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5

2010.07.12

싸리나무 보라색 꽃망울아 한 많은 단종 뒷모습 아는가

원주 싸리치 옛길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0-07-12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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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리나무 보라색 꽃망울아 한  많은 단종 뒷모습 아는가

    우거진 소나무숲 사이로 구불구불 난 자갈길을 걷는다 .

    만 열여섯 살 단종은 한양을 떠나야 했다. 숙부 수양대군은 2년 전 조카의 왕좌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1457년 그를 연고도 없는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6월 따가운 볕이 내리쬐는 길이 아스라했다. 금부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 명이 그를 호송했다. 유배지까지 700리 험한 길. 한 많은 길에는 굽이굽이 이야기도 많다. 어린 단종이 “아이고, 다리야” 했다는 제천 다릿재, 고개 이름을 묻는 단종에게 왕방연이 “이 고개는 임금이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이옵니다”라고 즉석에서 대답한 것이 이름으로 굳었다는 영월 군등치. 단종이 서산에 기우는 해를 향해 절을 한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신천면사무소와 남면 북쌍리 사이의 배일치(拜日峙). 그리고 원주에서 영월로 가는 관문, 싸리치 옛길에도 단종의 한이 서려 있다.

    운 좋게 만난 ‘싸리치 지킴이’

    싸리치 옛길은 원주시 신림과 황둔을 잇던 길로 옛사람들은 소금, 생선, 생필품을 지고 서울과 영월을 오갔다. 영월 출신 김삿갓도 이 길을 통해 한양을 다녔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측량해 넓힌 영월, 원주 간 유일한 신작로였으며 1990년 새로운 길이 생기기 전까지는 버스도 다닐 정도로 활발히 이용했던 길이다. 폐도(廢道)가 된 뒤 나무만 무성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2002년 9월 새로 단장해 4.5km, 왕복 2, 3시간 코스의 걷기 좋은 길로 재탄생했다. 장마 들머리에 선 7월 첫 주말, 싸리치 옛길을 찾았다.

    길에 들어서기 전부터 행운이 따랐다.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하다 싸리치 옛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록한 블로그(blog. daum.net/chiakmtb)를 찾은 것. 블로그의 주인은 원주 신림초등학교 김래옥 교장과 원주 구곡초등학교 박광춘 교감 부부. 두 사람은 일요일 낮, 일면식도 없는 기자를 원주터미널까지 마중 나와 반겨주었다.

    “서울에서 온 아가씨가 좋은 길을 걷는다는데, 함께해줘야지.”



    두 사람의 함박웃음에 마음까지 넉넉해졌다. 원주에서 신림까지는 고속도로로 20분 거리. 버스도 30분~1시간에 1대꼴로 다닌다. 신림IC를 통과한 뒤 오른쪽으로 꺾어 500m쯤 더 가면 명성교회 수련원 인근에서 ‘싸리치 옛길’ 표지판을 찾을 수 있다. 김 교장은 주변 농장, 식당, 회사 표지판과 나란히 싸리치 옛길 표지판이 있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우리 소중한 싸리치 옛길이랑 저런 것들이 가치가 같나요? 싸리치 옛길 표지판을 더 크고 멋있게 써야 마땅하지요.”

    구불구불 폭신폭신 신나는 길 걷기

    싸리나무 보라색 꽃망울아 한  많은 단종 뒷모습 아는가

    치악산과 검악산에서 만나 흘러온 약수는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싸리치 옛길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 하나 없다. 더불어 나무나 꽃 이름을 소개하는 팻말, 길에 서린 역사 등을 알려주는 팻말이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아쉬웠다. 다행히 2013년까지 강원도가 ‘산소(02)길·자전거길 강원 3000리’ 사업의 일환으로 4.5km를 정비해 ‘이야기가 있는 길’로 재탄생시킨다니 기대해볼 수밖에.

    비포장도로에 하얀 자갈이 사이좋게 뒹굴었다. 비가 온 지 얼마 안 돼 땅은 폭신폭신, 이 흙길에 놓인 자갈이 자박자박 듣기 좋은 울림을 만들었다. 싸리치 옛길의 특징이자 장점은 갈림길 없는 한길이라는 것. ‘이 길일까 아닐까?’ 고민하거나 지도를 찾아볼 일 없이, 길이 난 대로 걷기만 하면 된다. 길은 곧게 나가다 지루할 때쯤 산을 휘감으며 구부러진다. 경사는 대부분 완만해 오르는 길도, 내려가는 길도 전혀 부담이 없다. 연로하신 동네 분들도 운동 삼아 지팡이 짚고 오르락내리락할 정도. 우거진 나무숲이 만들어준 음지와 뻥 뚫려 햇살을 제대로 받는 양지가 번갈아 나와 지칠 새가 없다.

    5km 남짓, 완만한 경사에 울퉁불퉁한 자갈길은 산악자전거(MTB) 마니아들에게 인기다. 전문가들에겐 조금 싱거울 수 있지만 초보자에겐 안성맞춤 코스. 김 교장 역시 최근 MTB에 푹 빠졌다며 ‘MTB 예찬’을 했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적당히 굽이치는 길을 씽씽 달리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한 20분 걸었을까. 목덜미에 살짝 땀이 배어나오는데 ‘콸콸콸’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바위를 손으로 짚으며 조심조심 들어가니 보물처럼 계곡 하나가 나타났다. 크지 않은 계곡이지만 손을 씻으며 땀을 식히기엔 그만. 손을 담갔더니 1분도 안 돼 팔뚝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물이 찼다. 게다가 바닥의 돌멩이 모양이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맑았다. 주변 검악산, 치악산에서 내려온 이 물에는 1급수에서만 산다는 버들치도 있단다. 아토피 피부염이 있는 아이들이 이 물로 씻으면 금세 낫는단다. 계곡 근처에 나무 탁자와 의자가 있어 잠시 쉬었다 일어서니, 구름도 쉬어 간다는 높은 고개도 쉬지 않고 지날 수 있을 만큼 힘이 솟았다.

    다시 길을 재촉했다. 길에는 새침한 주홍빛 나리, 수더분한 흰 꽃잎의 망초, 화려한 보랏빛 패랭이 등 다양한 한국 야생화가 피었다. 앞서 걷던 김 교장 부부는 연신 감탄하며 새로운 꽃을 알려주었다. 박 교감이 새색시처럼 웃으며 말했다.

    “가을엔 아카시아 나무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코가 마비될 정도예요. 이끼 하나도 얼마나 탐스럽게 나는지. 이 길을 걸은 지 3년째인데 아직도 처음 보는 꽃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30여 년 전, 초등학교 재직 시 처녀 총각 선생님으로 만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은퇴 후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자 싸리치 옛길 초입 농바우골에 좋은 집터를 잡아놓았다. 그러고 매주 와서 오이, 호박, 고추 등을 기르고 이 길을 걷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정스레 걷는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바쁜 서울에선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마음이다.

    싸리나무 보라색 꽃망울아 한  많은 단종 뒷모습 아는가

    망초, 까치수염, 패랭이, 우산나물 등 갖가지 야생화가 길을 꾸민다(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나리·망초·패랭이 … 야생초 지천

    이 길에는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이들의 한도 서려 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다 경북 영주시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이 조카 단종의 복위를 위해 보낸 밀사들이 목숨을 걸고 이 길을 통해 영월의 단종에게 갔던 것. 하지만 얼마 안 돼 복위운동이 발각됐고, 가담한 인물은 모두 학살됐다. 단종 역시 유배 4개월 만에 사약을 받았다. 어린 단종은 이 길을 걸어 한양으로 얼마나 가고 싶었을까, 그의 서러운 마음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길을 나선 지 1시간 20분쯤 됐을까. 싸리치 옛길 정상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전용찬 씨가 지은 ‘싸리치’라는 시가 늠름한 바위에 새겨 있다.

    “산굽이 돌아돌아 골짜기마다/ 싸리나무가 지천이어/ 싸리치라네// 마디마디 거칠어진 손길로/ 서러움 쓸어내던 싸리 빗자루/ 그 사연 모여/ 보라 꽃으로 피어나는가//(이하 생략)”

    이 길은 줄기가 곧고 가지가 많은 싸리나무의 이름을 땄다. 이 나무는 싸리비, 도리깨, 복주머니 등을 만들 수 있는 유용한 나무다. 보랏빛 꽃이 초여름에 핀다는데, 일찍이 내린 비 때문인지 색 바랜 꽃잎들이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있었다. 군데군데 늘어진 꽃망울을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꼭 싸리꽃이 만개했을 때 다시 오겠다’ 다짐하며.

    정상에서 온 길로 되돌아와도 되고, 길을 이어가 신림터널 쪽으로 가도 된다. 신림터널로 나가면 가톨릭 신자들에게 성지로 꼽히는 용소막 성당이나 양양 현북면의 명주사, 치악산도 갈 수 있다. 명주사에서는 티베트, 인도, 네팔 등 동양 각국의 고판화 자료를 전시하는 고판화 박물관이 자리해 아이들 교육에 그만이다.

    일행은 되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분명히 지나갔던 길인데 내려오는 길은 또 다르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산딸기, 우산나물, 할미꽃 등이 오밀조밀 모였다. 오른쪽에 늠름한 치악산과 하얗게 피어난 안개가 어우러진 절경이 펼쳐졌다. 강원도 길을 걷는 매력은 저 신비하고도 오묘한 어울림을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내려오는 길은 훨씬 빠르다. 길이 끝난 아쉬움도 잠시. 김 교장 댁에 가서 직접 기른 애호박과 부추, 청양 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 부침개를 부쳐 먹었다. 간장을 찍지 않아도 간이 딱 맞는 웰빙 ‘부치기’와 치악산 맑은 물로 빚은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자 절로 ‘캬~’ 소리가 났다. 어둑어둑 해는 지고 다시 서울로 돌아갈 시간.

    “농바우골 평생 이용권을 줄 테니 휴가 때 꼭 오세요!”

    넉넉한 인심에 코끝이 찡. 이 길 넘어 한양 가던 김삿갓의 발걸음도 이토록 무거웠을까.

    Basic info.

    ☞ 교통편

    대중교통 원주 중앙시장(원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차로 5분 거리) 앞에서 23, 24, 25번 버스 탑승→신림면 명성교회 수련원 앞 하차(첫차 06:50, 총 11회 운행)→싸리치 옛길 표지판.

    자가용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 통과→중앙고속도로 신림IC 통과→우회전→500m 직진→싸리치 옛길 표지판(참조 원주대중교통안내정보시스템 traffic. wonjucity. net).

    ☞ 참고

    2009년 6월부터 2012년 5월 말까지 싸리치 계곡에 한해 자연보호를 위한 자연 휴식년 실시. 입차, 취사, 야영, 야유회 등 금지, 위반 시 20만 원 이하 과태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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