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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나치 상처와 함께 돌아온 걸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약탈미술품 대량 발견…원 소유주 후손들 본격 반환 움직임

나치 상처와 함께 돌아온 걸작

‘1930년대 후반 나치가 미술관과 유대인으로부터 빼앗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미술품 1280점이 뮌헨에 사는 한 81세 노인의 아파트에서 대거 발견됐고, 검찰이 이를 압수했으나 지금까지 거의 2년 동안 비밀에 부쳐왔다.’

2013년 11월 3일 독일 시사주간지 ‘포쿠스’가 특종 보도한 내용이다. 노인의 이름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를 딴 일명 ‘구를리트 사건’은 독일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잃어버린 걸작들의 생환 소식은 반가운 일이나, 독일인의 마음은 결코 밝지 않았다. 시간만 질질 끈 독일 당국에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감추고 싶은 나치 범죄의 상처를 또다시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견한 미술품은 유화, 수채화, 그래픽, 스케치 작품 등 장르를 망라한다. 감정가 총액은 430억 원대로 평가되지만, 최대 1조4000억 원까지 추정하는 전문가도 있다. 작가 면모도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다. 마르크 샤갈, 파블로 피카소,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세잔, 에드가르 드가, 알브레히트 뒤러, 외젠 들라크루아,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귀스타브 쿠르베, 아우구스트 마케, 프란츠 마르크, 오귀스트 로댕, 에밀 놀데, 막스 리베르만, 오토 딕스, 에른스트 키르히너, 막스 베크만, 오스카어 코코슈카, 칼 슈피츠벡 등 16~20세기 유명 화가들이다. 그림 대부분은 방 안 여러 수납장에 나눠 보관돼 있었는데, 상태는 매우 좋았다고 한다.

1280점…‘구를리트 사건’ 파문

1937년 나치는 인종주의미학에 맞지 않는 근대미술을 모두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해당 작품을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몰수했다.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야수파, 입체파(큐비즘)가 전부 ‘퇴폐미술’로 분류됐다. 38년에는 ‘퇴폐미술몰수법’을 제정해 몰수 조치를 소급, 합법화했다. 이렇게 몰수한 그림만 2만여 점. 이와는 별도로 유대인 수집가들이 국외 탈출 대가와 생활고 등의 이유로 나치에게 헐값에 팔아넘긴 그림들도 있다. 소위 ‘약탈미술품’이다. 이 그림의 가치를 잘 알던 나치는 그림을 외국에 팔아 전쟁비용을 충당하고자 했다. 이 임무를 위임받은 4명 가운데 1명이 바로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의 아버지 힐데브란트 구를리트였다.



구를리트 가문은 예술가와 예술학자를 배출해 독일 예술계에서 명망이 높았고, 힐데브란트 구를리트도 미술사학자이자 미술관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는 근대미술, 즉 ‘퇴폐미술’의 열렬한 애호가였는데, 할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약점 때문에 여러 직책에서 퇴출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나치로 들어가 수완을 발휘한 그는 미술상으로 성공했고, 나치가 몰수, 약탈한 미술품을 파는 과정에서 합법 혹은 불법으로 수많은 그림을 입수했다.

드레스덴에서 살던 힐데브란트 구를리트는 전쟁이 끝나자 자신이 소유했던 미술품이 드레스덴 폭격으로 모조리 불탔다고 보고한다. 그렇게 철저히 비밀에 부침으로써 전후 미군과 소련군으로부터 그림을 지킬 수 있었다. 1956년 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은 뮌헨으로 이사했다.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는 어머니와 살던 누이가 결혼으로 집을 떠나고 67년 어머니마저 죽자 그림 출처를 알면서 그것을 지킬 유일한 사람이 됐다.

뮌헨으로 건너간 구를리트는 이때부터 거의 50년간 오로지 집 안에서 그림만 보며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내성적이던 그는 직업도,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없이 평생 혼자 살면서 자기 존재를 감추려고 애썼다. 외부인에게 결코 문을 열어주는 법이 없어, 검찰도 열쇠수리공을 불러 문을 열었다고 한다. 집에는 TV도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었다. 세상 경험은 책에서 얻었고, 식료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가고 심장병을 치료하려고 개인병원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그가 사랑하고 교류하는 유일한 대상은 숨겨놓은 그림이었다.

구를리트는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가끔 그림을 팔았는데, 대부분 스위스에서 거래했으며, 돈은 스위스 계좌로 입금됐다. 돈이 필요하면 취리히로 가 인출하곤 했다. 2010년 9월에도 그랬다.

취리히를 떠나 뮌헨으로 향하는 고속열차에 백발노인이 타고 있었다. 기차가 독일 땅에 진입하자 독일 세관경찰들이 들어와 의례적인 검문을 시작했다. 한 경찰이 노인에게 세관에 신고할 현금이 있는지 물었다. 노인은 현금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그런데 세관경찰 가운데 1명이 노인을 알아봤다. 3시간 전쯤 그가 뮌헨에서 취리히로 가는 기차에 타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경찰은 어쩌면 이 노인이 스위스 비밀계좌에서 현금을 인출해 불법으로 반입하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수색을 벌였다. 노인 몸에서 빳빳한 500유로 지폐로 9000유로가 나왔다. 신고 대상인 1만 유로를 넘지 않아 문제는 되지 않았다. 경찰은 신분증을 검사하고 주소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검문을 끝냈다.

어쩌면 그렇게 넘어갈 수도 있었을 그날, 세관경찰의 직감은 남달랐다. 노인 주소를 조회한 결과 거주지로 등록된 곳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였다. 독일에는 의료보험, 세무서 기록, 은행 계좌조차 없었다. 노인은 오스트리아 여권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독일에선 흔적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된 것은 구를리트라는 이름이었다.

세관경찰은 그가 나치 시절 활약한 유명 미술상의 아들이란 것을 알아냈고, 검찰이 감시와 추적을 시작했다. 곧 그가 2011년 쾰른 한 미술상에게 그림 한 점을 판 사실을 확인했다. 이전에도 구를리트가 그곳에서 바실리 칸딘스키를 비롯해 그림 15점을 팔았다는 심증이 있었으나 미술상은 이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검찰은 일단 미술품 매매에 대한 탈세 및 횡령 혐의로 2011년 9월 가택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그러나 검찰도 무엇을 수색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 머뭇거리다 2012년 2월 말 가택수색을 벌였다. 결과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검찰은 사흘에 걸쳐 그림들을 전부 압수했다.

범죄 공소시효 끝나 돌려받기 막막

국가와 정치를 불신하며 아버지의 업적인 그림을 지키려고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았던 구를리트는 그림이 압수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그러나 그는 최근 시사주간지 ‘데어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내 그림을 떠나보낸 것이 어머니와 누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인생에서 그림보다 더 사랑한 것은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또 “그림은 합법적으로 내 소유며, 자진 반납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림 1280점 가운데 ‘퇴폐미술’로 미술관에서 몰수된 작품이 384점, 유대인 개인 소유였던 ‘약탈미술품’이 593점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300점은 구를리트 개인 소유임이 판명됐다. ‘약탈미술품’의 경우 유대인 생존자가 거의 없는 데다 소유권을 증명할 서류도 희박하기 때문에 원소유자를 놓고 논란이 예상된다. 현재 ‘약탈미술품’ 310여 점은 인터넷 사이트(www.lostart.de)에 공개됐고, 앞으로 계속 추가될 전망이다.

구를리트의 고독한 인생은 인간적 연민을 자아내는 면이 있다. 그러나 구를리트는 엄연히 가해자며 진정한 희생자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더 늦기 전 자손들이 소유권을 되찾기를 바라는 유대인 단체의 압력도 거세다.

바이에른 주 법무부 장관을 중심으로 나치 약탈품에 한해 공소시효를 없애는 ‘구를리트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현행법으로는 미술관들이 반환을 주장할 수도 없다. 합법적 절차로 소유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약탈미술품’은 범죄 공소시효가 끝났기 때문에 더욱 반환받기 힘들다. 결국 그림들이 구를리트 소유로 돌아갈 개연성이 높다.

현재 구를리트는 외부와 연락을 일체 끊고 있다. 구를리트 소유로 판명된 그림 300여 점도 아직 검찰에서 찾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거처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고가 그림을 다시 집으로 들이기도 힘들게 됐다. 이 복잡한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 아무도 모른다. 독일인이 져야 할 역사의 업보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주간동아 2013.12.30 919호 (p56~57)

  • 박성윤 브레멘 통신원 bijourn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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