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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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 대치 ‘한반도 리스크’ 속수무책

유엔 안보리 강력한 대북 결의안 마련…北 연이은 무력시위와 협박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3-03-11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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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촉즉발 대치 ‘한반도 리스크’ 속수무책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전보장이사회.

    “며칠 아니면 몇 주일이 걸릴 것이다.”

    2월 하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대북제재 논의 진척 상황을 설명하던 정부 고위 당국자의 말이다. 3차 핵실험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놓고 미국과 중국 간 지루한 물밑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시점이다. 같은 시기 미국 워싱턴 정책결정자들의 정보지 ‘넬슨 리포트’는 “미국이 요구하는 강도 높은 결의안을 중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쏟아냈다. 한국이 안보리 의사봉을 쥔 2월 말까지 결의안이 나오지 않으면 러시아가 의장국이 되는 3월에는 진척 속도가 크게 더뎌질 테고, 결국 르완다가 의장국이 되는 4월 이후에나 의미 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강했다. ‘며칠 아니면 몇 주일’이라는 암호 같은 문장의 속뜻이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결과는 전혀 달랐다. 3월 4일 급작스레 탄력을 받기 시작한 미·중 간 논의는 8일 상상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두말할 것 없이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은 이 결의안에 베이징이 동의했다는 사실. 양국 초안 합의 소식이 전해진 3월 6일 리바오둥(李保東) 유엔주재 중국 대사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핵실험은 국제사회 뜻에 반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중국 관영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環球時報)’가 핵실험 직후 꺼내든 “이제는 북한과 다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사설 문구가 현실화한 순간이었다.

    공개된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은 크게 세 가지 골자로 이뤄졌다. 대량살상무기와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금융거래 차단을 각국에 의무화하는 조치, 역시 의심스러운 선박과 항공기의 화물을 검색할 권한을 각 나라에 부여하는 조치, 북한 측 요주의 인물의 출입국을 제한하고 관련 기관의 해외 자산을 동결하는 조치 등이다. 안보리 결의안은 유엔헌장상 강제력을 가지므로 세계 모든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닌 회원국은 이를 준수할 의무가 있다. 말뿐이던 기존 제재 결의와는 사뭇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특히 아이러니한 대목은 이들 조치가 2002년 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진 직후 부시 행정부가 추진했던 방안을 거의 고스란히 유엔 이름으로 승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의 연이은 도발과 핵실험이 강행되자 네오콘을 비난하며 백악관에 입성한 오바마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임자 정책에 날개를 달게 만든 셈. 당시에는 국제사회 비판을 면키 어려웠던 워싱턴의 일방적 행보가 이제는 국제사회 전체 의무사항이 됐다는 점이야말로 이번 결의안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 ‘세컨더리 보이콧’의 위력

    먼저 안보리가 결의한 금융제재 기본 구조는 2005년 9월 불거진 방코델타아시아(BDA) 사례를 고스란히 원용한 것에 가깝다. 당시 미 법무부가 마카오 소재 이 은행을 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목하자 이곳 계좌에 들어 있던 북한 자금 2500만 달러의 발이 묶였고, 이후 평양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든 외교 경로를 통해 ‘비명’을 질러댄 바 있다. 이번에 나온 결의안 역시 대량살상무기나 마약 거래, 위조지폐 등 북한의 불법거래로 의심되는 금융거래를 각국이 차단하도록 의무화했다는 점에서 같은 형태다. 기존 결의가 각국 조치를 ‘촉구’했다면, 이제는 모든 유엔 회원국이 이를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북한이 마주해야 할 고민은 이게 끝이 아니다. 안보리 결의안과는 별개로 각 나라가 독자적인 금융제재를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두에 선 것은 당연히 미국이고, 특히 이들은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손에 쥐고 있다는 점에서 파괴력이 크지 않을 수 없다. 3월 5일 미 하원 외교위원회는 북한 정권의 자금거래 차단을 논의하려고 청문회를 열고, BDA 사건을 주도했던 데이비드 애셔 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자문관의 증언을 들었다. 이란 등 중동 핵개발 우려 국가와의 핵기술 거래를 차단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금융제재라는 것이다.

    의회와 행정부를 막론하고 워싱턴 정가에서 논의하는 독자적 금융제재안은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안보리 결의안이 의심스러운 거래 자체만 차단한다면, 미국의 독자 제재 흐름은 이 거래에 관여한 금융기관 자체를 국적에 상관없이 추가적으로 제재하겠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이들 해외 은행이 미국 내 모든 금융기관과 거래할 수 없게 되면 이들은 기축통화인 달러화를 사실상 취급할 수 없으며 국제금융망 사용도 불가능하다. 국제금융시장에서 달러가 갖는 위상으로 볼 때 BDA처럼 파산 위기로 몰리는 셈. 세계 주요 금융기관이 북한 당국은 물론, 기업이나 개인과의 거래조차 매우 부담스러워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세컨더리 보이콧의 기대 효과다.

    안보리 제재안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물밑 협상 와중에 워싱턴이 품은 최고 수위 목표는 바로 이 세컨더리 보이콧을 유엔 이름으로 회원국 모두에 의무화하는 것이었다고 정부 당국자들은 전한다. 이렇게 되면 달러화 거래가 많지 않은 중국이나 유럽, 제3세계 국가의 소규모 은행과 북한의 국제금융 거래도 차단할 수 있기 때문. 안보리 결의안에서는 세컨더리 보이콧을 채택하지 않음에 따라 이 ‘최악 시나리오’는 피해간 셈이 됐지만, 직접 거래를 차단하는 조치에 미국 독자 제재가 결합하는 것만으로도 북한의 대외결제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특히 중국 주요 금융기관 상당수가 달러화를 취급하는 상황이다 보니 베이징으로선 미국 핑계를 대며 북한과의 금융거래를 거절할 수 있는 명분도 거머쥐었다.

    # BDA와 PSI에 유엔 깃발을

    금융제재와 함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해운제재도 맥락이 비슷하다.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관련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화물을 검색하는 조치는 역시 부시 행정부가 2000년대 초반부터 추진했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의 기본 개념을 상당 부분 차용한 것이기 때문. 당시 미국 측 구상은 주요 동맹 및 우방국과 함께 ‘세계 경찰’이 돼 의심되는 선박을 공해상에서 멈춰 세운 뒤 수색하는 것이었다. 이번 제재 결의는 그에 준해 의심스러운 화물을 유엔 이름으로 검색하게 했다. 중국, 러시아 등이 이 조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있지만 최소한 미국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워진다. 한마디로 PSI에 유엔 깃발이 펄럭이게 된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는 금융제재에서는 채택하지 않은 세컨더리 보이콧 개념마저 적용했다. 화물 검색을 거부하는 선박은 아예 다른 나라 항구에서도 입항을 거부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청진이나 함흥 등에서 출발한 배가 미국, 일본, 한국 측 정선 및 검색 명령을 거부할 경우 유엔 회원국 어느 항구에서도 정박할 수 없다. 결의안 이행에 미온적인 국가를 오갈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이들 배는 미국이나 그 동맹국에서는 운항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여러 나라를 오가는 대형 선박회사로선 북한 화물을 맡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러한 정선과 수색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할 위험이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원산을 출발한 북한 선박이 태평양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맞닥뜨리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를 의심 선박으로 지목해 검색을 요구하는 순시선과 북한 선박 사이에 우발적인 폭력 상황이 발생한다면, 특히 그 과정에서 일본 측 요원이나 순시선이 피해를 입는다면 동북아 긴장 지수는 급속히 치솟게 된다. 이 때문에 부시 행정부가 PSI를 추진하던 중반, 일각에서는 네오콘이 감춘 숨은 이유가 바로 이 우발 충돌 개연성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한 바 있다. 무력 분쟁으로 번질 경우 다시 유엔 승인을 얻어 합법적인 대북 무력제재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었다.

    # 개성공단이 염려스러운 이유

    여전히 남은 문제는 외부 압박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여 온 평양의 행동 패턴이다. 안보리 제재 결의 수위가 한층 높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조치가 북한 행동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지극히 회의적이기 때문. 2006년 1차 핵실험 이래 대량살상무기 개발 움직임이 불거질 때마다 만들어진 안보리 제재 결의안이 실제로 북한 행동을 바꾸는 데는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적이 압박할수록 더욱 공세적 태도로 맞받아쳐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평양 권력 핵심 고유의 사고방식은 방정식을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당장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제재 논의가 급물살을 타던 3월 5일 “다종화된 우리 식의 정밀 핵타격 수단으로 맞받아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전협정 백지화를 주장했다. 대표적 매파로 분류되는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직접 TV에 나와 읽어 내려간 성명이었다. 북한이 말하는 “좀 더 강력한 실제적인 2차, 3차 대응조치”가 무엇을 뜻하는지 촉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고사령부 성명은 3월 10일부터 시작되는 한미연합훈련 키리졸브를 ‘미제의 위협’이라고 지목했지만, 북한이 훈련에 참가하는 미군 측 병력이나 해군 함정 등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으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관측이다. 냉전이 붕괴한 이후 평양의 물리적 도발은 언제나 남한을 상대로 이뤄졌을 뿐, 미국 측 인명이나 자산에 대한 공격은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평택 이남 서해상에서 주로 진행하는 훈련 특성상 북측이 감행할 수 있는 도발적 군사행동 폭도 상당 부분 제한돼 있는 게 사실이다.

    성명에 등장하는 ‘정전협정 백지화’라는 표현과 안보리 결의안의 화물검색 조항에 눈길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정전협정에 규정된 것이 아니므로 이번 성명과는 관계가 없고, 따라서 정전협정이 주로 적용돼왔던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무대로 평양이 다음 도발을 전개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유엔 제재로 자신의 해운·통항 자유를 침해당했으니 남한 자유도 제한하겠다는 논리를 구사할 개연성 역시 충분해 보인다.

    이렇게 놓고 보면 북한의 다음 행보와 관련해 가장 우려할 만한 것은 개성공단과 파주를 잇는 경의선 연결통로 차단이나 사실상의 개성공단 봉쇄 시나리오다. 출퇴근을 포함해 개성공단에 체류하는 남측 인원 700여 명의 신변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경우, 남북관계는 천안함·연평도 사건 직후를 뛰어넘는 최악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위협을 과시하는 도중에는 경제적 이익이 사라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던 평양의 그간 행동 패턴도 이러한 우려를 한층 무겁게 만든다.

    # 모든 방아쇠가 한꺼번에

    핵 문제 영역에서 북측이 택할 수 있는 다음 카드로는 추가 핵실험과 함께 소형화한 핵탄두를 공개하거나 아예 미사일에 장착해 과시하는 일을 꼽을 수 있다.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이미 완성했다고 과시함으로써 안보리 결의나 미국 측 추가 제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공언하려는 수순이다. 덧붙여 다른 국가로 기술을 이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이를 카드 삼아 제재 해제와 북미 핵감축 양자협상을 주장하고 나설 공산도 커 보인다.

    3차 핵실험으로 피어 오른 먹구름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만든 상황. 분명한 것은 뉴욕과 평양, 서해와 휴전선을 오가며 진행되는 긴장 고조가 당분간 다른 길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는 사실이다. 키리졸브 훈련이 끝난 후에도 한국군 20여만 명, 미군 1만여 명이 참여하는 독수리연습(FE)은 4월 하순까지 진행되고, 북한군 역시 3월 중순부터 육·해·공군이 함께 참여하는 국가급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공교롭게도 모든 긴장의 방아쇠가 한꺼번에 당겨지는 것이야말로 이전과는 다른 부분이고, 갈등을 끌어올리는 주도권을 평양이 쥐었다는 점은 가장 불안한 부분이다. 봄은 다가오지만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얼어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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