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8

2010.10.18

속 깊고 섬세한 순우리말 ‘걸쌍스럽다’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

  • 이설 기자 snow@donga.com

    입력2010-10-18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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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 깊고 섬세한 순우리말 ‘걸쌍스럽다’

    장승욱 지음/ 하늘연못 펴냄/ 1066쪽/ 2만9000원

    ‘열폭’ ‘레알’ ‘진요’…. 한글로 적힌 낱말인데도 도대체가 이해 불가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 상당수가 두세 줄에 한 번꼴로 흐름이 막힌다. 외래어나 한자어 때문이 아니다. 골칫거리는 바로 인터넷 은어다. 열폭은 ‘열등감 폭주’, 레알은 ‘소름’, 진요는 ‘진실을 요구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런 신조어들은 무시로 업데이트가 이뤄지고 마땅한 규칙이 없는 탓에 의미를 종잡기 힘들다.

    해괴한 신조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순우리말을 정리한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제목은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 대학생 시절부터 우리말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가 ‘새벽 과수원에 나가 도사리를 줍는 마음’으로 잊혀가는 우리말을 수집했다. ‘도사리’는 ‘익는 도중 바람이나 병 때문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 ‘말모이’는 ‘사전(辭典)’이라는 뜻이다. 즉 이 책은 도사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우리말을 집대성한 사전인 셈이다.

    베개 모양의 두툼한 책에는 우리말 2만5000여 개가 빼곡하게 담겼다. 차례만 펼쳐 봐도 얼른 책을 뒤져보고 싶은 호기심이 솟구친다. ‘감투밥과 고깔밥’ ‘심쌀과 웁쌀’ ‘난벌과 든벌’ 등 감이 잡힐 듯 말 듯 한 단어들이 5개 장에 나눠 담겼다. 책장을 넘기면 생소한 낱말 뜻이 감칠맛 나는 문체에 실려 그 정체를 드러낸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말의 친근한 어감과 풍부한 표현에 감탄하게 된다. 우선 ‘먹음새’(음식을 먹는 태도)를 나타낸 말만 해도 ‘걸쌍스럽다’(먹음새가 푸짐해 보기에 탐스럽다), ‘데시기다’(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다), ‘조잔부리’(때를 가리지 않고 군음식을 자꾸 먹는 일), ‘짓먹다’(지나치게 많이 먹다), ‘쩌금거리다’(입맛을 쩍쩍 다시며 맛있게 먹다) 등으로 다채롭다.

    술에 취하는 단계를 나타낸 표현은 섬세하면서도 정취가 가득하다. 얼굴에 차츰 술기운이 오르는 모습은 ‘우럭우럭하다’이며 좀 더 취해 눈시울이 가늘게 처지는 모양은 ‘간잔지런하다’라고 말한다. 딱 알맞은 정도로 취한 상태는 ‘거나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정신이 흐릿해지면 ‘건드레하다’라고 하며 ‘얼근덜근’은 술이 반쯤 취해 건들거린다는 뜻이다.



    결혼 여부에 따라 여성을 표현한 말도 웃음을 준다. 미혼 남자와 같이 사는 과부나 이혼녀는 ‘가지기’, 결혼하고도 처녀 행세를 하는 여성은 ‘되모시’, 숫처녀인 과부는 ‘까막과부’, 때가 지나도 시집을 못 간 노처녀는 ‘떠꺼머리처녀’라 부른다.

    이 밖에 ‘황덕불’(나그네가 추위를 막고 짐승을 쫓기 위해 피우는 불), ‘불꾸러미’(짚이나 잎을 작게 묶은 뭉치에 불씨를 당긴 불), ‘불보라’나 ‘볼소라기’(모닥불이나 화톳불에서 튀기며 쏟아져 내리는 불꽃) 등 불을 나타낸 토박이말도 아름답다.

    책을 읽다 보면 그동안 몰랐던 낱말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되새길 필요를 느끼게 된다. 저자가 여러 국어사전과 용어사전을 들춰가며 이 책을 펴낸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어휘와 표현이 지나치게 단순해지는 것 같다. 어휘는 생각을 하기 위한 자료인데, 어휘력이 빈곤해진다는 것은 생각이 빈곤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다채로운 낱말을 알면 생각이 좀 더 풍부하고 정확해질 것”이라며 우리말이 사라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 사례에서 보듯이 한글은 우리의 으뜸가는 자랑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누리꾼과 대중의 말은 물론, 잡지나 학술지에서도 외래어와 한자어가 점령한 지 오래다. 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 이 책에 실린 순우리말을 하나둘 활용해보자. 세심하고 풍부한 표현만큼 생각이 한 뼘 자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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