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8

2010.10.18

집념으로 ‘날치기 대물’ 낚았다

서초署, 현금 1억원 날치기 오토바이 일당 8개월 만에 검거 … 청각장애인 조직까지 일망타진 개가

  •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입력2010-10-18 09: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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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념으로 ‘날치기 대물’ 낚았다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2010년 1월 22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현금 1억 원이 든 돈가방을 날치기당했다. 범인 2명은 N보안업체 소속 현금수송요원 2명이 고속터미널 내 현금지급기에 돈을 넣으러 가는 것을 보고 오토바이를 이용해 날치기했다. 다급히 수송요원 2명이 뒤쫓았지만 오토바이는 이수교차로 방향으로 사라진 뒤였다. 경찰에게 남은 단서는 흐릿한 폐쇄회로(CC)TV 영상뿐. 이후 경찰은 범인 조모(35) 씨와 김모(38) 씨를 잡을 때까지 오토바이 날치기범으로 위장해 서울을 누벼야 했다.

    현장을 다니며 수사를 했던 형사들은 입을 모아 “단서가 없어 막막했다”고 털어놓았다. 사건 발생 직후 서초경찰서(서장 하상구)는 수사본부를 고속터미널 인근 반포지구대에 설치한 뒤 강력 5개팀 전원을 동원해 수사에 나섰다. 매일 오전 10시에 모여 회의를 한 뒤 흩어져 수사하고, 오후 10시에 다시 모여 수사 성과를 보고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현장 주변 오토바이 도주로를 따라 설치된 CCTV를 샅샅이 판독했다. 흐릿한 오토바이 영상은 오토바이 동호회 사람들의 힘을 빌려 혼다 CB400 기종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전국에 등록된 CB400은 600여 대. 일일이 찾아다니며 소유자들의 알리바이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N보안업체 전 직원, 동일수법 전과자 900여 명의 인적 사항까지 파악해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실마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단서 없어 벽에 부딪힌 수사

    수사에 진척이 없는 가운데 서초서는 2월 23일 경기 용인시에서 8300만 원을 턴 청각장애인 일당이 나흘 만에 검거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 달이 넘도록 용의자도 밝혀내지 못한 서초서에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서초서는 비난을 뒤로하고 이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청각장애인 날치기 조직의 범행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기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형사들은 용인에서 검거된 일당을 시작으로 청각장애인 조직에 접근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청각장애인들은 비장애인에게 배타적이라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삼고초려하는 마음으로 여러 번 찾아가고 사비를 털어 술을 사고 함께 당구도 치면서 한 명 한 명 관계를 만들어갔다. 친분이 쌓인 청각장애인이 늘자 곧 청각장애인 조직들의 실체가 파악됐다. 누가 돈을 모아 성형수술을 했다, 명품 가방을 샀다, 술집에서 돈을 뿌렸다는 소문도 놓치지 않았다. 이를 통해 3월 20일 인천 계양구 작전동 1억5000만 원 날치기 사건 검거를 시작으로 62회에 걸쳐 9억 원 상당의 금품을 절취한 청각장애인 날치기범 16명을 검거했다. 수화를 잘하는 사람을 구해 통역까지 맡기며 수사를 진행한 성과였다.



    청각장애인 조직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은 날치기 수법에 대해서도 박사가 됐다. 강력2팀 김건 형사는 “서울, 경기지역 날치기 사건과 관련된 모든 CCTV를 보다시피 했다. 하나하나 퍼즐을 맞추는 심정으로 오토바이 날치기 조직과 수법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고 말했다. 청각장애인 조직은 보통 4명으로 구성된다. ‘찍새’는 은행에서 큰돈을 인출하는 피해자를 골라 밖에서 대기하는 ‘치기’에게 수화로 알린다. ‘운전’이 ‘치기’를 오토바이 뒤에 태워 피해자에게 접근하면 ‘치기’가 가방을 낚아채는 방식이다. 남은 한 명은 준비한 차량에 ‘찍새’를 태워 약속한 장소로 이동한다. ‘찍새’가 먼저 간 ‘운전’과 ‘치기’를 믿지 못해 다른 한 명을 두는 것이다.

    집념으로 ‘날치기 대물’ 낚았다
    청각장애인 날치기 조직이 늘어난 것은 그들의 신체적 특징을 범죄에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화로 먼 거리에서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소리에 둔감해 시속 150~200km로 오토바이를 운전하면서도 공포감을 적게 느낀다. 범행 수법도 진화했다. 출금하는 사람뿐 아니라 자주 입금하는 사람까지 파악해 범행 대상으로 삼거나, 출금한 사람이 차량을 타고 이동하면 집요하게 쫓아가 차량에서 내리는 순간 돈을 채가기도 했다.

    그러나 서초서 강력계 형사들이 청각장애인 조직을 일망타진했음에도 정작 고속터미널 사건의 용의자는 찾지 못했다. 박성주 형사과장은 “청각장애인들의 수법과 비교할 때 고속터미널 사건의 범행 수법은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비장애인 조직의 소행이라 확신하고 수사의 방향을 틀었다”고 말했다. 일단 고속터미널 사건의 범인들이 탄 오토바이에는 백미러가 장착되지 않았다. 청각장애인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 시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백미러가 필수다. 비장애인 날치기 조직은 보통 2명이란 점 등도 확신을 더했다. 비장애인 조직들은 ‘찍새’를 두지 않는다. 여기에 탐문수사 중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했다. 돈이 몰리는 곳에는 날치기 조직도 모여들게 마련이라 서로가 서로를 목격하기도 했던 것. 사건 발생 5개월 만인 6월에 유력한 용의자를 보았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피해자들 안타까운 사연

    6월, 사건을 전담한 강력2팀 형사들은 오토바이 날치기 조직으로 위장하기로 했다. 수사를 하며 쌓은 노하우로 검은 헬멧에 짙은 점퍼까지 착용해 완벽히 날치기범으로 변신했다. 범인과 똑같은 CB400 오토바이도 마련했다. 형사 2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강남 일대와 용산전자상가 주변을 누볐다. 간혹 진짜 날치기범으로 오인받아 검문을 받기도 했다. 2팀 형사들은 “폭염 속에 아스팔트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루 반나절씩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누비고 나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여기에 민생침해사범 집중단속기간과 겹쳐 다른 수사도 맡으면서 형사들의 체력은 점점 고갈돼갔다.

    하지만 노력은 형사들을 배반하지 않았다. 8월 9일 드디어 범인의 실체를 파악했다. 용산전자상가에서 날치기를 한 뒤 도주하는 범인을 목격한 것이다. 형사들은 한 달을 더 뙤약볕 아래서 오토바이를 타고 용산전자상가 곳곳을 다닌 끝에 9월 13일 날치기를 하려고 준비 중인 범인 조씨를 검거했다. 하지만 조씨는 같은 오토바이를 타고 같은 옷을 입었음에도 범행을 완강히 부인해 풀려났다. 그러나 경찰은 조씨가 3월 4일 13회에 걸쳐 현금 4750만 원을 현금CD기로 입금한 사실을 알아내 재검거할 수 있었다. 이후 조씨의 자백으로 공범 김씨도 10월 11일 검거했다. 임정일 강력2팀장은 “단서도 없이 막막하게 시작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범인을 검거했다”고 말했다.

    서초서는 고속터미널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청각장애인, 비장애인 날치기 조직을 일망타진했다. 서초서의 수사 덕분인지 서울, 경기 지역에서는 날치기 사건이 횡행하는 추석 때도 불미스러운 일이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의 성과는 날치기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달래주었다. 피해자 중에는 회사 돈을 날치기당해 월급으로 갚아가야 했던 경리사원도 있었고, 한 달 살아야 할 월세를 들고 가다 빼앗긴 서민도 있었다. 헌금 5000여만 원을 입금하러 갔다 잃어버린 경기 부천의 한 교회 전도사는 강력2팀에게 이렇게 고마움을 전했다.

    “돈을 잃어버린 사실보다 신도들로부터 자작극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 죽을 만큼 괴로웠다. 진범이 잡혀 혐의를 벗어서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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