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5

2010.07.12

3명 왕후 7명 후궁 거느렸지만 홀로 안장에 도굴 수모

중종의 정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7-12 13: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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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명 왕후 7명 후궁 거느렸지만 홀로 안장에 도굴 수모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의 아픔을 잊고 현란한 도심을 지키는 중종의 능침.

    정릉(靖陵)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 1488~1544)의 능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에 있다. 조선 왕릉으로는 드물게 왕의 무덤만 단출하게 있는 단릉 형식인데,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아들로 계비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태어나 휘는 역()이요, 자는 낙천(樂天)이다. 1494년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다가 1506년 연산군의 폐위로 제11대 왕으로 추대됐다. 중종의 이복형인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을 조영하다 생모가 폐비된 사실을 알고 폭군으로 돌변했다. 결국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중종은 38년 2개월간 재위하면서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문벌세도가들의 권력을 누르고자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조광조 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등용,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으나 당파싸움을 종식하지는 못했다.

    1544년 11월 15일 중종은 죽음이 임박하자 마지막으로 폐위된 왕비 신씨(단경왕후)를 찾았다. 신씨는 왕비에 책봉되자마자 당쟁으로 7일 만에 폐위된 불운한 왕비였다. 신씨를 만난 뒤 중종은 유시(酉時·오후 7~9시)에 환경전에서 승하했다.

    문정왕후의 압력으로 강 건너 천장



    중종 사후 맏아들 인종(仁宗, 1515~1545·중종의 제1 계비 장경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중종의 비 문정왕후는 사왕(嗣王·신임 왕) 인종이 병약하다는 이유로 내전에서 나와 의주(儀註·가례 서적)를 들여오게 하고 찬궁(宮·장례식까지 빈전 안에 임금의 관을 놓아두던 곳)을 내전 깊숙한 통명전에 설치하게 하는 등 남편의 국장을 주도했다. 심지어 재궁(梓宮·관)도 115번 옻칠한 것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신하들은 ‘예의 문란함’을 지적하며 문정왕후를 성토했다. 문정왕후의 주도적이고 독단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종의 능은 오늘날 경기도 고양 서삼릉(西三陵) 능역에 있는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禧陵)에 동원이강으로 모시고, 능호를 정릉이라 고쳤다. 처음에는 시호를 국가 중흥의 공이 크다 하여 중조(中祖)로 하고자 했으나 폐왕 연산이 아니라 성종의 대를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종으로 결정했다.

    인종은 중종이 위독할 때 늘 먼저 약을 맛보고, 잠자리를 살피는 등 효성이 지극했지만 병약했다. 결국 능역 조영 한 달 후 배알을 했지만 재임 8개월 만에 31세로 승하했다. 인종은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기록하고, 아버지 중종의 능 옆에 안장됐다.

    인종의 뒤를 이어 동생 명종(明宗·중종의 제2 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중종이 묻힌 정릉 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일찍이 세조가 며느리 장순왕후의 공릉 터를 잡으면서 이 땅을 직접 보고 좋지 않다 했고, 당대 최고의 풍수가인 임원준도 불길하다고 했음을 이유로 정릉을 천장했다. 옮긴 곳이 오늘날 서울 강남구 삼성동이다.

    이때 문정왕후의 압력에 못 이겨 명종이 억지로 능을 옮긴 것에 대해 백성이 한탄했다고 한다. 제2 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사후 남편과 같은 유택에 묻히고자, 억지로 장경왕후의 희릉과 아들 인종의 효릉으로부터 강을 건너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옮겼다는 것이다. 이때 애달픔이 사림의 울음으로 변했고, 밤이면 경기도 고양에 있는 희릉 숲 속의 울음소리가 한강 건너 정릉까지 이르렀으며, 안개가 세 능을 감싸고 구름 속을 떠다녔다고 한다. 모두 정릉의 천장을 슬퍼하는 이야기다. 사림들은 “고금을 막론하고 유명을 달리한 남편의 무덤을 옮겨 전처의 무덤과 멀리 떨어지게 하는 투기는 듣지 못했다”며 문정왕후를 비꼬았다.

    3명 왕후 7명 후궁 거느렸지만 홀로 안장에 도굴 수모

    문정왕후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강을 건너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온 중종의 정릉.

    천장을 할 때 한강을 건너는 데 비협조적이었던 수원 목사가 하옥되고 경기 감사는 파직됐으며, 선창(船槍)들도 협조하지 않아 벌을 받는 이가 속출했다. 그러나 사림과 중신들의 반대에도 중종의 능은 1562년 8월 22일 문정왕후와 봉은사 주지 보우가 은밀히 계획해 봉은사 곁으로 옮겼다. 구릉 터가 득수득파(得水得破)가 좋지 않아 옮긴다는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문정왕후 후손의 번영을 위한 신후지계(身後之計·죽은 뒤 자손을 위한 계획)였다. 천장 후 문정왕후가 선릉과 정릉에 친제를 행하려 하나 조정에서 후비 단독으로는 할 수 없다 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옥체 훼손 변고

    중종의 능을 어렵게 옮겼으나 지세가 낮아 장마 때마다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됐다. 3년 내 변고가 두 번이나 일어나자 명종은 또다시 천장을 하려 하나 이루지 못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으나 정릉이 물이 차고 변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태릉(泰陵)에 안장됐다. 중종은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을 거느렸으나, 죽어서는 홀로 안장돼 조선 역대 왕 중 태조의 건원릉과 함께 단 둘뿐인 단릉이 되고 말았다.

    정릉의 상설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과 장경왕후의 희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른다. 석양과 석호의 자세는 선릉과 비슷한데 세부적인 표현에서 좀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 이상일 만큼 크고,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임진왜란 당시 수난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주변 지역은 1970년대에 집중 개발되면서 고층 빌딩이 들어서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세계문화유산 실사자도 빌딩 숲과 야경을 보고 감탄했다. 선·정릉은 특별히 저녁 9시까지 개장해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조선 왕릉은 오랜 세월을 이어온 한국인의 자연관과 장례문화, 40기의 왕릉을 보존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다른 나라 왕릉 관리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왕릉 관리의 어려움으로 도굴을 꼽는다. 세계 학자들도 우리나라 왕릉에 대해 이 문제를 많이 염려했다. 그러나 조선 왕릉은 능역 조영 간소화와 회격실 구조 덕분에 지금까지도 온전히 보존됐음을 확인하고 우리의 보존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곳 선·정릉만은 예외다.

    1593년 4월 13일 선조 일행이 평안도 가산을 출발해 박천(博川), 안주(安州)에 도착했다. 왜군이 쳐들어와 임란 중이었다. 경기좌도관찰사 성영(成泳)이 선릉과 정릉이 파헤쳐져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다고 보고하면서 속히 경성을 수복하자고 했다. 1592년 8월 태릉과 강릉도 왜적 50명과 동원병 50여 명이 도굴하려 했으나 회격이 단단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선·정릉은 왜군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선조의 증조부모(선릉)와 조부모(정릉과 태릉) 등 직전 조상의 유택이 파헤쳐진 것이다. 전쟁 통에 일어난 변고라 조정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선릉 왕의 능침과 왕비 능침은 광중에 불이 나서 전소됐고, 정릉 현궁은 소실돼 훼손되고 소실되지 않은 옥체가 있어 중종의 옥체인지 가리고자 중종 때 신하와 궁인들을 동원해 확인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미확인 옥체는 관에 넣어 깨끗한 곳에 묻었다. 그리고 성종과 정현왕후, 중종의 유골은 소실된 유회와 재흙을 수습해 각각의 현궁에 봉안했다. 소실된 지석과 옥책은 전주 사고의 실록을 보고 재작성했다. 기록으로 남긴 사고의 중요성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정왕후의 투기와 법석으로 천장을 하고 병풍석을 둘러친 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타는 변고를 겪었다. 만약 세조의 유시대로 회격실로 조영하고 난간석을 설치했다면 어땠을까? 때늦은 유감일 뿐이다.

    정릉은 조선시대 왕릉 중 바로 옆의 선릉과 더불어 유일하게 도굴됐다. 특히 중종의 정릉은 천장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문정왕후가 정성 들여 만든 능원이라 대단히 견고한데도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광주목사는 하옥되고 경기관찰사는 파직됐다. 변고 후 정릉을 옛 터(고양)로 다시 옮기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현장에 재봉안했다.

    3명 왕후 7명 후궁 거느렸지만 홀로 안장에 도굴 수모

    1 많은 개발압력에도 도심을 지켜온 조선 왕릉은 역사경관림으로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2 정릉의 석호는 퉁방울눈이 특이하다. 이전 석호와는 다른 형태의 조각이다. 3 임진왜란의 수난을 겪고 500여 년을 지켜온 중종 정릉의 문석인은 할 말이 많은 듯하다.

    정릉 능침사찰 봉은사에서 두부 만들어

    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는 794년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후 1498년(연산군 4년)에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개칭했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국가 통치철학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택했으나, 정작 능원을 조영할 때 선왕의 안식과 왕권의 영원성을 위해 사찰을 지었다. 이것이 능침사찰이다. 능침사찰은 조선 초기에는 능원마다 한 곳 이상씩 두었다. 태조 건원릉의 개경사, 신덕왕후 정릉의 흥천사,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의 신륵사, 세조와 정희왕후 광릉의 봉선사가 대표적이다. 특히 중종 때 문정왕후는 정릉을 삼성동으로 천장하고 두부를 만든다는 이유를 대서 봉은사를 중건하고 번성케 했다. 이때 봉은사 주지 스님을 병조판서에 앉히고, 조선시대 내내 시행하지 않던 승과시험을 부활했다. 그리고 승과시험을 봉은사 앞에서 행하기도 했다. 능침사찰은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造泡寺)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능원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두부는 스님 두 분이 만든다. 제례물 중 두부가 쉽게 변질, 부패해 능원 근처의 스님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은 3명의 왕비와 7명의 후궁에게서 9남 11녀를 두었다. 정비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고, 그의 고모와 아버지가 연산군과 관련돼 폐위됐다가 영조 때 복위돼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중종의 제1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1506년 후궁으로 들어와 1507년 왕비가 됐다. 1515년 세자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25세에 승하해 능호를 희릉이라 하고,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지역에 묻혔다. 제2 계비 문정왕후의 무덤은 능호가 태릉이며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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