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6

2011.07.18

“나랑 사귈래 아니면 죽을래?”

사랑해서 손찌검 ‘데이트 폭력’ 위험 수위…피해자는 주변에 적극 알려야 문제 해결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박하정 인턴기자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입력2011-07-18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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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랑 사귈래 아니면 죽을래?”

    데이트 폭력을 막기 위해선 연인 간 충분한 대화가 필요하다.

    “죽을래 사귈래 아니면 나랑 살래 어떡할래.”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소개돼 인기를 끌고 있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사람들은 흥겨운 멜로디를 따라 부른다. 몇몇은 이 노래를 들으며 목숨을 걸 정도로 뜨거운 ‘로맨틱한 사랑’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노래 가사가 실제 나의 이야기라면, 부러움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아 행복할까. 이쯤 되면 사랑이 아니라 고통이다. 연인 사이에 일어나는 데이트 폭력은 더는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수위에 도달했다.

    6월 19일 트로트 그룹 아이리스의 보컬 이은미(24) 씨가 남자친구에게 살해됐다. 경찰조사 결과 남자친구 조모(28) 씨는 이씨가 이별을 요구하자 앙심을 품고 흉기를 휘두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 사건은 ‘데이트 폭력’이 극단적으로 치달은 경우다. 이 사건 이후 데이트 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생활’이유로 쉬쉬한 우리

    데이트 폭력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언어적, 정서적, 경제적, 성적 폭력을 총칭하는 말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명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 데이트 폭력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르거나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욕설과 폭언을 일삼는 ‘언어적 폭력’ △ 누구와 함께 있는지 항상 확인하며 다른 이성을 만나는지 의심하는 ‘정서적 폭력’ △ 원치 않는 스킨십(키스나 포옹 등)을 하거나 성관계를 강요하는 ‘성적 폭력’ △ 돈을 빌리고 갚지 않거나 상대방에게 데이트 비용 전체를 전가하는 ‘경제적 폭력’도 모두 데이트 폭력에 포함된다.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이화영 소장은 “핵심은 공포심”이라고 지적했다.



    “상대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스스로 행동을 통제한다면, 그 자체도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흔히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는 여성이고 가해자는 남성이라 생각한다. 이 소장은 “데이트 폭력 발생의 기저에는 남성은 적극적, 공격적이고 여성은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남녀 성역할 모델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흥미로운 조사결과도 있다.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는 2009년 9월 29일부터 10월 29일까지 약 한 달간 서울지역 11개 대학 재학생 79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신체적, 언어적, 성적, 정서적 폭력 등 4개 범주로 나눠 데이트 폭력 경험 여부를 묻자, 상당수 학생들이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신체적 폭력은 남성의 41.5%, 여성의 32.7%, 정서적 폭력은 남성의 69.4%, 여성의 77.8%가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결과에 대해 송현철 정신과 전문의는 “특별히 심한 공격성을 지닌 사람만 데이트 폭력을 일으킨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주위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도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연애 상대에게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데이트 폭력입니다.”

    그간 우리 사회는 ‘사생활’이란 이유로 데이트 폭력을 쉬쉬해왔다. 그러나 이를 계속 개인의 사생활 문제로 치부하기엔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 2010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미랑 박사는 1300여 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한국 대학생들의 데이트 폭력과 피해 분석’이란 논문을 내놓았다. 여기서 그는 “어린 시절 가정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이성과의 관계에서 신체적, 정서적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설명했다.

    “나랑 사귈래 아니면 죽을래?”

    6월 19일 가수 이은미 씨(사진)의 남자친구 조모 씨는 이씨의 이별 요구에 앙심을 품고 흉기를 휘둘러 이씨를 숨지게 했다.

    데이트 폭력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인 남성과 피해자인 여성이 결혼하면 자연스레 가정 폭력으로 연결된다. 가정 폭력이 데이트 폭력을 낳고 이것이 또다시 가정 폭력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이 같은 악순환의 반복이 이씨 사건 같은 불행한 사례를 낳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데이트 폭력을 근절하려면 연인 간의 충분한 대화와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송 전문의는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평생’ 맞고 살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며 “혼자 끙끙 앓기보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조언했다.

    데이트 폭력 가해자에게 스트레스를 분출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열어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송 전문의의 환자 중 한 남성은 여자친구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 그는 건강한 스트레스 해소법 찾기와 우울증 치료를 통해 폭력과 폭언을 줄일 수 있었고, 지금은 결혼에 성공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쉽게 용서하면 가정 폭력으로 이어져

    물론 상담 자체만으로 데이트 폭력을 전부 해결할 수는 없다. 이 소장은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관계를 근절할 수 있도록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자기 상태를 주변에 알리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피해자 스스로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버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가해자인 연인을 쉽게 용서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더는 폭력도 없으리라 믿는 것.

    동갑내기 남자친구와 사귀는 여대생 정모(22) 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남자친구와의 다툼이 잦아지자 어렵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남자친구가 다짜고짜 뺨을 때리면서 폭력을 행사했다. 충격을 받은 정씨는 남자친구와 연락을 끊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뒤 남자친구에게 ‘나를 때린 것은 없던 일로 해주겠다’며 다시 만날 것을 제의했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어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현상을 두고 송 전문의는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 중에는 가해자가 자신을 사랑해 ‘폭력’으로 자기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문제는 헤어지자고 요구했다가 폭행을 당한 경우 앞으로 또다시 이별 얘기를 꺼냈을 때 폭행이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한국여성상담센터 최명희 소장은 “데이트 폭력 피해자는 ‘내가 피해자’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스로의 인권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 보호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연인 간 충분한 대화도 필수다. 이를 위해 3월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스마트폰용 ‘데이트 UP 데이트’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을 출시했다. 이 앱을 사용하면 연인 간 연애관을 점검할 수 있고, 대화 방법이나 스킨십 등 갈등을 일으킬 만한 부분과 관련해 조언도 얻을 수 있다.

    데이트 폭력은 사랑이란 미명으로 행해지지만 결코 사랑이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데이트 폭력을 미화하거나 ‘공격적인 남성, 순종적인 여성’의 고정된 성역할을 제시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데이트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당사자의 적극적인 노력뿐 아니라 전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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