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7

2011.07.25

6·25 참전용사 ‘코레 가지’ 앞에서 ‘덩더쿵’

모두가 한국을 사랑하는 터키

  • 김은열 독도레이서 www.facebook.com/dokdoracer

    입력2011-07-25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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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참전용사 ‘코레 가지’ 앞에서 ‘덩더쿵’

    6·25전쟁 참전용사회관에서 한국군 참전용사 ‘코레 가지’와 함께.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퀴즈 하나. 터키 사람이 ‘칸 카르데쉬’, 즉 ‘피를 나눈 형제’라고 부르는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답은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로 열두 시간 걸리는 한국이다. 터키인이 ‘카르데쉬 율케’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는 특별한 국가가 한국이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탄불에 도착한 일요일 밤 호스텔에 들어가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점원이 반갑게 맞았다. “My brother(형제여)!” 이거 왜 이러시나, 대체 언제 봤다고 형제라는 건지. 어리둥절하면서도 싫지만은 않았다.

    물론 이렇게 환대받기까지 이스탄불로 오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독일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자동차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겠다는 야심 찬 계획으로 가득했던 ‘제2차 대륙횡단’을 시작한 때는 바야흐로 초여름. 그간 서유럽 국가의 이상저온 현상으로 몰랐던 더위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자마자 우리를 엄습했다. 잔인하도록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폭염에 시달리며 하루 여섯 시간씩 달리는 와중에 기름값 아껴보겠다며 에어컨을 잠시라도 끌라치면 뒷좌석에선 어김없이 ‘폭동’이 일어났다.

    이뿐 아니라 선진국 테두리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예상치 못한 일이 곳곳에서 우리를 덮쳤다. 불가리아의 부르가스로 가는 길. 시골길로 접어드는 순간 대관령 뺨치는 드라이브 코스의 절경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푹 꺼진 도로 탓에 어느 순간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뿐이랴, 내비게이션을 따라 접어든 길에서 만난 물소 떼가 차 바로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유유자적 걸어 다니는 것을 보며 당황하기도 했고, 흑해에 발이라도 담그려는 찰나 갑자기 시동이 꺼진 탓에 땡볕 아래에서 천으로 손을 둘둘 감은 채 다 같이 차를 밀기도 했다. 국경 검문소에서는 늘 날씨만큼이나 느긋한 사람들 덕분에 한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한국 사람과 한국 여자 보면 환장(?)

    어쨌거나 주말 저녁의 끔찍한 교통체증을 뚫고 도착한 이스탄불에서 첫날부터 한국인을 향한 어마어마한 친절을 맛본 셈. 다음 날부터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만난 많은 터키인 역시 한국인이라고 소개하면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하고 구호를 외치며 반갑게 인사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3·4위전에서 한국과 터키가 경기를 펼친 일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비록 한국이 3대 2로 패했지만, 한국 응원단이 대형 태극기와 함께 터키 국기를 펼치며 양국을 모두 응원한 모습은 터키에서도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물론 터키인이 기분 좋은 친절만 베푸는 건 아니다. 세계 어딜 가나 동양 여자에게 ‘환상’을 가진 남자를 만날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유난히 동양 여자, 특히 한국 여자에 ‘환장’하는 사람이 많다. 상점에서 호객하는 점원은 물론 길거리에서 만난 현지인조차 “안녕하세요”를 외치며 따라붙어 당황하기도 했다.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가 한국인이냐며 음료수를 공짜로 준대서 잠깐 따라갔다가, 갑자기 뺨을 쓰다듬으며 “저녁에 뭐할까?”라고 묻는 바람에 질겁해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 온 일도 있었다. 어쩌면 이들에게 ‘한국’은 구체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호기심과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우리라고 이들과 무엇이 다르랴.‘형제의 나라’라는 터키에 대해 지금껏 안 것은 오스만투르크와 아야소피아(성 소피아 성당), 케밥 정도인 것을. 한-터키 문화교류원의 주선으로 가능했던 6·25전쟁 참전용사들과의 만남은 이러한 얕은 인식을 넘어 ‘형제의 나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6·25전쟁 당시 터키는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병력을 보내 피해 규모 역시 2위에 달했다. 그것도 의회에서 부결한 것을 젊은이들이 시위를 벌여가며 뒤엎어 파병한 거란다. 3년 동안 터키군은 참전국 중 가장 용맹한 부대로 이름 높았고, 특히 평양 탈환 작전 등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전쟁 중 고아를 위한 학교를 세우기도 했던 이들은 지금도 이름보다 한국군 참전용사를 뜻하는 ‘코레 가지’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고.

    양국 끈끈한 관계 되새기는 자리

    6·25 참전용사 ‘코레 가지’ 앞에서 ‘덩더쿵’

    6·25전쟁 당시 참전용사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바로 그 ‘코레 가지’들을 만나러 가는 길, 갑작스레 주선된 만남은 6·25전쟁 참전용사만을 위해 마련한 회관에서 이뤄졌다. ‘코레 가지’는 2005년 부산에 있는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해 참배하고 표창을 받는 등 2000년대 들어 한국과의 왕래가 잦은 편이다. 게다가 6월에는 6·25전쟁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에 참석했을 테니, 따지고 보면 우리와의 만남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법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 행사의 주제는 감사와 존경. 할아버지뻘 되는 지긋한 노인분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우리 세대가 있다는 점과 두 나라의 끈끈한 관계를 되새기는 자리로 만들기로 했다. 참전용사는 대부분 ‘아리랑’을 아는 터라 가야금 연주에 눈빛이 달라지고, 간단한 한국어 한두 마디 정도는 구사한다. 사실 이날 영어를 터키어로 통역해주기로 약속했던 현지인이 오지 않아 의사 전달이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공연이 끝난 다음 무대 앞으로 찾아온 참전용사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짧은 터키어로나마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들 역시 손자손녀를 바라보듯 떠나는 순간까지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형제의 나라’라는 말이 마음 깊은 곳에 와 닿은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리가 향한 곳은 이스탄불과 앙카라 사이에 위치한 에스키셰히르 광역시. 당초 계획은 예술의 도시인 이곳에서 시 정부의 도움을 받아 길거리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적지를 100km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전해 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 전날 에스키셰히르 동쪽에서 쿠르드 족과 터키군이 충돌해 터키군 13명이 사망한 것이다. 쿠르드 족과 터키의 분쟁은 익히 알았지만 설마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충돌이 일어날 줄이야. 사망한 이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모든 콘서트와 공연이 취소됐다. 그 때문에 알찬 일정을 잔뜩 기대했던 우리는 갑자기 원치 않는 휴가를 얻었다.

    그 탓이라 해야 할지 그 덕이라 해야 할지, 갑자기 생긴 2박3일이라는 시간에 그간 미뤄왔던 사물놀이와 탈춤 연습을 계속했다. 세계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평소에는 제대로 된 연습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순간부터 공연할 때 박자와 강약을 정확하게 지키기보다 흥에 겨워 제멋대로 ‘달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재정비하는 차원에서 에스키셰히르 시의 오페라극장을 빌려 하루 종일 연습을 계속했다. 마치 출국 전 학생회관 연습실에 모여 몇 시간이고 연습하던 때처럼. “흥분해서 너무 빨라지면 안 돼요.” “강약을 좀 더 살리세요.” 조금만 흐트러질라치면 ‘매의 눈’을 자랑하는 공연팀의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졌다.

    복잡한 절차 때문에 이란 비자 발급이 좌절된 것부터 시작해 터키에서의 일정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게 이어지고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 이뤄지는가 하면 예정한 행사가 취소되기도 하는 등 내일 하루 일어날 일도 알 수 없는 상황. 에스키셰히르에서 이스탄불로 돌아온 독도레이서는 다시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국가의 비자를 받고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닐 예정이다. 40℃에 근접한 무더운 날씨와 불안정한 미래 때문에 우리의 ‘개고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 독도레이서 팀은 6개월간 전 세계를 여행하며 아름다운 섬 ‘독도’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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