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0

2011.08.16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위대한 신궁

김한민 감독의 ‘최종병기 활’

  • 신지혜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ice-cold@hanmail.net

    입력2011-08-16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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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위대한 신궁
    잡히면 죽는다.

    소년 남이는 어린 누이 자인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짖는 소리까지 사나운 큰 개가 손목을 물어뜯어 정신이 혼미하지만, 새된 비명을 지르는 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젠 네가 자인의 아비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사력을 다해 돌로 개를 쳐서 죽이고 가까스로 위험에서 벗어난다. 남이와 자인은 조금 전 엄청난 일을 당했다.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것이다. ‘잡히면 죽는다’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남이는 자인을 들쳐 업고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 발길을 재촉한다.

    그것은 활이다.

    무장이던 아버지가 남이에게 남긴 것은 친구에게 전하라는 말과 활. 친구는 역적의 자식들을 말없이 받아들였고, 아들 서군와 함께 13년 동안 키운다. 그리고 어른이 된 남이에게 아버지의 유품을 건넨다. 그것은 활. 아버지의 무기였던 활. 손목보다 팔꿈치의 힘을 더 써서 강하게 날려야 하는 활. 휘어잡는 방식에 따라 직선으로, 곡선으로 바람을 이기며 강하게 날아가는 활. 그것은 활이다.

    그리고 병자호란.



    자인과 서군이 혼례를 치르는 날.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며 축하하던 그때 청나라 부대가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납치해간다. 서군과 자인도 혼례를 마치지 못한 채 인질로 끌려가고, 뒤늦게 집에 도착한 남이는 참상의 흔적을 치운 뒤 활을 들고 그들을 추격한다. 한 발 한 발 청의 부대 니루를 추격하는 남이의 흔적을 보면서 니루의 장수 쥬신타는 남이의 신묘한 솜씨를 알아차리고 위험을 직감한다.

    귀환.

    이제 남이와 쥬신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활을 둔 팽팽한 접전,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한 탈출 여정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역적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던 남이는 무장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신궁. 게다가 아버지가 남긴 활을 손에 쥐고 있으며, 아버지가 가르쳐준 활의 이상과 기개를 체화한 인물이다. 쥬신타 역시 무예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용맹과 충성심이 강한, 특히 활을 잘 다루는 활 전문 장수다. 본격적으로 남이와 쥬신타의 활을 사이에 둔 신경전이 펼쳐지고, 허공을 가르며 목표물에 꽂히는 활의 위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필사의 항거로 자유를 찾은 서군은 남이와 조우해 자인을 붙잡고 있는 니루를 추격하고, 무장의 딸 자인 또한 자신의 운명 앞에 호락호락하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만난 세 사람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지막 전투를 펼친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위대한 신궁
    활.

    아들 머리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을 당긴 윌리엄 텔, 빈궁과 핍박에 쫓겨 숲으로 들어간 자들의 우두머리가 돼 활시위를 당기던 로빈 후드…. 그리고 누가 또 활을 쐈을까. 잠시 생각을 돌려보지만 이렇다 할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신궁 남이의 등장은 새롭고 신선하며 흥미롭다.

    우리나라의 전통 활은 짐승 뿔과 나무를 합해 만든 각궁이라고 하는데, 이 활의 장점은 갠 날이나 비 오는 날이나 그 힘이 똑같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활 제작기술은 상당히 뛰어나서 당시 중국에서도 수입해갈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 선조에게 있어 활은 무기체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최종병기 활’에서 남이는 활 쏘는 방법을 다양하게 선보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활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킨다. 보통 활시위를 당기면 화살은 직선으로 날아가지만 남이는 ‘곡사’의 기술을 선보인다. 말 그대로 목표물과 화살의 각도를 계산해 화살 궤적을 휘게 하는 것이다.

    쥬신타는 눈앞에서 이런 신기(神奇)를 목격하고 경쟁심을 갖는다. 활과 화살을 다루는 남이의 신묘한 솜씨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쥬신타가 이끄는 니루에게 쫓기며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인 남이는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고려해 대나무를 즉석에서 깎아 애깃살을 만들어 쏜다. 대나무를 반으로 갈라 그 안에 작은 화살을 넣어 쏘는 애깃살. 그것은 화살이 대나무통에 들어 있고 대나무통은 활시위에 있기 때문에 활을 쏴도 아직 쏘지 않은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적을 혼란에 빠뜨린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활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남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활이라는 무기가 갖는 강력함과 속도감, 위력에 놀라고 감탄하며 감동한다.

    이에 반해 쥬신타가 쏘는 활은 육량시.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활로 화살촉 무게만 240g 정도로 일반 화살촉의 24배에 달한다. 무게가 있어 멀리 날지는 못하지만 방패를 뚫고 사람의 신체를 절단할 정도의 가공할 위력을 지녔다. 따라서 대단한 힘과 체력, 그리고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니루의 수장 쥬신타의 활이라 할 만하다.

    최종병기 활.

    영화는 활이라는 무기가 제목처럼 ‘최종병기’로 기능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니, ‘최상병기’인 활을 볼 수 있다. 남이와 자인, 서군이라는 캐릭터를 지켜내고 그들을 묶어주는 것도 활이며, 결국 그들과 적의 목숨을 구하거나 끊는 것 또한 최종병기인 활이다. 임금마저 무릎 꿇고 자기 백성을 포기한 상황에서 끝까지 적에게 대항하는 남이와 자인, 그리고 서군. 그들은 냉철한 판단력으로 씩씩하게 운명에 대항한다. 이 세 캐릭터는 어느 영화의 캐릭터보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우며 감동적이다. 캐릭터들은 활을 떠받치고, 활은 그들을 받쳐준다. 그런 만큼 ‘최종병기 활’의 실질적 주인공은 활이라 할 수 있다. 영상과 캐릭터 사이에 녹아든 활은 이 영화의 신선함을 배가한다.

    이들과 예각을 이루는 쥬신타와 그의 부대 니루는 만주어를 쓴다. 지금은 거의 사어(死語)가 돼버린 만주어. 그것을 영상 속에 재현하기 위해 조언을 받고 고증을 통해 만주어를 구현한 점도 놀랍다. 강하고 남성적 느낌을 주는 만주어는 관객에게 새로운 자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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