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7

2012.10.08

아, 아시베츠 탄광 원혼이여!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희생자 유골 끝내 못 찾고 발길 돌려

  • 김현태 포럼 진실과 정의 사무국장 truthnjustice@hanmail.net

    입력2012-10-08 1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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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홋카이도 미츠이쓰 아시베츠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을 암매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시베츠시 오마가리 지구에 대한 유골 발굴 작업이 8월 24~26일 한일 공동으로 이뤄졌다(측량 등 발굴을 위한 사전 작업은 7월 10일 시작했으며 8월 말까지 발굴, 사후 매립 작업을 계속했다). 한국과 일본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유골 발굴 작업에 나선 것은 1997년 이후 이번이 여섯 번째다.

    아, 아시베츠 탄광 원혼이여!

    아시베츠 탄광에서 일하다 암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인 유골 발굴 작업 현장.

    아침부터 부슬비가 간간이 내리던 8월 24일 각양각색의 참가자들을 태운 대형 버스 한 대와 승용차 여러 대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소라치(空知) 지역 아시베츠(芦別)시로 향했다. 옛 탄광마을이 자리한 곳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아이누족(홋카이도 원주민), 재일한국인, 중국 조선족, 그리고 일본에서 공부하는 미국인과 폴란드인 유학생 등 출신, 국적, 성별, 연령대가 다양한 60여 명이 함께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약 70년 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간 이들의 사연이 새겨진 땅이다.

    아시베츠는 아이누어로 ‘깊은 강바닥의 위험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이 뜻하듯 굽이진 강과 높이 솟은 봉우리들이 탄광마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아시베츠시가 석탄 산업으로 번성할 때는 인구가 7만 명을 넘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약 1만6000명이 거주한다.

    “맞아 죽은 조선인 10명 이상 암매장”

    일행은 일본 홋카이도 아시베츠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발굴 행사 개회식에 참가하기 위해 서(西)아시베츠 다목적센터로 향했다. 아시베츠 현지 주민과 취재진 등 50여 명이 더해져 전체 참가자는 100명을 훌쩍 넘겼다. 이 행사의 가장 큰 공로자는 아시베츠 별이내리는마을 백년기념관의 하세야마 다카히로 관장이다. 아시베츠에서 나고 자란 그는 지역 공무원 신분임에도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를 계속해 결국 여러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를 이끌어냈다. 이번에도 그는 아시베츠 불교회, 아시베츠 향토사연구회, 소라치 민중사 강좌, 강제동원·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 등과 함께 실행위원회를 구성했다.



    1976년부터 지역에서 민중사 운동을 계속한 도노히라 요시히코 소라치 민중사 강좌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유골 발굴 작업을 통해 역사를 직시함으로써 끊어진 인간관계를 다시 이어보자”고 말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은 일본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사죄하고 보상해야 가능하지만, 진정한 화해는 민간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후 하세야마 관장이 진행한 유골 발굴 오리엔테이션에서 유골 발굴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익힌 참가자들은 5개 조로 나뉘어 아시베츠 강변으로 향했다.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했던 강변은 유골 발굴 작업이 원활하도록 중장비를 동원해 사전 작업을 해놓은 상태였다.

    이 지역이 발굴지로 결정된 이유는 아시베츠 탄광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 때문이다. 홋카이도청이 발행한 ‘홋카이도와 조선인 노동자-조선인 강제연행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42년 국민동원실시계획에 따라 조선인을 일본 곳곳으로 보냈고, 홋카이도에만 조선인 14만5000여 명이 강제동원돼 대부분 탄광에서 일했다. 조선인은 관리자들에게 감시당하고 가혹한 노동을 하면서도 임금을 받기는커녕 허기에 시달렸다. 한 증언자는 “이런 생활 속에서 굶어 죽거나 맞아 죽은 조선인은 아시베츠 강변에 암매장했고, 그 수가 10명을 넘는다”고 말하면서 이 지역을 매장지역으로 지목했다.

    아, 아시베츠 탄광 원혼이여!

    1. 조선인 노동자 숙소터. 2, 3. 아시베츠 탄광 노동자들이 일하던 모습.

    참가자들은 발굴단 지휘를 맡은 박선주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의 설명에 따라 조별로 삽과 곡괭이를 나눠 들고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색상이 약간이라도 다른 지층이 나오거나, 특이한 물질이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작업 손길이 한없이 조심스러워지고 속도도 늦춰졌다, 불에 탄 검은 흔적 같은 특이한 면이 나오면 노란색 페인트로 구체적으로 구획을 표시해놓고 다음 날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블루시트를 덮었다. 이날 박 교수는 “유해 발굴은 국가가 제 책임을 다하지 못해 발생한 희생자들을 예우하는 민족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물론, 희생자들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윤리적 의미도 있다”면서 “유골이 발굴되지 않더라도 유골 발굴작업 자체에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유골 발굴 둘째 날인 8월 25일, 아침 일찍부터 발굴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무덤도 없이 버려진 희생자들의 넋이라도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참가자들의 뜨거운 마음이 굵은 땀방울로 쏟아졌다.

    열렬한 한국 드라마 팬이라는 마을의 한 할머니는 발굴 현장을 찾아 흙이 가득 담긴 수레를 직접 끌었다. 토목회사를 경영한다는 마을 아저씨는 자기 회사 중장비를 손수 운전하며 발굴 작업을 도왔다. 당직 근무를 마치자마자 택시를 타고 왔다는 의사는 이온음료를 두 손 가득 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조선인 소녀와의 추억을 간직한 할머니는 옛이야기를 들려줬다.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해를 모신 절 스님들은 정성스럽게 추모제를 지냈다. 슬픈 과거를 밝히는 작업에 뜻을 같이한 많은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이 흔쾌히 성금을 보내왔다.

    진실규명 뜻을 같이한 일본인들

    8월 26일 눈에 띌 만한 성과가 없자 참가자들의 손길이 더욱 바빠졌다. 끝내 유골을 찾지 못한 일행 대부분은 희생자 추도식과 유골 발굴 보고회를 위해 발굴 현장을 떠났다. 소수 인원이 남아 작업을 계속했는데, 추도식이 끝날 무렵 “작은 유골을 네 점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 교수에 따르면,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의 뼈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 국내법에 따라 발굴한 뼈 일부를 일본 경찰에 넘겼다. 경찰 감식 결과는 한 달쯤 뒤에 나올 것이라고 한다.

    이번 발굴 작업을 준비한 도노히라 대표는 마지막으로 “당신들을 만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들 덕에 지금 우리가 국경을 넘어 만나 공동으로 작업을 수행하면서 우정을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국가라는 틀을 넘어선 새로운 동아시아를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각지에는 강제동원 희생자 암매장지로 지목된 곳이 여러 곳 있지만, 발굴을 진행한 곳은 홋카이도가 유일하다. 홋카이도에서 오래 활동해온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민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 예로, 1997년 슈마리나이에서 발굴한 유골 2구는 주인을 찾지 못해 충북대 유해발굴센터에 보관 중이다. 그 밖에 유골 다수를 발굴 지역 여러 절에서 나눠 보관하고 있다.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유골은 더 많다.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이들은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라면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지나가버린 옛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끊임없이 여러 형태로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무덤도 없이 버려진 그들이 넋이라도 고향에 돌아올 날은 대체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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