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0

2010.11.01

활활 타는 단풍 밟으며 넉넉한 어머니에게 갑니다

지리산 둘레길

  • 김화성 동아일보 전문기자 mars@donga.com

    입력2010-11-01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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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활 타는 단풍 밟으며 넉넉한 어머니에게 갑니다

    지리산 산청 둘레길의 경호강과 덕천강을 따라 다랑논 벼들이 노랗게 익었다. 사진은 경호강 풍현 들머리.

    지리산 엄지발가락에 노란 물이 들었다. 새끼발가락엔 살짝 빨간 물이 배었다. 산자락 다랑이가 호박색으로 익었다. 산동네 지붕마다 붉은 고추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마당 귀퉁이엔 접시꽃(촉규·蜀葵)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맨드라미꽃 닭 볏도 농부 얼굴처럼 검붉다. 봉숭아, 채송화, 작약, 달리아, 코스모스, 깨꽃….

    늙은 호박이 탱자나무 울타리마다 가부좌를 틀고 있다. 돌담 너머 감과 대추가 주렁주렁 다발로 매달렸다. 호두나무를 흔들면 후드득 머리 위로 호두가 떨어진다. 밤송이가 벌어져 밤톨이 땅에 수북이 쌓였다. 활짝 벌어진 석류알이 검붉다. 돌덩이처럼 생긴 돌배가 물렁하다 못해 짓물렀다. 머루와 다래가 익고, 어름이 대롱거리고, 개암을 깨물면 입 안 가득 깨소금 냄새…. 지리산 둘레길은 요즘 ‘밥 안 먹어도 배부른’ 길이다. 맑은 햇살이 온갖 열매를 데쳐, 감칠맛 나게 맛이 들었다. 선선한 바람은 곡식들을 버무려 노랗고 빨갛게 여물게 했다.

    모두 850여 리 약 340km 내년쯤 둘레 잇기

    지리산 둘레는 모두 850여 리(약 340km). 3개 도(전남, 경남, 전북)와 5개 시·군(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 그리고 16개 읍·면 100여 개 마을을 거친다. 숲길(43.8%), 농로(20.8%), 고샅길(19.9%), 임도(14%), 도로(1.4%), 논둑길, 밭둑길, 고갯길, 강변길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약 170시간(시속 2km) 걸린다. 하루 16km씩 걸으면 약 21.2일이 걸리는 셈이다. 때론 낮은 곳(구례 토지 50m)을 걷기도 하고, 때론 산꼭대기(하동 악양 형제봉 1100m)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아직 둘레길이 모두 이어진 것은 아니다. 2008년 5월 전북 남원 산내면 매동마을~경남 함양 휴천면 세동마을 코스가 첫선을 보였고, 2008년 11월 남원 인월 지리산길 안내센터~매동마을 길이 트였다. 2011년쯤 돼야 둘레 잇기가 모두 마무리될 예정. 그때야 비로소 아무 곳에서나 출발해 휘휘 지리산 자락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현재 지리산 둘레길이 열린 구간은 총 70.1km. 남원 주천~운봉 14.3km, 운봉~인월 9.4km, 인월~금계 19.3km, 금계~동강 15.2km, 동강~수철 11.9km다. 남원과 함양 구간은 모두 이어졌지만 하동 구례 지방은 한창 길을 트고 있다. 나머지 산청 구간(수철~갈티재 47.1km)은 11월 중에 열린다. 산청 구간은 이미 개통된 함양 동강~산청 수철마을(11.9km)에서 이어진다. 아직 길 안내판이나 화장실, 주차장, 숙박시설 등이 미흡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둘러보는 데 큰 불편은 없다. 11월 중순이면 단풍 숲길이 활활 불타오른다.

    지리산은 크다. 무겁다. 배춧속처럼 꽉 찼다. 황소처럼 웅크리고 앉아 천년만년 묵언정진 중이다. 세상을 모두 담고도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는다. 지리산은 한국인의 어머니 산이다. 한 해 두세 번은 가봐야 마음이 넉넉해진다. 지리산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산에 들어서는 순간 어느새 사라진다.

    지리산의 뷰 포인트(view point)는 어디일까. 지리산은 워낙 커서 산 밖이나 곁가지 낮은 산 혹은 둘레길에서 봐야 전체가 보인다. 산꾼들은 전남 광양 백운산(1215m)에서 겨울에 보는 지리산을 우선 꼽는다. 반야봉~삼도봉~명선봉~형제봉~칠선봉~영신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천왕봉의 용처럼 꿈틀대는 주능선이 한눈에 펼쳐진다. 울끈불끈 지리산의 근육질 몸매가 장관이다. 백운산은 흔히 ‘지리산 전망대’라 부른다. 지리산 남부 능선의 경남 하동 청학동 삼신봉(1284m)에서 북쪽으로 올려다보는 천왕봉(1915m) 주능선도 황홀하다. 이곳에서 보는 천왕봉~노고단 주능선은 사철 어느 때 봐도 색다른 맛을 주지만 4월에 선이 가장 뚜렷하다.

    지리산을 45년 동안 1000번 넘게 찾은 정지섬 씨는 이 두 곳 외에 다른 곳도 덧붙여 추천한다. 첫째 경남 산청 웅석봉(1099m)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둘째 지리산 황금능선(구곡산~써리봉 20여km의 동남부 능선)의 경남 산청 국사봉(1037m)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셋째 경남 함양 엄천강 건너 법화산(990m)에서 보는 제석봉 천왕봉 중봉, 넷째 10월 전북 남원 여원재 부근의 도솔암 마당에서 보는 천왕봉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달. 정씨는 “영남에 자리 잡은 천왕봉은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는 맛이 달라지고, 호남 땅에 있는 반야봉은 어디서 봐도 모습이 비슷하고 정겹다. 반야봉은 중년 여인의 펑퍼짐한 엉덩이나 어머니의 젖가슴같이 푸근하다”고 말한다.

    “법화산 포인트는 11월쯤 가야 안성맞춤이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세 봉우리가 목 주름살까지 다 보인다. 목울대가 울컥거리는 착각이 들 정도다. 늦가을 황룡이 꿈틀거리는 황금능선 국사봉에서 보는 천왕봉은‘한국판 큰 바위 얼굴’ 같다. 장쾌하고 헌걸차다. 눈 오는 날 백운산에서 보는 지리산은 눈이 시리고 가슴이 아리다. 능선과 능선 사이,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 묻힌 수많은 인간의 삶과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산꾼들이 말하는 지리산 감상 지점은 보통 사람이 오르기엔 너무 높다. 그렇다. 굳이 힘들여 그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둘레길에서 보는 지리산 봉우리들도 아름답다. 둘레길도 최고 높이가 해발 700m 안팎이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연봉은 더욱 아슴아슴 신비롭다. 산청에서 보는 웅석봉·제석봉·천왕봉, 남원에서 보는 반야봉·삼도봉·토끼봉, 구례에서 보는 왕시루봉·노고단, 함양에서 보는 천왕봉·중봉, 하동 평사리 악양들에서 올려다보는 형제봉 등 지리산 자락도 볼만하다.

    새로 열리는 산청 수철~갈티재 구간

    활활 타는 단풍 밟으며 넉넉한 어머니에게 갑니다

    남명 조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경남 산청의 덕천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다.

    지리산 둘레길 남원 인월~운봉~주천 구간은 우묵배미 분지를 가로지르는 코스다. 운봉고원은 해발 450~580m에 자리 잡은, 움푹 들어간 하늘함지박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큰 배와 같다. 나갈 곳은 여원치(450m), 팔랑치(1010m), 부운치(1115m), 정령치(1172m) 등 큰 고개와 가장마을 쪽에서 인월로 흐르는 시냇물 람천뿐이다.

    남원 매동마을~함양 금계마을 길은 ‘외가 가는 길’이다. 산비탈 계단식 논인 다랑이가 하늘에 걸려 있다. 이곳 사람들은 “다랭이 논”이라 말한다. 느릿느릿 나무늘보처럼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숲길, 논둑, 밭둑길, 농로가 대부분이다.

    함양 의중~동강 길은 숲길이다. 함양과 산청을 잇는 동강~수철 길도 마찬가지. 억새와 시누대(해장죽)숲이 훌쩍 크다. 우렁우렁한 늙은 소나무 숲을 지나고 폭포를 만난다.

    11월에 열리는 산청 수철~갈티재 구간은 어떨까. 35%가 강(경호강, 덕천강) 따라 걷는 길이고 65%가 숲길이다. 강길은 붉은 감나무밭을 지난다. 숲길은 계곡머리를 휘돌아 지나간다. 제법 가파르다.

    산청(山淸)은 ‘산 그리메’ 고을이다. 산 그림자 동네다.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1915m) 아래에 산청이 있다. 천왕봉은 주소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다. 꼭대기의 ‘智異山 天王峰(지리산 천왕봉)’이라고 새겨진 돌 뒤쪽 6m지점까지가 산청 땅이다. 그 다음부터는 함양이다. 한마디로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를 수 있는 곳이 산청이다. 진주에서도 한달음이면 된다. 산이 맑다. 공기도 달다. 강물은 눈이 시리다.

    수철마을은 산청읍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택시 요금도 1만 원 이하. 수철마을이란 이름은 옛날에 무쇠로 솥과 농기구를 만드는 철점이 있어서 ‘수철동’ ‘무쇠점’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마을 매점도 있다. 매점 할머니는 “사람덜이 많이 오니께 참 좋아예! 찐밤, 찐고메(고구마), 찐옥쑤시(옥수수) 좀 사다가 가믄서 먹으라예”라며 활짝 웃는다.

    수철마을에서 대장마을까지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동네는 고즈넉하다. 담장에선 호박고지가 몸을 비비 틀며 마르고, 고샅길 시멘트 바닥에선 벼가 고슬고슬 살갗을 태우고 있다. 아담한 들판이 노랗게 익었다. 해내들, 구매들, 너른들, 번답들, 마정지들…. 들 이름이 정겹다. 농부들은 아침 일찍부터 부산하다. 부부가 탈곡기로 벼를 턴다.

    대장마을에서 성심원까지 7.90km는 경호강을 따라 가는 길이다. 지루하다. 그늘이 없다. 중간에 내리마을(안뜰)이 있다. 그 뒷산이 웅석봉(1099m)이다. 웅석봉은 ‘곰이 떨어진 산’이라 하여 곰석산이라고도 부른다. 대동여지도에는 ‘유산(楡山)’으로 표시돼 있다.

    길은 성심원을 지나 아침재부터 가팔라진다. 아침재는 임도 시멘트 고갯길이다. 무릎에 묵직한 충격이 온다. 하얀 구절초와 연보라 쑥부쟁이 꽃이 지천이다. 아침재~어천마을~운리까지는 호젓한 숲길이다. 운리(雲里)는 탑동, 본동, 원정마을 3개 동네를 통틀어 말한다. 백운계곡은 조선의 유학자 남명 조식의 산책 코스였다. 그는 산천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머리를 식히려면 이곳을 찾아 거닐었다. 그의 글씨 ‘白雲洞(백운동)’ ‘龍門洞天(용문동천)’ ‘嶺南第一泉石(영남제일천석)’ 등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조식은 이 계곡에서 시도 지었다. ‘푸르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

    마근담(摩根潭)계곡은 ‘마의 뿌리처럼 곧은 골짜기’다. 물이 맑다. 나뭇잎이 살짝 붉어졌다. 사리(絲里)는 실골이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늙은 누에가 실을 토하는 형상(老蠶吐絲)’이라서 실골이다. 실골은 감나무 마을이다. 그래서 길도 감 터널길이다. 붉은 감이 주렁주렁 가득하다. 주저리주저리 매달린 가지가 찢어질 듯하다. ‘감 따드립니다. 높이 12m’ 광고판을 붙인 고가사다리차가 눈길을 끈다.

    덕산감은 고종시(高宗枾)다. 고종 황제에게 진상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주장도 있다. 고욤나무와 접목했기 때문에 고종시라고 한다는 설이다. 고종시는 보통 감보다 잘고 씨가 없으며 맛이 달다. 감은 제사상을 차릴 때 ‘조율이시(棗栗梨枾)’로 맨 나중에 놓는다. 대추는 씨가 하나라서 왕을 상징하고, 밤은 한 송이에 세 톨까지 나오니 삼정승을 뜻한다고 하던가. 배는 씨가 6개이므로 육판서를, 감은 씨앗이 8개라 팔도관찰사를 상징하고. 그렇다면 씨가 없는 고종시는 뭘 뜻할까. 마침 고종은 왕보다 높은 황제였다.

    금관가야 구형왕 돌무덤처럼 우직한 사람들

    활활 타는 단풍 밟으며 넉넉한 어머니에게 갑니다

    지리산 둘레길 이정표.

    산청은 가락국 땅이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 재위 521~532)의 능(陵)이 왕산에 있다. ‘전(傳)구형왕릉’이 바로 그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구형왕릉으로 ‘전(傳)’해 내려온다는 것이다. 구형왕은 가락국 10대 왕이자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다. 그는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이곳 왕산에 수정궁을 짓고 살다가 5년 만에 죽었다. 그는 죽을 때 ‘나라를 보존하지 못한 죄인이니 돌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구형왕릉은 비탈땅에 만든 미니 피라미드식의 특이한 돌무덤이다. 산청 사람들은 그곳엔 이끼가 끼지 않고 칡덩굴도 덩굴손을 뻗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새도 앉지 않고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산청 사람들은 우직하다. 소박하다. 구형왕 돌무덤의 돌처럼 울퉁불퉁하지만 변치 않는다. 성철 스님(1912~ 1993)은 산청 단성면 묵곡 출신이다. 그는 스물다섯에 지리산 대원사로 출가했다. 그의 생가 터엔 겁외사(劫外寺)가 있다. ‘시간 밖의 절’이다. 산청도 시간 밖에 있다. 단속사처럼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땅’이다. 산천재처럼 ‘하늘이 산 가운데 있는 곳’이다. 마침 산천재 입구 화살나무 잎이 붉디붉게 물들었다.

    지리산 자락 마을엔 곳곳에 부처가 살고 있다. 칠순 넘은 노인들이 늙은 느티나무처럼 살고 있다. 자식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고 누렁이와 백구만 남았다. 할머니들은 노고단 산신할미처럼 길손들에게 자꾸만 뭘 주지 못해 애가 탄다. 느티나무 나뭇잎은 무려 10만여 장. 할머니들의 사랑은 그보다 더 무성하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

    활활 타는 단풍 밟으며 넉넉한 어머니에게 갑니다

    산청수철~갈티재 구간

    Basic info.

    ☞ 산청수철마을~갈티재 구간별 거리

    수철마을~~지막마을~~대장마을~~산청고교~~내리교~~내리한밭~~바람재~~풍현(성심원)~~어천마을~~헬기장~~점촌마을~~탑동마을~~원정마을~~백운계곡~~마근담계곡~~사리(고마정)~~사리(천평표)~~중태마을~~유점마을~~갈티재

    ☞ 교통

    승용차 | 서울 →경부고속도로 →대전통영고속도로 →산청나들목

    고속버스 | 서울 →진주(진주에서 산청행 버스)

    시외버스 | 서울남부터미널(3시간 소요)

    ※ 산청에서 수철마을까지 버스로 10분 소요. 산청군내버스(055-973-5191), 산청버스터미널(055-972-1616)

    ☞ 먹을거리

    송림산장식당(055-973-6742) | 십전대보오리백숙 / 약초와 버섯골(055-973-4479) | 약초유기한우 샤브샤브, 약초버섯매운탕 / 강변식당(055-973-2346) | 메기찜, 자라탕 전문 / 수풀 林(055-972-4066) | 해물콩나물밥 보쌈, 낙지전복탕

    곶감 | 산청곶감작목회(055-973-0085)

    숙박 | 수철마을 강수성 이장(010-8611-1322)

    문의 | 산청군 산림녹지과(055-970-6900), (사)숲길(055-884-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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