 펜 저개발국 보내기 운동

    “세상 다 가진 기쁨 기부하면서 느꼈죠”

    청년 기부자 ‘호펜지기’ 임주원 씨.

    돈 대신 참신한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기부를 실천하는 청년 기부자도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에 다니는 임주원(21) 씨는 2009년부터 우리나라에서 버려지는 중고 학용품을 모아 저개발국에 보내는 운동을 해왔다. 2012년 한 해 동안만 17개국 35개 지역에 870.5㎏ 상당의 학용품을 기부했다. 3월 27일 서울 고려대 캠퍼스에서 만난 임씨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호펜(Hopen)지기’라고 소개했다. ‘호펜’은 ‘hope’와 ‘pen’의 합성어로, 희망을 주는 펜이라는 뜻이다.

    그는 호펜 인터넷 블로그(blog.naver.com/hopenproject)를 통해 중고 혹은 새 학용품을 기부받는다. 이후 상태를 점검하는 이른바 ‘건강검진’을 거쳐 추린 학용품만 해외봉사단체를 통해 저개발국에 전달한다.

    이 운동을 시작할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임씨는 ‘히말라야 도서관’이라는 책을 읽고 기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책 속에는 히말라야의 한 학교가 묘사돼 있었는데, 험난한 등굣길,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수십 명이 모여 공부하는 교실, 책이 없는 도서관 등 열악한 환경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펜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런 것들을 그들과 나눠야겠다고 생각하고 운동을 시작한 거죠.”

    임씨는 현재 ‘2014년 상반기 기부’를 진행 중이다. 경기, 충남 등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호펜지기’ 청소년들이 그를 돕고 있다. 임씨는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할 때는 혼자 많은 일을 했다. 이제는 뜻 맞는 친구가 많아져 좋다”고 했다.

    이 운동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직접 ‘건강검진’한 필통을 몽골 친구가 들고 있는 사진을 봤을 때”라고 말하는 임씨. 그는 “내가 시간과 공을 들여 한 기부가 지구 반대편 학생을 웃게 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며 나눔의 기쁨을 이야기했다.

    故 황금자 씨

    위안부 상처와 한…모든 것 나누고 떠나

    3월 13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 강서구청에서는 ‘고(故) 황금자 님 장학기금 기탁식’이 열렸다. 강서구청 김정환 장애인 복지팀장은 1월 26일 별세한 위안부 피해자 황금자 씨의 유언에 따라 유산 6700만 원을 장학기금으로 전달했다. 생전에 강서구장학회에 1억 원을 기부한 황씨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눴다.

    3월 25일 강서구청에서 만난 김 팀장은 황씨를 떠올리며 “2002년 처음 만났을 때 ‘나중에 나 죽으면 화장하지 말아달라’고 하셨다. 뜨거운 곳에 들어가는 게 싫다고 말씀하시는데, 할머니의 삶 자체가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황씨는 생전에 ‘일본군 위안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어린 시절 겪은 고통의 트라우마가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다. 교복 입은 학생이 줄지어 가는 걸 보고 제복 입은 일본군이 떠올라 ‘학생들이 나를 성폭행하려고 줄을 서 있다’며 구청에 민원을 넣은 적도 있다. 그런 그가 기부를 처음 생각한 때는 2004년이다.

    김 팀장에 따르면 그해 황씨는 폐지를 모아 저축한 돈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위로금 등을 합쳐 4000만~5000만 원이 된다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김 팀장에게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했다.

    “제가 ‘어렵게 사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기부하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으시더군요. 그저 ‘세상이 무섭다’고만 하셨죠.”

    그러다 2006년 황씨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김 팀장이 부랴부랴 서울 용산 삼각지성당에서 운영하는 묘원에 장지를 마련했다. 황씨는 꽃향기가 풍기는 봄날, 묘지 앞에서 한마디를 툭 던졌다고 한다.

    “나, 네 말대로 할란다.”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힌 것이다. 황씨는 2006년 말 첫 장학금 4000만 원을 내놨고, 2008년 3000만 원을 더 기부했다. 2010년까지 또 한 번 3000만 원을 기부한 뒤 황씨는 “속이 다 후련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회에서 받은 상처가 깊지만 사람들의 도움 덕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기왕 살다 가는 것, 좋은 일을 하다 가겠다고 결심하니 마음이 편하다”고 한 것이다. 이후 그의 유언에 따라 남은 재산마저 모두 장학재단에 기부했다.

    김 팀장은 “황 할머니가 후손에게 나눔을 실천한 좋은 분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또한 이 장학금이 역사도 되새기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서구장학회는 황씨 뜻을 기리는 장학기금을 모금할 계획이다.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

    재산 대물림 않고 미래 지도자 키우기

    “세상 다 가진 기쁨 기부하면서 느꼈죠”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에 515억 원을 기부한 정문술(76) 전 미래산업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통한다. 그는 2001년 KAIST에 “바이오와 정보기술을 융합한 학문 분야를 개척해달라”며 300억 원을 기탁했고, 1월에는 “미래전략 분야를 개척하길 바란다”며 또 한 번 215억 원을 냈다. 이광형(61) KAIST 미래전략대학원장은 “정문술 전 회장은 자기 돈이 미래 지도자를 키우는 데 쓰이기를 바랄 뿐,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심지어 2001년 기부 후 오랫동안 학교를 방문하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정 전 회장은 1990년 반도체기업인 미래산업을 창업한 인물. 이후 지난한 실패 끝에 국내 최초로 미국 나스닥시장에 주식을 상장하며 성공을 거뒀지만, 2001년 회사를 떠나며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넘겼고, 사재마저 KAIST에 기부했다.

    KAIST는 그의 기부금으로 교내에 ‘정문술 빌딩’을 짓고 우리나라 최초의 융합학과 ‘바이오 및 뇌공학과’를 개설했다. 이후 건물 기공식과 준공식, 2007년 정 전 회장의 명예박사 수여식 등을 위해 연이어 빌딩 방문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깜짝 놀랄 만한 연구업적이 나오면 가겠다”고 고사했다.

    그가 처음 정문술 빌딩을 찾은 것은 2009년으로,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말초조직의 기능적 혈액 관류 측정 기술’을 개발했을 때다. 이 대학원장은 “그날 정 전 회장이 귀갓길에 기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건물 곳곳 연구실에서 꿀벌이 일하듯, 국민을 먹여 살릴 기술을 열심히 개발하는 걸 보니 보람이 있습니다. 그동안 아무 말도 안 하던 아내가 처음으로 저를 칭찬해줬습니다’고 하더라”며 “자기 재산을 대물림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한 모범 사례”라고 밝혔다.

    풍족해서 내놓는 것이 아니라 나누기 때문에 풍족한 사람들. 이들은 인터뷰를 하면서 “당연한 것이니 기부를 했다”며 쑥스러운 듯 웃기도 하고 “어린 시절 경험이 나를 행동하게 했다”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어린 학생부터 평생을 힘겹게 살다 고인이 된 분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각기 다른 위치에서 기부했지만 얼굴에 물든 미소는 똑같다. 그들은 이웃과 나눌 때 “온 세상이 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 ‘기부자들’이 바로 우리 옆에서 험한 세상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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