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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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지와 장판에 프탈레이트 범벅?

눈병, 신장 손상, 내분비계 교란 유발 환경호르몬 … 실내공기 오염원 종합연구 필요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9-11-05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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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지와 장판에 프탈레이트 범벅?

    서울의 한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장판과 벽지들.(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김서령(35) 씨는 한겨울이 돼야 보일러를 켠다. 보일러를 켜면 딸 민서(가명·5)가 온몸을 긁거나 잔기침을 하기 때문이다. 눈도 뻑뻑하다고 해 안약은 가정상비약이 됐다. 처음엔 흔한 아토피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다 화들짝 놀란 김씨는 민서 방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딸이 가장 좋아하는 ‘삑삑이 오리’와 공룡 장난감을 내다버렸다. 주말에는 아이 방에 세라믹 황토 페인트를 칠하기로 했다. 아끼는 장난감을 빼앗긴 민서는 그날 종일 울고불고 난리였지만, 김씨는 민서를 괴롭히던 주범을 이제야 잡을 수 있게 됐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생활 곳곳에서 사용 …‘완벽 차단’은 거의 불가능

    “미니 완구에서 기준치의 90배가 넘는 프탈레이트가 검출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 프탈레이트가 장판과 벽지에도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미심쩍은 장난감은 버리고, 벽지는 세라믹 황토 페인트로 바꿔보려고요.”

    민서를 피실험자로 한 김씨의 ‘임상실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세제, 필통, 장판, 점토완구, 물놀이 매트, 인조가죽, 신발, 빨대 등 프탈레이트계 가소재(이하 프탈레이트)는 우리 생활 곳곳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완벽하게 ‘차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프탈레이트의 위해성을 인식하는 국민도 많지 않다. 프탈레이트는 눈병, 구토, 신장 손상, 생식 저해, 내분비계 교란 등을 일으키는 환경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스틱은 고분자화합물이라 그 자체는 딱딱하기 때문에 이를 상품화하려면 부드럽게 해주는 첨가물이 필요하다. 프탈레이트는 이 플라스틱 중에서도 폴리염화비닐(PVC)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소제로 디에틸헥실프탈레이트(DEHP), 디부틸프탈레이트(DBP), 부틸벤질프탈레이트(BBP), 디이소노닐프탈레이트(DINP) 등이 있다. 문제는 이 물질이 공기 중에 떠다니거나 제품에 함유돼 있으면 호흡이나 피부 접촉 등으로 몸에 들어온다는 것.

    때문에 EU(유럽연합)는 프탈레이트 중 DEHP와 DBP, BBP 3종을 ‘카테고리 2’로 분류해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카테고리 2는 수정능력을 손상시키거나 태아에 유해할 수 있는 물질이란 의미다. EU는 2007년 1월부터 14세 이하 모든 어린이용품에 이들 3종의 사용을 금지했고, 궁극적으로는 EU 시장에서 퇴출시킨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2월10일 이후 제조된 어린이용품이 0.1% 이상 프탈레이트를 함유할 경우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최근 프탈레이트 3종(DEHP, DBP, BBP)이 내분비계의 장애원인이자 간, 신장 등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며 유독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또 어린이용품 중 0.1% 이상 함유된 제품의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 국내 완구 및 육아용품 중 이 가소제를 사용하는 제품 시장은 연간 34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정부에서는 지정 관리하고 있다지만 우리 주변에는 프탈레이트가 함유된 제품이 넘쳐난다.

    환경부가 지난해 장난감과 유아용품 170개 제품을 대상으로 위해성 조사를 한 결과 유아용 완구(딸랑이, 삑삑이)와 동물인형에서 DEHP, DBP, DINP 3종이 허용량 이상 검출됐고, 한 환경단체가 9월 학교 앞 미니 완구제품 13개를 분석한 결과 4개 제품에서 DEHP 함유량이 1일 섭취 허용량(TDI·평생 매일 섭취해도 건강에 영향이 나타나지 않는 노출량)의 최대 90배까지 검출되기도 했다.

    문제는 소비자들이 장난감을 고를 때 프탈레이트가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지 않거나, 사준다면 제품정보가 명확히 표시돼 있고 KPS(자율안전 확인표시), KC(국가통합인증) 마크 등 인증표시가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게 현재로선 최선이다.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은 보행기와 유모차, 학용품 등에 대해 프탈레이트 사용을 규제하는 법안을 입안예고 중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실내 공기로 흡입하는 프탈레이트의 양을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 장난감이나 학용품은 ‘알고 당한다’ 쳐도 장판, 벽지에서 뿜어나오는 공기 중 물질은 자신도 모르게 몸에 들어온다. 2005년 한국실내환경학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내장마감재가 차지하는 실내 표면적(106m2 기준)은 벽지 146㎡(39.9%), 바닥(마루·장판) 77.6㎡(21.2%), 가구 45.9㎡, 시트지(래핑) 42.1㎡(11.5%). 한국 가정의 공기 질은 벽지와 바닥 마감재가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유일무이한 ‘온돌문화’를 자랑하면서도 PVC 비닐벽지(일명 실크벽지)와 장판에서 뿜어나오는 프탈레이트에 대한 연구 및 규제는 전무하다.

    심각성을 추측해볼 수 있는 연구결과가 있다. 지난해 4월 환경부가 발표한 위해성 평가에서는 어린이가 성인보다 프탈레이트 1일 노출량이 1.4~22배 높게 나타났다. 가정·학교 등의 실내 공기와 먼지, 음식, 음용수 등 9종의 시료를 분석해 1일 평균노출량(㎍/kg/day)을 조사한 결과인데, 아동(6세 이하)이 1800~1만2800㎍으로 직장인(1700~6600㎍)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이 중 벽지와 장판을 통해 피부로 들어오는 경피노출량은 성인 26~520㎍, 아동 94~1880㎍으로 집에서 많이 생활하는 아동의 노출량이 훨씬 높았다.

    겨울철 바닥 온도 높일 때 뿜어져 나올 우려 커

    환경부는 “벽지와 장판을 통한 경피노출량은 실내 환경의 주요 프탈레이트 노출원으로 추정된다. 아동의 경우 개인용품과 실내바닥재 등 제품을 통한 노출 비중이 높아 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겨울철에 실내 온도를 25℃가량으로 유지하려면 바닥 온도는 40℃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 경우 장판과 벽지에서 뿜어나오는 프탈레이트 양에 대한 연구도 없다. 다음은 한 대학교수의 말이다.

    “EU 등 선진국에서 가소제에 ‘문제 있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그때서야 여론을 봐가며 (규제를 하는 등) 따라간다. 만약 선진국이 벽지와 장판의 위험성을 주장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에선 벽지와 장판을 거의 안 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규제해야 한다. 장판과 벽지를 확인하기 전에는 자녀에게 원목 장난감을 사줬다고 안심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정부의 생각은 어떨까. 환경부 관계자는 “(벽지와 장판은) 딱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용품으로 보기 어려워 (규제를 위한) 마땅한 법적 근거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다. 아직 위해성 논란도 많다.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에서 관리품목으로 정해 제조 때부터 규제하는 게 방법”이라고 말했다. 품질경영 및 공산품 안전관리법(품공법)에 따라 기술표준원은 91개 품목의 안전성을 규제하고 있지만 장판은 종이장판에 한한다.

    PVC 장판은 규제 품목 대상이 아니어서 당장 규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술표준원 관계자는 “프탈레이트 중 4종이 유해하다고 밝혀진 만큼 관리 품목에 PVC 장판을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겠다. 식품의약품안전청, 환경부 등 관련 부처와 협의해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성균관대 약학부 이병무 교수는 “동물실험 결과 프탈레이트는 정자 수와 남성호르몬을 감소시키고 (간암을 일으켜) 장기 무게를 변하게 했다.

    아직은 세포실험 등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인이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지만, 어린이를 위해서라도 ‘새집증후군’ 등과 함께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계적으로 아토피 증상이 줄고 있지만 유독 한·중·일 3국에서 아동 환자가 증가하는 현상은 어쩌면 바닥과 장판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민서의 올해 겨울나기가 걱정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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