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주권 만세’ 외칠 수 있나

동부팜한농, 몬산토코리아 종자 일부 인수…한국 종자시장 발전 기대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2-10-22 10: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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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자주권 만세’ 외칠 수 있나
    우리나라에서 매운 고추의 대명사가 된 청양고추는 고추 종류 중 하나다. 맛과 향기가 청송·영양 지방의 재래종 고추와 비슷해 청송의 ‘청’자와 영양의 ‘양’자를 따서 ‘청양’고추로 명명하고 1983년 상표권을 등록했다. 하지만 중앙종묘에서 개발한 이 청양고추는 1998년 몬산토코리아가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를 2000억 원에 인수하면서 몬산토코리아 손으로 넘어갔다.

    최근 동부그룹의 농업 식품 계열사인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가 갖고 있던 채소 종자 일부를 인수했다. 청양고추 종자를 되찾은 것일까. 서울 강남에 위치한 동부팜한농 본사. 10월 초 이곳에서 만난 오영석 상무는 3시간여 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마치며 대뜸 캐비닛을 열었다. 기자가 재차 몬산토코리아의 채소 종자를 인수한 의의를 묻자 백과사전 두께의 서류철 서너 개를 보여주며 “바로 이것을 인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류철에는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로부터 인수한 삼복꿀수박, 불암배추, 관동무 등의 종자는 물론 각 종자에 속한 수천만 점에 달하는 유전자원, 원종(原種), 원원종(原原種)이 적시돼 있었다. 그는 “동부팜한농에서 몬산토코리아가 갖고 있는 청양고추를 비롯한 고추 종자를 인수하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고추 품종을 있어 굳이 비싼 값을 치르며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추, 토마토 인수 대상에서 제외

    동부팜한농은 9월 11일 몬산토코리아로부터 채소 종자 300여 품종과 인력 및 특허권 등을 인수하고 고추, 토마토, 파프리카, 시금치 등 일부 채소 품목에 대한 유전자원은 인수 대상에서 제외하는 대신 국내 판매권을 획득했다. 이로써 동부팜한농은 2000억 원에 달하는 종자시장에서 선두를 차지하게 됐다(그림 1, 2 참조. 우리나라 곡물 종자시장은 정부가 관할하기 때문에 종자시장은 통상 채소 종자시장을 의미한다). 오 상무는 “농업발전의 기본이 되는 종자를 되찾아 한국 농업의 발전을 도모하게 돼 다행”이라면서 “몬산토코리아 직원 317명 중 267명을 인계받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 국민은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와 종자사업 양수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반기는 분위기다. 외환위기 당시 다국적기업에 넘어간 우리 종자를 국내 기업이 다시 사옴으로써 “잃었던 종자주권을 회복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일반인은 ‘종자주권’을 ‘영토권’처럼 여기고 이번 인수를 통해 국내기업이 국내 종자시장에서 과반을 차지했거나 시장 전체를 확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부팜한농은 ‘정말로’ 종자주권을 되찾은 것일까. 학계에서는 “종자주권이란 비단 국내 종자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과반 이상인 것 외에 해외 종자가 국내에 유입돼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것, 그리고 해외시장에서 국내 종자기업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번 인수는 종자주권 ‘확장’ 일 뿐 ‘회복’은 아니다”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다국적기업이 국내기업의 육종기술 같은 무형자산을 15년 동안 가져 갔다 다시 준 것이기 때문에 되찾았다는 표현은 쓸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육종기술 되찾았다?

    ‘종자주권 만세’ 외칠 수 있나

    9월 11일 우종일 동부팜한농 부회장(왼쪽)과 브렛 베게만 몬산토 사장이 몬산토코리아 종자사업 양수계약을 체결했다.

    실례로 이철호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 이사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이번 인수는 몬산토코리아의 주요 작물인 고추, 토마토 등의 국내 판매권을 사온 것이기 때문에 종자주권 회복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종자시장에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토종기업 농우바이오의 김용희 대표는 “종자주권이란 표현은 외환위기 때 유일하게 외국기업의 인수 제의를 거부한 우리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면서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의 핵심이 아닌 나머지 부분을 인수한 것이므로 ‘종자주권 회복’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일축했다.

    이처럼 관계자들이 이번 인수건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는 것은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로부터 가져오지 않은 고추 종자의 비중이 전체 종자시장에서 20여%(370여억 원)로 가장 높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익명을 요구한 몬산토코리아 관계자는 “이번에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로부터 인수하지 않은 고추, 토마토, 파프리카, 시금치 종자 등은 몬산토코리아 매출액의 1/3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고 귀띔했다.

    외환위기 이후 민간 육종가 급증

    그렇다면 동부팜한농의 채소 종자 인수가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시계를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으로 돌려보자. 당시 경영난에 허덕이던 종자기업들은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인수 제의를 받는다. 그 결과 국내 종자시장에서 1위와 3위를 차지하던 흥농종묘와 중앙종묘가 세미니스(현 몬산토코리아), 2위인 서울종묘가 노바티스(현 신젠타코리아)에 인수되면서 국내 주요 종자기업 대부분이 다국적기업에 넘어갔다. 박기환 한국농촌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그 결과 시장이 재편되면서 다국적기업이 국내 채소 종자의 70% 이상을 공급하게 됐을 뿐 아니라, 토종 유전자원과 육종기술이 유출되고 로열티 지급 부담이 급증했다”고 설명한다.

    이 같은 결과는 종자시장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무엇보다 민간 육종가가 많아졌다. 흥농종묘, 중앙종묘, 서울종묘 등 국내기업에서 일하던 육종가들이 자발적 퇴사 혹은 해고되면서 창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국적기업들은 기존 우리나라 종자기업들처럼 다양한 종류의 종자를 동시다발적으로 개발하지 않고, 여러 나라에서 팔 수 있는 ‘시장성 있는 종자’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과정에서 배제된 연구자들, 또는 다국적기업 문화에 이질감을 느낀 연구자도 하나둘 늘어났다. 권오하 민간육종가협의회 회장(권농종묘 대표)은 “민간육종가협의회 회원 수가 40명에 달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외환위기 이후 창업한 영세 육종가”라고 설명했다.문제는 이들이 개인 육종가로 나서면서 종자시장이 위축됐다는 점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육종가들이 제도권, 즉 기업에 속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연구활동을 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종자산업은 첨단산업인 까닭에 전문가 집단이 아닌 개인이 연구하면 시너지효과를 얻기 어렵다. 보통은 하나의 종자를 만들기 위해 병충해 연구팀, DNA 연구팀, 종자 생산팀이 꾸려지는데, 비닐하우스에서 홀로 창업한 육종가가 이 모든 일을 담당하기가 버거운 까닭이다.

    강병철 서울대 식물생산과학부 교수는 “개인 육종가가 기업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창업하면 어느 정도 생산성은 확보할 수 있다”며 그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개인 육종가와 함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신진 육종가가 양성되지 않고, 개인 육종가의 연구투자에도 한계가 있어 종자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전망했다.

    한편 다국적기업이 종자시장을 장악한 것 자체가 신진 육종가 양성을 방해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기존 국내 종자기업에서는 선배가 후배를 도제식으로 10년 정도 키우며 신진 육종가를 배출했지만 다국적기업에서는 박사급 육종가만 고용하기 때문에 후배가 배출될 가능성이 차단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부에서 궁여지책으로 2010년부터 채소육종연구센터를 통해 채소 육종가 양성을 지원하고 있지만 결실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종자주권 만세’ 외칠 수 있나
    침체된 종자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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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종자시장 점유율 1위를 선점한 농우바이오가 대표 종자로 키운 작물들.

    이런 현실은 종자 개발 위축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오산, 평택, 음성, 포항에 있던 육종연구소뿐 아니라 미국, 인도, 중국에 있는 육종연구소까지 폐쇄됐다. 게다가 다국적기업이 일부 종자만 선택, 집중 연구하면서 다양한 품종이 개량되지 못했다. 그 결과 연구가 중단된 작물들은 변해가는 환경에 걸맞게 발전할 가능성을 차단당했다. 실제로 이번에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로부터 가져온 토종 종자 중에는 품종 개량이 이뤄지지 않은 채 방치된 것들도 있었다.

    한 다국적기업 전 직원에 따르면, 이런 연유로 종자 수출량도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수출 총액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상당수는 다국적기업의 현지법인 매출을 늘리려고 한국을 거쳐 다른 나라로 내보내는 경우로, 이 때문에 수출 총액은 증가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국내 종자기업의 해외 수출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농우바이오가 다국적기업의 인수합병을 거부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고희선 당시 농우바이오 대표(현 국회의원)는 “종자는 미래에 물려줄 유산이니 못 버티면 차라리 국가에 넘기겠다”고 선언하면서 경쟁력을 키워 2011년 매출액 500억 원을 달성하며 국내 종자시장에서 1위 자리를 굳혔다. 또한 1994년부터 중국, 인도네시아, 미국 캘리포니아, 인도 방갈로, 미얀마에 법인을 세우면서 종자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김용희 농우바이오 대표는 “토종 종자를 지키는 것 외에 우리 종자를 세계시장으로 진출시키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종자주권’을 확장하고 있다”며 그 의미를 풀이했다.

    농업 생산은 종자가 좌지우지

    ‘종자주권 만세’ 외칠 수 있나

    다국적기업에서 퇴사한 뒤 창업해 우리종묘를 이끄는 김완규 씨가 ‘청옥배추’를 들고 있다. 김씨는 이 작물의 종자를 개발해 2009년 국립종자원으로부터 우수품종상을 받았다.

    지난 15년 동안 진행된 이 같은 일련의 변화는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로부터 일부 채소 종자를 인수한 의의를 되짚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현재 국내기업에 의한 채소 종자 자급률은 50%에 그친다. 무, 배추, 고추는 국내기업이 거의 자급하지만 토마토, 양파, 파프리카는 대부분 외국기업에 의존하는 것이다. 강병철 서울대 교수는 “동부팜한농의 이번 인수는 종자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종자주권을 국내시장뿐 아니라 국외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앞으로 동부팜한농이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자산업은 농업의 전방위산업이다. 그만큼 농업생산은 종자가 좌지우지한다. 종자시장에선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동부팜한농 측에서는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고추 종자를 가능한 모두 가져오는 것이 좋다. 종자를 사오는 것은 비단 그 유전자원뿐 아니라 경쟁력 있는 연구원들의 노하우를 가져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종자주권 확보, 즉 종자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몬산토코리아에서 일하던 연구원들을 포용하고 고추 종자를 가져와 인재육성과 함께 종자 개발을 병행해야 한다. 인수 자체보다 그 이후 단계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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