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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재의 중국 속 북한

“장성택 설쳐대는 꼴 北 혁명 혈통이 고까워했다”

중국 내 소식통, 파워 엘리트와 불화설 제기… 김경희와 수년 전 이혼 소문도 파다

“장성택 설쳐대는 꼴 北 혁명 혈통이 고까워했다”

“장성택 설쳐대는 꼴 北 혁명 혈통이 고까워했다”

2012년 8월 14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나선 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 공동개발 및 공동관리를 위한 북·중 공동지도위원회 회의’. 장성택 전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과 천더밍 중국 상무부장은 한 해 전 6월 열린 2차 회의에 이어 다시 만났다.

지난해 말 세계를 놀라게 한 장성택 전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숙청과 처형 소식은 2013년 3월까지 3년여 동안 중국 베이징 특파원 생활을 한 필자에겐 더욱 남다르게 다가왔다. 장성택과 그의 부인 김경희에 대해 취재하던 스토리가 하나둘 떠올랐다.

지난해 10월 ‘주간동아’ 909호 기고를 통해 필자는 장성택 권력이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 집권 초기에 비해 그다지 막강하지 않다고 전한 바 있다. 조직과 군, 자금 등 핵심에서 벗어나 행정만 담당할 정도로 축소됐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가 누리던 권력이 서서히 약화되고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12월 초 국회에서 장성택 숙청 소식이 처음 나왔을 무렵 필자도 다른 루트를 통해 관련 소식을 접했다.

“백두 혈통 아닌 주제에…”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가 처형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과거 그랬듯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숙청되는 선에서 정리될 것으로만 생각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김정은은 자기 고모부에게 이처럼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을까. 북한이 이유로 내건 국가전복, 즉 쿠데타 모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필자의 개인적 판단이다. 장성택 처형과 관련해 대외적 명분을 얻으려고 지어낸 혐의에 가깝다고 본다는 뜻이다.

필자의 중국 내 취재원은 처형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장성택 세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고, 그들이 너무 설치는 것이 북한 파워 엘리트 그룹의 눈 밖에 났다.” 취재원은 그러면서 장성택 처형을 이영호 전 북한인민군 총참모장 숙청과 비교했다.



이영호는 고(故)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운구차 8인방 가운데 1명으로, 이후 김정은 군부 핵심 실세로 떠올랐다 2012년 7월 숙청됐다. 보수 강경파를 대표하는 이영호는 대외개방과 경제개발을 중시하는 장성택 중심의 실리파 라인과 갈등이 잦았다. 특히 부인 이설주 대동과 모란봉 악단 공연 등 김정은의 파격 행보에 강력하게 반발했던 것이 그의 숙청을 앞당겼다. 당시 숙청 이유로 북한 당국은 이영호가 100만 달러를 집에 숨겨두는 등 개인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숙청 이후 장성택처럼 처형되지는 않았다. 그는 항일빨치산 ‘혁명가’ 2세대 혈통이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크게 두 가지 세력이 존재한다. 김일성 왕조 혈통인 백두 혈통, 그리고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투쟁을 펼친 이들의 혁명 혈통이다. 혁명 혈통인 이영호와 달리 엄밀히 말해 장성택은 두 세력 어느 쪽도 아니다. 게다가 김 전 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 조선노동당 비서와도 수년 전 이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성택 개인으로서는 기댈 언덕이 사라진 셈이다. 하지만 ‘장성택 사람들’은 이미 북한 사회 저변으로 뻗어나가 세력을 형성했다. 특히 김정은 체제의 친(親)경제 행보가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이것이 백두 혈통과 항일혁명 혈통 세력의 눈 밖에 난 것이다. 여기까지가 대략 장성택 처형에 대한 중국 측 인사들의 시각이다.

어린 김정은의 ‘섭정왕’으로 묘사

“장성택 설쳐대는 꼴 北 혁명 혈통이 고까워했다”

2012년 8월 17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면담한 장성택 전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처형 1년여 전인 2012년 8월 중순, 장성택은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찾았다. 김정은 체제 북한의 첫 최고위급 방중이란 점에서 전 세계가 그를 주시했다. 각국 언론은 그를 ‘북한 2인자’ ‘실세’라고도 부르며 방중 일정을 전했다. 일부 언론은 장성택을 ‘어린 김정은의 섭정왕’ ‘후견인’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그의 방중 행보를 취재하던 필자는 이전 김정일 방중의 여러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김정일 방중은 2010년과 2011년 5, 8월 모두 4차례 이뤄졌다. 김정일이 2년 연속 8월에 중국을 찾았던 것처럼 장성택도 8월에 중국을 찾았던 것이다. 장성택 방중의 정점은 8월 17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의 면담이었다. 흡사 북·중 정상회담이나 다름없는 모습, 외교 전면에 나설 수 없는 김정은을 대신하는 듯한 행보였다. 자신의 후견인, 섭정왕으로까지 불리는 장성택이 중국 지도부를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김정은은 무엇을 느꼈을까. 당시 한 베이징 외교가 인사가 사석에서 필자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장성택을 섭정왕이라 부르는 것은 김정은에게 위험하니까 손 좀 보라고 부추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2012년 8월 13일 저녁 베이징에 도착한 장성택 대표단은 다음 날 첫 공식일정으로 베이징 국빈관 댜오위타이에서 천더밍 상무부장을 필두로 한 중국 대표단과 만났다. 회의 공식명칭은 ‘나선 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 공동개발 및 공동관리를 위한 북·중 공동지도위원회 회의’. 장성택과 천더밍은 한 해 전 6월 황금평과 나선(나진·선봉)지구에서 열린 2차 회의에서 만난 바 있다(‘주간동아’ 922호 참조).

베이징 회의에서 북·중 양측은 ‘정부가 인도하고 기업을 위주로 한다’는 개발 원칙을 재확인했다. 나선과 황금평-위화도 2개 경제지구를 북·중 무역 시범구역, 나아가 세계 각국이 참여할 수 있는 경제협력 플랫폼으로 만들자는 계획에도 합의했다. 중국 상무부는 “2개 경제지구 개발협력이 이미 뚜렷한 성과를 이뤘고 실질적인 개발 단계에 들어섰다”는 공식 견해를 내놨다.

회의가 끝난 후 장성택은 지린성 성도 창춘과 랴오닝성 성도 선양을 잇달아 방문해 각 성정부 지도부와 회견 및 만찬을 이어갔다. 지린성과는 나선지구 개발협력을, 랴오닝성과는 황금평-위화도 개발협력을 각각 논의했다. 지방 일정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복귀한 장성택은 8월 17일 후진타오 주석, 원자바오 총리를 개별 면담했다.

중국 지도부와 만남에서 장성택은 ‘신의주 특구 개발 계획’을 설명했다. 신의주 특구 사업은 2002년 처음 추진됐다. 김정일은 상하이를 방문한 다음해인 2002년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지정해 홍콩처럼 만들겠다는 구상을 공식화했다. 신의주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으로 중국인 부호였던 양빈 어우야그룹 회장을 앉히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은 자신들과 합의 없이 추진한 신의주 특구에 대해 못마땅해했고, 결국 양빈을 탈세 등 혐의로 구속했다. 김정일이 꿈꾸던 ‘북한판 홍콩 신의주’는 실패로 끝났다.

김정은은 아버지가 실패한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10여 년 만이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중국 정부의 사전 동의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장성택은 방중 기간 신의주 특구 개발 계획을 중국 측에 설명한 것이다. 중국은 동의 뜻을 피력하면서도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중국 국가 재정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소극적 동의였던 셈이다.

현재 북한은 홍콩 투자기업 따종화(大中華) 국제그룹과 일정 지분을 나눠 합영회사를 공동 설립해 신의주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월쯤 신의주 특구 개발 착공식을 화려하게 열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하지만 친경제파인 장성택 처형을 지켜본 국제사회가 북한 기대만큼 투자할 가능성은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다시 2012년 8월로 돌아가자. 공식 일정을 마치고 평양 복귀를 앞둔 장성택 대표단은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중국 측과 막바지 협상을 벌였다. 필자는 당시 협상에 참여한 북측 인사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협상은 자정을 넘어서까지 진행됐지만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견은 수해지원과 식량지원 등 인도적 지원 분야에서 나타났다. 2012년 당시 북한은 가뭄과 홍수가 겹쳐 식량난이 심각했다. 북한은 중국 측에 식량지원을 부탁했지만, 중국 측이 내놓은 지원 규모는 북한 기대에 턱없이 못 미쳤다.

늦은 밤까지 밀고 당기기가 계속됐지만 중국의 양보 폭은 크지 않았다. 인도적 지원 외 북·중 경제협력에서도 기대만큼 성과는 없었다. 장성택이 귀환한 직후 북한 내부로부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한 방중’이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장성택 처형과 관련해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은 부인 김경희와 장성택 측근 박봉주 내각 총리다. 필자는 두 인물과 관련한 기사를 장성택 방중 석 달 전인 2012년 5월 중순 다룬 적이 있다. ‘북한이 2012년 4월 제4차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경공업부장이던 김경희를 비서로, 부부장이던 박봉주를 부장으로 승진 임명한 것으로 관측된다’는 보도였다. 이 내용은 당시 북한 고위급 인사로부터 확인한 것이었다.

김경희 건강 상태 최대 관심사

조선노동당 경공업부는 인민이 먹고 입는 생활경제를 총괄하는 곳이다. 장성택 라인인 박봉주는 2002년 7·1 경제조치를 통해 시장경제를 주장하면서 북한 경제개혁의 신호탄을 터뜨렸던 인물이다. 그 때문에 당시 인사 조치는 경공업 분야에 자본주의적 요소를 과감히 도입해 주민 생활을 개선하겠다는 김정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됐다. 박봉주는 이듬해 4월 내각 총리로 승진했다. 지난해 말 박봉주는 장성택 숙청 당일 조선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에 대해 비판 토론을 하며 눈물 흘리는 장면이 공개돼 주목받았다.

장성택과 김경희 관계는 2006년 딸 장금송이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던 중 자살한 뒤 급속도로 냉각됐다. 김경희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알코올, 마약 중독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필자의 취재원이 전했다. 급기야 장성택과 김경희는 갈라섰고, 장성택 처형 이후 사망설이 나오기까지 했던 김경희는 현재 건강이 위독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장성택 방중 직후인 2012년 9월과 10월 김경희의 건강과 관련한 기사를 다룬 적이 있다. ‘2012년 8월 중순 갑자기 병세가 위독해져 싱가포르 병원에 입원했다 9월 초 치료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기사가 나가자 주중 한국대사관과 필자에게 문의전화가 이어졌다. 대사관 관계자는 필자에게 연락해 “그런 정황이 전혀 없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물었다. 오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1월 “김경희가 2012년 하반기 싱가포르로 급히 날아가 치료받은 것은 사실”이라는 정보당국 관계자의 발언이 언론을 탔다. 필자는 당시 김경희의 병명과 간병인 등에 대한 정보도 확보했다. 검진 결과 김경희는 간 질환 등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 한때 장성택이 싱가포르로 날아가는 일이 검토됐을 만큼 김경희 병세는 위중했다.

김경희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3년 9월 9일 조선인민내무군 협주단 공연 관람이 마지막이었다. 지난해 12월 16일 항일 빨치산 혁명 혈통인 김국태 조선노동당 검열위원장 장례식, 다음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 2주기 행사 등 주요 행사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경희의 건강 상태가 북한 권부를 주목하는 이들 사이에서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이유였다.



주간동아 2014.01.27 923호 (p54~56)

  • 김승재 YTN 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sjkim@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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