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0

2017.05.31

<새 연재> 손석한의 세상 관심법

분노가 불안을 이겼다

文 정부, 두 정서 잘 누그러뜨려야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의학박사 psysohn@chol.com

    입력2017-05-30 14: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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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에서 중년 여성 4명이 점심을 먹으며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TV에서는 청와대 상춘재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5당 원내대표의 오찬회동 모습이 방송되고 있었다. 대통령이 직접 각 당 대표를 맞이했고, 모두 웃는 표정으로 자리에 섰다.

    한 여성이 말을 꺼냈다. “요새 대통령이 잘하는 것 같아.”

    그러자 다른 여성이 “맞아. 그런 것 같아. 대통령이 잘생겼네”라고 거들었다. 어떤 여성은 “이번에 청와대 들어간 사람은 다 잘생겼어”라며 크게 웃었다. 

    다른 식탁에 앉은 손님 2명은 60대로 보이는 남성들이었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흘끔흘끔 TV를 보다 마침내 한 명이 말을 꺼냈다. “비서실장이 주사파라며?” 다른 한 명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하네. 걱정이야. 앞으로 지켜봐야지 뭐.” 두 팀의 중간 정도 자리에 앉아 ‘혼밥’을 먹던 필자는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대선이 끝나 국민 통합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 뭔가 불길한 조짐 같기도 했고, 아직도 적잖은 국민이 문 대통령을 반기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세는 새 대통령을 반기고 칭찬하는 분위기다. 당선 후 일 주일간 보여준 민생, 소통, 탈(脫)권위 행보는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줬다.



    청와대 직원들과 함께 손수 식판에 밥과 반찬을 받은 뒤 식사하고,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직원들을 만나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며, 세월호 참사 당시 제자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기간제 교사 2명을 순직자로 예우하라는 지시를 내린 그에게 사람들은 ‘사이다’ 같은 시원함이라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유가족의 편지 낭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더 나아가 유족에게 다가가 안아주며 위로하는 면모를 접한 누리꾼들은 ‘이것이 나라다’ ‘정부의 공식행사가 왜 이리 눈물겹고 감동적이냐’는 댓글을 달며 기뻐했다. 영부인 김정숙 여사도 소탈하고 친근감 있는 행보로 ‘유쾌한 정숙 씨’라는 애칭이 붙었다.



    새 정부 파격 행보에 박수

    대선에서 41.8% 득표율을 기록한 문 대통령은 비록 과반 득표에는 실패했지만 다자구도인 데다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얻었고, 2위 후보와 압도적인 표차를 보였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대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서 그의 승리 요소를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는 왜 이겼을까. 사람들은 왜 그에게 투표했을까. 사실 너무 많은 요소가 관여돼 복합적인 분석이 필요하지만, 필자는 ‘분노가 불안을 이겼다’는 한마디로 승리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번 대선에선 보수 대 진보, 우파 대 좌파, 반북 대 친북의 개념을 뛰어넘은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그 출발점은 지난해 가을 불거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였다. 최씨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분노한 국민은 마침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고, 이는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국민은 권력 사유화와 막강 비선(秘線)의 존재에 실망감을 드러냈으며, 지난 9년 동안 이어진 보수 정권에 대한 심판론이 등장했다. 

    그러자 보수가 곧 애국이라고 여기는 많은 세력이 태극기집회로 맞불을 놓았다. 그들은 보수정권이 무너지고 진보 또는 좌파정권이 들어서면 북한이 우리나라를 접수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문 대통령이 집권하면 김정은에게 나라를 바치는 꼴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주로 노년층인 그들은 자신의 피땀으로 일군 대한민국의 번영을 꼭 지켜야 한다는 신념과 함께 친북좌파세력이 득세하면 우리나라가 공산화돼 망할 것이라는 걱정을 안고 있다. 6·25전쟁을 겪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지켜봤던 경험의 산물인 불안이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집단적 불안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년층이라고 다 보수정권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믿었던, 그리고 사랑했던 박 전 대통령에게 배신감과 실망을 느낀 노인들은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또한 젊은 세대 가운데 일부도 이런저런 이유로 태극기집회에 나섰다. 이와 같은 분열 상황이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인용 결정으로 종료됐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계속 분열됐지만, 대다수 국민은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따랐다.

    그런 다음에도 ‘불안’을 주로 느끼는 사람과 ‘분노’를 주로 느끼는 사람으로 사회가 나뉜 양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연 무엇이 불안한가. ‘달빛’정책에 의해 개성공단이 재가동되고 남북 간 평화 분위기가 조성돼 대북 경제를 지원하면 그 돈으로 북한이 핵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결과적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테고, 우리나라는 북한에게 먹힐 것이라고 걱정한다. 또는 부유세를 신설해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면 자신들의 호주머니가 얇아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평등과 복지를 지나치게 강조해 많은 재원이 들어가면 나라 곳간이 거덜 날 것이라고 걱정한다. 재벌 등 기업을 규제하면 수출을 비롯한 우리나라 경제가 위축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적폐세력을 청산한다는 기치 아래 정치 보복이나 사회적 비난 혹은 매장이 나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에게도 있을까 걱정한다.


    분노  ·  불안 줄이는 역할 해야

    검찰의 기수 파괴 인사나 관례적인 돈봉투 사건에 대한 감찰 등 개혁 조짐까지 보이기에 더 불안하다. 나라를 걱정하는 순수한 불안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개인적 불안이 혼재돼 있다.

    분노를 느끼는 집단은 나라를 걱정하는 순수한 불안을 어리석고 시대착오적이며 쓸데없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또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개인적 불안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혹은 반성할 줄 모르는 뻔뻔함이라면서 오히려 분노지수를 높인다. 

    대선 결과 분노의 감정이 불안을 압도했고, 분노의 감정은 승리에 도취해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지난날을 하나 둘 떠올리고 돌이키면서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과연 무엇에 분노했는가. 재벌이 이 나라의 부를 독점하고, 하청기업에 갑질을 하며,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에게 불공정 행위를 하는 것에 분노한다. 고위층과 연관된 사람들이 큰 액수의 예산을 정치권력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이권으로 끌어당기는 행태에 분노한다. 권력의 비호 아래 부정한 방법으로 명문대에 입학하거나 좋은 기업에 취업하는 것에 분노한다.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경제력과 청년 실업자의 참담한 생활에 분노한다. 막대한 사교육비를 들여 교육 특권을 누리고 그 결과 부와 명예가 세습되는 현실에 분노한다.

    분노세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다. 분노는 공격적이다. 반면, 불안은 방어적이다. 분노는 창이고 불안은 방패다. 창과 방패가 서로를 겨누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총체적 존재의 양손에 사이좋게 쥐어져 있으면 좋으련만. 어떻게 될지 앞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민이라는 총체적 존재를 이끄는 사람은 새로운 대통령 문재인이라는 점이다. 문 대통령이 말한 대로 그의 어깨가 무척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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