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6

2013.12.09

“최고 존엄 모독 남한 기자 뜨거운 맛 보여줄까, 응?”

김정일 사망 언론보도에 불만 북 대사관 직원, 실명 거론하며 격앙

  • 김승재 YTN 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sjkim@ytn.co.kr

    입력2013-12-09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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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 존엄 모독 남한 기자 뜨거운 맛 보여줄까, 응?”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결식이 진행된 2011년 12월 28일 중국 지린성 조선족자치구 옌지시의 북한 류경호텔에 추모객이 들어서고 있다. 때마침 내린 눈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2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적지 않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당시 상황은 어떠했고, 사망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2011년 12월 19일 북한은 “김 위원장이 12월 17일 달리는 야전 열차 안에서 중증 급성심근경색과 심장성 쇼크가 발생해 숨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 발표 이후 권력투쟁에 따른 사망 등 여러 추측보도가 이어졌다. 이런 와중에 북한 고위급 인사가 몸을 낮춰 귓속말로 나지막하게 ‘김 위원장 사망 당시 상황’을 속삭였다. 김 위원장 사망 애도기간 필자가 만난 주중 북한대사관 관계자의 발언은 지금 돌이켜보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당시 북한 고위급 인사가 전한 ‘김정일 위원장 사망의 진상’은 이렇다. 김 위원장은 2011년 12월 15일 평양의 백화점 광복지구상업중심을 찾았다. 당시 김 위원장은 각종 식품과 공산품이 진열된 것을 보고 만족을 표시했다. “지금 당장 모든 물건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가동할 순 없지만 이렇게 밖에서 끌어들여서라도 주민에게 공급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취지였다. 이것이 김 위원장의 마지막 현지시찰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신격화 작업

    “최고 존엄 모독 남한 기자 뜨거운 맛 보여줄까, 응?”
    그리고 이틀 뒤인 12월 17일 새벽 2시 무렵 김 위원장은 돌연 잠에서 깨어나 측근 참모들을 불러들였다. 4·15, 즉 고(故) 김일성 주석의 생일 100주년을 앞둔 자신의 고민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4·15는 다가오는데 주민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고민하는 꿈을 꿨다. 평양 주민들은 문제가 없는 걸 직접 확인했는데, 이제 제일 낙후한 자강도에 가서 4·15 준비 상황을 보고 싶다.” 그러면서 그는 곧바로 자강도행을 고집했다. 결국 이른 새벽 영하 27도의 맹추위 속에서 전용열차에 올라 자강도로 향하다 열차 안에서 뇌혈전으로 사망했다.

    김 위원장 사망 이듬해인 2012년 필자는 ‘위대한 삶의 최후 1년-2011년’이라는 제목의 화보집을 입수했다. 북한이 중국어판으로 발간한 김 위원장의 마지막 1년 모습을 담은 화보집이었다. 2011년 1월부터 12월까지 매달 김 위원장의 현지 경제시찰 활동을 담았다. 화보집은 김 위원장이 북한 인민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려고 1년 내내 현지시찰을 하다 순직했음을 강조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석양을 배경으로 한 김 위원장의 전용열차를 보여준다. 김 위원장이 추운 날씨에도 전용열차를 타고 자강도 시찰을 강행하다 열차에서 숨졌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11년 12월 22일자에서 “김 위원장이 조용히 조국의 북변(北邊)으로 향한 열차에 몸을 실었다”고 전했다. ‘북변’은 북쪽 변경 지역을 뜻하는 말로 주로 함경도와 양강도, 자강도를 지칭한다. 자강도로 향했다는 필자 취재원의 발언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북한이 김 위원장의 사망을 신격화했을 개연성도 있다. 김일성 주석의 생일 100주년을 앞둔 지도자로서 고민을 거듭하다 이른 새벽 현지 지도를 가는 길에 숨졌다는 건 김 위원장이 마지막 순간까지 민생을 챙겼다는 일종의 우상화, 신격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2011년 12월 27일 오전 중국 베이징 하늘은 파랗고 깨끗했다. 하지만 베이징 특유의 칼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리털 파카에 두 손을 찔러 넣은 필자는 주중 북한대사관 근처 한 카페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북한대사관 관계자 A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 위원장 사망 정국 속에서 그와의 만남은 필자에게 각별히 중요했다.

    독일제 북한대사관 차량에서 내린 A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추운 날씨를 소재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주문한 뒤 A는 다짜고짜 역정부터 냈다. 북한의 최고 존엄인 김 위원장의 사망을 대하는 우리 정부의 반응과 언론 보도 때문이었다. 특히 북한이 남한 사업가나 단체에게 무리하게 조문이나 조의금을 요구했다는 기사에 분노를 터뜨렸다. A는 북한 방침이라며 미리 준비해온 원고를 읽어내려 갔다. 당시 필자는 이를 전부 메모했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언론들이 (중략) 우리 인민과 남측 진보적 인사들, 북측과 사업하는 중국 사업가들의 순결한 마음을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묘사한 것은 장군님의 영생을 기원하는 뜨거운 조문 열의에 찬물을 끼얹는 비열하고 용납 못 할 반인륜적 행위이며, 초보적인 예의와 인륜도덕도 지킬 줄 모르는 자들이 만들어낸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민은 아무리 천만금이 귀중하고 필요하다고 해도 최고 존엄을 훼손하면서까지 구걸질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천만금을 공짜로 준다고 해도 우리 최고 존엄과 우리 인민의 깨끗하고 순결한 충성심을 건드리는 자들에 대해서는 한 치 양보와 타협도 하지 않으며, 추호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분향소 취재 우리 정부에서 “NO!”

    “최고 존엄 모독 남한 기자 뜨거운 맛 보여줄까, 응?”

    지재룡 2011년 당시 주중 북한대사.

    A는 “국상기간에 이럴 수가 있나”라며 기사를 작성한 모 언론사 중국 특파원 2명의 실명을 거론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최고 존엄을 모독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정말 무슨 일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우리가 이 중국땅에서 못 할 거 같은가. 한번 뜨거운 맛을 보여줄까”라고 격앙된 반응도 보였다. 필자는 A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기자들도 어디선가 얘기를 들었으니까 쓰는 건데, 왜 기자들을 비난하나. 의도적으로 지어낸 얘기가 아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다. 내가 그 뜻을 충분히 잘 전달하겠다. 그 기자들은 나도 잘 아는 이들이다. 제발 그만하자. 애도기간에 이러면 되겠나.”

    이후 필자는 곧바로 해당 기자를 찾아가 관련 내용을 전달하고 당분간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상가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는 것처럼 행여 불상사가 생기진 않을지 걱정스러웠다.다행히 이후 별문제는 없었다. 김 위원장 사망 당시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 인사들은 이처럼 날카로운 반응을 종종 보였다.

    중국 정부는 김 위원장 사망 소식을 북한 당국 발표 이전에 알았을까. 당시 많은 언론은 중국이 사전에 알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그와 동시에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 역시 사망 사실을 당국 발표 이전에 통보받았을 것으로 관측했다. 지 대사가 사망 당일인 12월 17일 북한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A는 필자에게 지 대사가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 대사가 12월 17일 북한에 간 것은 무엇 때문인가. A는 “중국이 선물로 증정한 ‘김정숙 밀랍상’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김정숙은 김 위원장의 생모다.

    A와 헤어진 뒤 사실 관계를 확인해보니 이 말에는 신빙성이 있었다. 중국 매체들은 12월 16일 베이징에서 김정숙 밀랍상을 북한에 보내기 위한 행사가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행사에는 평양에서 온 인사들과 주중 북한대사관 관계자 등 모두 200여 명이 참석했다. 밀랍상을 제작한 곳은 ‘중국 위인 밀랍상관’으로, 주로 중국 위인들의 밀랍상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관이다. 이곳에서 당시까지 북한에 선물한 밀랍상은 1996년 김일성 밀랍상과 2011년 김정숙 밀랍상 2개뿐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당시 김정숙 밀랍상 기증은 북·중 관계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베이징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까지 성대하게 열렸던 것이다. 행사 다음 날인 12월 17일 이 밀랍상을 김 위원장에게 직접 전달하려고 지 대사가 평양으로 향했다는 A의 말은 그래서 믿을 만했다. A는 그러면서 “중국 정부도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을 당국 발표 전 미리 통보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필자는 A에게 주중 북한대사관에 마련된 분향소 내부 취재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던 A는 필자가 계속 요구하자 한번 고민해보겠다고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그러고는 “우리가 허용한다 해도 남측에서 허용하겠는가. 안 해줄 것 같은데…”라고 덧붙였다. 필자는 “세계적인 뉴스인데 설마 이런 취재를 막겠나.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취재 가면 안내나 잘해달라”고 답했다. 이후 A는 YTN의 북한대사관 내 분향소 취재를 돕겠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결국 A의 말이 옳았다. 이런 취재의 경우 통상 우리 정부로부터 사전허락을 받고 추진해야 하는데, 당시 정부가 이를 불허한 것이다. 주중 한국대사관을 통해 북한대사관 내 분향소 취재에 대해 문의한 결과 우리 정부가 내린 결정은 ‘NO’. 이를 전달하자 A는 그것 보라면서도 불쾌한 감정을 내비쳤다.

    지린성 투먼시 고강도 통제 왜?

    “최고 존엄 모독 남한 기자 뜨거운 맛 보여줄까, 응?”

    2011년 11월 중국 측이 제작해 북한에 기증한 김정숙 밀랍상.

    아직까지도 이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차피 분향소 내부 분위기는 한국 언론이 못 가더라도 외신을 통해 다 보도될 상황이었다. 남한 기자의 분향소 취재가 북한 의도대로 북한을 홍보하는 데 일조한다고 볼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외신을 인용한 보도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분향소 취재를 과연 이적 행위로 볼 수 있을까. 기자로서는 의문이 많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김 전 위원장 애도기간에 조선족 기업가 여러 명이 평양으로 조문을 다녀왔다. 모두 대북 사업을 하는 이들이었다. 한 기업가가 비보도 조건으로 조문 경험담을 전해줬다. 단둥 철교를 건너 신의주로 들어가는데 국경 지역 북한 군인들이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가슴 찢어지는 슬픔이 닥친 상황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들어올 수 없다.” 결국 함께 갔던 일행 모두 억지로 눈물을 짜내야 했다.

    이들은 평양에서 조문할 당시 김정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난 경험담도 전했다. 김정은은 이들 기업가들 손을 일일이 잡으며 고마움과 관심을 표시했다. 현존하는 유일한 3대 권력 세습의 주인공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이들은 깊이 감동받은 모습이었다.

    한편 김 위원장 사망과 관련해 중국에서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인 지역은 지린성 투먼시였다. 투먼시 당국은 애도기간 내내 언론 취재를 철저히 통제했다. 아예 시 전역에서 사진과 동영상 촬영을 금지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길목마다 차량과 탑승객에 대한 검문검색을 실시했다. 투먼 공안당국은 특히 한국인을 면밀히 감시했다. 투먼이 이처럼 고강도 통제를 실시한 이유는 북한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자 탈북자 수용시설이 있다는 점, 중국 정부가 당시 최초로 북한 인력을 공식 수입하기로 결정한 지역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 위원장 사망 이후 석 달여 만에 필자는 투먼을 찾아 잠입 취재를 시작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은 다음 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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