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6

2013.12.09

과학 한국 심장에서 창조경제 허브로 간다

대덕특구 40년 경제 버팀목 구실… 미래 기술 선도 또 다른 과제 떠안아

  •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대덕연구단지 담당기자 enhanced@donga.com

    입력2013-12-09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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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한국 심장에서 창조경제 허브로 간다

    하늘에서 본 대전 유성구 대덕연구개발특구 전경. 1973년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이곳은 40년이 흐른 지금 ‘과학기술의 메카’이자 ‘과학기술 혁신 클러스터’로 변모했다.

    중화학의 기틀을 다졌고, 첨단 기계·전자기술도 일궈냈다. 한국 과학기술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인 대덕연구단지는 이제 어디를 바라봐야 할까.

    2013년 11월 29일 오전 대덕연구단지 중심에 자리 잡은 ‘국립중앙과학관’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1973년 11월 30일 정부가 야산과 구릉지, 과수원 몇 개가 전부였던 대전 유성구(옛 충남 대덕군)를 ‘연구학원도시’로 지정한 지 40년이 지나 개최한 불혹의 생일잔치였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 야산에선 우주선을 만들고, 구릉지 아래로는 자기부상열차가 오간다. 상전벽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정부도 과학기술의 산업화를 독려하려고 2011년 대덕연구단지 및 그 주변 지역을 대덕연구개발특구(대덕특구)로 지정했다.

    로봇이 춤을 추는 황금밭

    대덕연구단지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기틀이자 산실이다. 한국 산업 이면에는 대덕연구단지의 실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곳에서 개발한 중화학기술로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의 활로를 열었다. 기계, 우주항공기술 연구를 이곳에서 시작했고, 자동차와 중공업을 일으켰다. 독자적인 인공위성을 개발해 우주발사체 연구에 뛰어들 수 있었으며, 한국형 원자력발전소 개발도 일궜다. 대덕연구단지에서 반도체, 통신 분야의 원천기술을 개발한 결과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한국의 근대화, 선진화의 뒤편엔 대덕연구단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은 거의 없다.

    정부가 최근 강조하는 ‘창조경제’의 청사진도 대덕연구단지의 발전 모습을 엿본 듯하다. 정부가 “연구단지가 자리 잡은 대덕특구를 ‘창조경제의 전진기지’로 삼겠다”고 하는 건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지난 실적에 대한 엄정한 평가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월 29일 행사에서 “핵심 기술의 연구개발도 중요하지만 응용기술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중소·중견기업 지원에 힘을 쏟아달라”고 주문했다.



    대덕연구단지의 맏형은 KAIST(한국과학기술원)다. KAIST는 학생을 가르치는 대학이면서 정부 지원금으로 유지되는 연구기관의 성격도 지닌다. 대덕연구단지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를 꼽으면 언제나 등장하는 로봇 ‘휴보’는 KAIST의 큰 자랑거리다.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 달리기를 하며, 심지어 댄서처럼 격렬하게 춤을 추기도 한다. “사람처럼 움직이니 신기하긴 한데, 이런 로봇을 만들어 어디다 쓰느냐”는 다소 날카로운 질문을 듣기도 한다. 일견 타당하지만 전후사정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휴보 1대 가격은 5억 원을 호가한다. 그런데도 전 세계 연구기관이 앞다퉈 사간다. 카네기멜론대, 버지니아공대 등 미국 8개 대학, 싱가포르의 IT 전문 국책연구기관인 정보통신연구소(I²R) 등에서 휴보를 사갔다. 심지어 세계적인 IT 기업 구글에서도 휴보를 2대 구매해 갔다. 휴보를 이용해 미래형 로봇 서비스를 연구하겠다는 게 이들의 구상이다. 우리나라 로봇이 세계적인 IT 기업의 서비스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휴보의 구동 소프트웨어와 제어 기술을 이용한 정밀 추적 장치는 한국천문연구원에서 만든 ‘우주감시 시스템’에 접목돼 우리나라 하늘을 지킨다. 대덕연구단지에서 개발한 로봇 기술은 현재 세계 공학기술계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과학 한국 심장에서 창조경제 허브로 간다

    대한민국 표준시계 ‘KRISS-1’이 있는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연구실에서 한 연구원이 시계의 작동상태를 살피고 있다. 이 시계는 300만 년에 1초 오차만 허용할 정도로 정밀하다(왼쪽). 11월 29일 대전 유성구 KAIST(한국과학기술원)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로봇 ‘휴보’의 작동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국가와 민족 위해 연구하는 곳

    휴보가 대덕연구단지의 상징적인 연구 성과라면, 상업 연구 성과를 대표하는 건 역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1989년 개발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휴대전화 통신기술이다. 이 기술을 상용화한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이동통신 선진국이 됐고, 54조3923억 원이나 되는 경제적 가치도 거뒀다(2012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정부가 ETRI에 35년간 투입한 연구개발비(5조9421억 원)의 10배가 넘는 액수다.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사업의 기틀을 다진 원천기술은 상당수가 대덕연구단지에서 나왔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한국 표준형 원전’을 개발했고, 이 기술은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소의 기본 모델이자 수출형 원자로(APR-1400)의 기본 모델이 됐다. 우리나라 최초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 발사 이후 꾸준히 노력을 기울인 결과, 세계적인 수준의 독자적인 인공위성 개발 능력도 확보했다. 나로호 발사 성공으로 우리나라의 우주발사체 기술 수준은 선진국 대비 46%에서 83%로 향상됐다. 대덕연구단지의 학자들은 군사기술 역시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한국형 전차 흑표와 미사일 현무,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과 한국형 고등훈련기 T-50, 경전투기 FA-50 등의 개발사는 대덕연구단지를 빼놓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간 대덕연구단지에 투자한 원천기술 개발비용은 약 30조 원. 지난 40년간 창출된 부가가치는 300조 원을 훨씬 웃돈다. 이런 결과로 ETRI는 35년 동안 각종 연구개발로 국가 전체에 169조8095억 원의 경제적 성과를 냈다. 설성수 한남대 경제학과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의 성과는 투입 예산의 36.7배,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28.62배에 달한다. 한국천문연구원도 41~61배에 달하는 큰 경제적 효과를 일궈냈다.

    기술이 뒷받침되니 대덕연구단지에서 개발한 기술을 사업화해 거둔 매출액도 급증하고 있다. 2005년 2조6000억 원에서 2012년 10조2000억 원으로 2.9배 증가했다. 대덕연구단지 일원의 입주 기관은 1970년대 7개에서 현재 1401개로 늘어났다. 40년 사이 200배 가까이 급증한 것이다. 박사급 인력은 2003년 5005명에서 2012년 1만333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대덕연구단지의 숨은 성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력 양성이다. KAIST는 물론, 연구단지 정부출연연구기관(정부에서 설립하고 운영비를 지원하는 별도 법인·출연연)에서 실습과 함께 대학원 과정을 밟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UST) 과정도 인기다. 삼성전자의 플래시메모리 개발은 KAIST 출신이 주도했다. UST 졸업생은 수년 경력의 연구원과 같은 현장 경험을 갖고 있어 과학계에서 인기가 높다.

    그러나 40세 생일을 맞은 대덕연구단지 일각에선 운영 문제점을 꼬집기도 한다. 출연연의 운영 시스템이나 정부 주도 사업 추진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많다. 물론 대덕연구단지가 대한민국 선진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난 40년간 성과는 일단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그렇다면 과학기술 개발을 통해 국가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왔던 대덕특구는 앞으로 40년간 또 어떤 모습으로 국가 경제를 이끌어나갈 것인가.

    대덕연구단지의 구성원 가운데 일부는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이나 ‘자연의 신비’를 밝히는, 순수 학문에 대한 연구가 좀 더 강조돼야 한다고 말한다. 학자로서는 옳은 의견일 수 있지만, 국민 세금을 받는 기관 구성원으로서는 적합한 말이 아니라는 게 필자 판단이다. 정부기관은 국가를,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정부 지원으로 국민 세금을 받아 운영하는 기관, 그리고 그곳 구성원이라면 일관되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과학기술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 의무다.

    정부가 대덕연구단지에 거는 기대는 크다. ‘창조경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업화 실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취임 후 첫 방문지를 대덕특구로 잡았을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박 대통령도 대덕연구단지 40세 생일잔치 자리에서 “경제의 견인차가 돼달라”고 주문했다. 이런 정부의 주문은 얼핏 모호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일목요연하다. 출연연에서 개발한 기술을 기업에 이전하고, 기업의 창업과 사업 확장을 지원해 중소·벤처기업 활성화 기틀로 삼자는 것이다.

    문제는 대덕연구단지의 정체성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경될 수밖에 없는 세부 사업 추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앞으로 40년간 꾸준히 대한민국 과학계를 짊어지려면 연구기관이나 과학자 스스로 자기만의 ‘무게’를 확보해야 한다.

    대덕연구단지, 그리고 과학자들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모든 답은 과거에 있다. 대덕연구단지가 처음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받은 주문은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과학자들은 화학기술 개발에 주력했고, 국내 수많은 기업이 혜택을 입었다. 기업들은 이렇게 얻은 기술로 직물을 짜 옷감을 수출했으며, 외국에서 수입해온 석유를 가공해 산업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국내 산업이 성장하면서 기계·전자기술 발전이 필요했고, 대덕연구단지는 다시 이 기술의 견인차 구실을 하면서 한국이 10대 무역국, 세계적인 정보기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일조했다.

    과학 한국 심장에서 창조경제 허브로 간다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우주광학센터에서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UST) 학생들이 대구경 광학렌즈 가공 장비에 대한 교수(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자기만의 색깔과 실력 갖춰야

    출연연의 미션은 미래에도 명확하다. 한국의 기반산업, 세계경제 흐름을 내다보고 연구 개발에 임하는 것이 불변의 원칙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의 미래 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미래를 100%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그 방향은 예측할 수 있다.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환경, 수자원 확보, 에너지 기술, 해양과 심해, 우주개척 기술, 자원탐사 기술 등이다. 생활을 좀 더 아름답게 하는 기술, 미래를 더 풍요롭게 하는 기술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기본 기술과 경제체계를 완성해놓고 좀 더 나은 삶, 좀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유념할 것은 지난 40년간 경험에서 알 수 있듯 높은 경제적 가치는 기초, 원천기술에서 파생한다는 점이다. 과학자 스스로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연구가 아닌, 국가 미래를 생각한 전략적 기초 기술 확보에 나서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와는 다른 대규모의 연구 추진이 필요하고, 여타 학문과의 융합도 중요해질 것이다.

    정부가 대덕연구단지와 인근 지역(대덕특구)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창조경제’ 흐름은 지금까지 ‘대덕’의 미션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대덕연구단지는 앞으로 40년 후 80세 생일에도 지금처럼 함박 웃을 수 있는 비전과 계획을 스스로 마련해나가야 할 때다. 국가가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자기만의 색깔’과 실력을 가지고 미래 기술을 선도하는 곳, 대한민국 국민은 이런 든든한 대덕연구단지를 기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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