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1

2013.08.19

전면 금지보다 사전등록제 바람직

조세포탈 등 악의 적절히 규제 가능…관련 법률과 유기적 관계망 구축 필요

  • 김자봉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 jbkim@kif.re.kr

    입력2013-08-19 0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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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면 금지보다 사전등록제 바람직
    1982년 발생한 장영자, 이철희 어음사기 사건 직후 정부는 금융실명제 실시 계획을 발표했다. 이때는 발표에 그쳤을 뿐이고, 10여 년 후 김영삼 정부 시절인 93년 8월 12일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해 올해로 20년을 맞았다. 금융실명제를 통해 가명 또는 무기명에 의한 거래를 차단함으로써 불법자금원의 추적을 가능케 하고, 거래 투명성 및 계약관계 명확성을 확립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금융거래 활성화와 금융산업 발전의 초석이 됐다.

    전면 금지와 형사처벌 논란

    금융실명제 시행 목표는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근절, 그리고 분배 정의 실현이었으며, 이는 오늘날도 그 존재 이유가 된다. 최근 국내에서 불거진 CJ그룹의 비자금조성 사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추징금 환수 수사를 계기로 불법정치자금 수수, 비자금 조성, 조세포탈, 범죄 수익은닉 행위 등을 근절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한층 높아지고 있으며, 이들 사건에서 불법적으로 이용한 범죄형 차명거래를 근절해야 한다는 요구 또한 거세다.

    차명거래를 규제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정보 비대칭성 문제다. 차명거래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적절한 정책수단을 도출하려면 차명거래에 대한 적정 수준의 정보를 확보해야 하는데, 정보 비대칭성 문제로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다. 현행 유권해석과 사법해석은 모두 차명거래 금지를 원칙으로 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정보 비대칭성 문제 때문에 민간의 사적자치 영역에 차명거래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차명거래에는 선의와 악의가 뒤섞여 있다. 사전적으로는 이 둘의 구분이 거의 전적으로 불가능하며 사후적으로도 쉽지 않다. 선의의 차명거래도 궁극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없으면 선의와 악의를 구분 짓지 않은 정책수단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자칫 다수 소비자의 불만을 야기할 수도 있다.



    차명계좌 자체를 전면금지하고 형사상 처벌 대상으로 하자는 방안이 있는데, 이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일 차명거래 자체에 형사적 제재를 적용한다면, 이는 살인공모와 함께 동기를 대상으로 처벌받는 유이한 사례가 된다. 하지만 살인공모는 그 동기가 분명한 반면, 차명거래 자체는 선의 및 악의 여부가 불분명하다. 특정 차명거래 유형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의 경우에는 예외 유형을 정하는 기준 설정이 쉽지 않고, 예외 유형 자체를 선의로 추정함에 따라 이를 악용할 소지가 있으며, 심지어 범죄자를 보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차명거래 규제의 대상은 범죄형 차명거래다. 따라서 악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는 정책수단의 도출이 핵심 포인트다. 모두 선의라고 간주하면 그 가운데 악의가 나타나고, 모두 악의라고 하면 선의라고 항변하는 현상을 ‘러셀의 패러독스’(또는 ‘liar paradox’)라고 한다. 이와 같이 선의와 악의의 구분이 곤란한 상황에서 행정상·형사상 제재 같은 전통적 제재는 적절한 타기팅을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범죄형 차명거래를 타깃하는 정책수단을 찾으려면 제도설계(mechanism design) 이론을 응용하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 차명거래 사전등록 제도는 악의를 타깃해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인센티브 제도가 될 수 있다. 사법해석(대법원 판례 선고2008다45828)은 차명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면서도 출연인, 명의인, 금융기관 간 ‘명확한 의사의 합치’가 이뤄진 경우는 예외적으로 차명거래를 허용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차명거래 사전등록 제도는 바로 이 ‘명확한 의사의 합치’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개인도 위반 땐 처벌 대상 명시해야

    전면 금지보다 사전등록제 바람직

    탈세, 해외 비자금 조성 혐의를 받고 있는 CJ그룹의 본사 사옥.

    차명거래 사전등록 제도는 선의를 등록하고 관리하는 제도로, 특정의 차명거래 유형을 문제 삼지 않고, 등록 자체를 선의로 추정하지 않으며, 등록되지 않은 차명거래는 재산권 보호 및 피해구제 대상에서 제외한다. 등록된 차명거래가 범죄에 연루될 경우에는 가중 처벌한다. 이러한 유인체계를 통해 악의로 차명거래를 이용해 부당하게 시스템 편익을 편취할 유인을 제거한다.

    금융소득종합과세 한도 완전 폐지도 인센티브 제도로 활용할 수 있다. 다만, 등록된 차명거래는 증여의제에서 면제되도록 한다. 명의인과 출연인 중 어느 일방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해 ‘상호 연대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상법(24조, 332조) 적용도 인센티브 제도로서 활용할 수 있다. 등록 여부와 관계없이 악의의 행위 결과에 차명거래가 관련되면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의 대상이 되게 한다. 악의의 차명거래를 금융기관이 적극 알선 및 중재한 경우에도 특가법상 엄중한 처벌 대상이 되도록 한다. 비자금, 조세포탈 등의 범죄는 개인보다 기업이 주로 저지른다는 점에서 등록되지 않은 차명거래는 모두 행정적 처벌 대상으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차명거래 사전등록 제도의 효과를 높이려면 실명제법과 관련 여타 법률과의 유기적 관계망이 제대로 이뤄지는 것이 필요하다. 차명거래는 범죄행위의 종착이기보다 범죄행위의 시작이고 매개 수단일 개연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유기적 관계를 이루는 여타 법률이 차명거래를 이용한 범죄행위 처벌을 명확히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조세범처벌법에 차명거래에 연관된 사업등록자뿐 아니라 개인도 처벌 대상이 되도록 명시할 필요가 있다. 범죄수익은닉처벌법, 관세법, 특가법 등에도 출연인뿐 아니라 명의인까지 처벌 대상이 되도록 명시할 필요가 있다. 국내 법률 가운데 타인 명의 이용 금지를 최초로 정한 법은 정치자금법인데, 이러한 타인 명의 금지의 명확성은 지속적으로 유지돼야 한다.

    차명거래에는 다수의 선의도 있지만, 불법비자금 사건에서 보듯이 악의도 섞여 있다. 하지만 불법사건이 적발되지 않고서는 악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차명거래 사전등록 제도는 선의임을 드러내도록 하는 제도로, 정보 비대칭성에 의해 보이지 않던 선의와 악의를 구분하게 하는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선의는 좀 더 떳떳해지고 악의는 점차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건강한 차명거래 사전등록 제도가 확립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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