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4

2009.09.22

약자엔 비둘기, 강자엔 호랑이

전한 무제 때 원고생, 직언일철 명성 … 정운찬 총리 내정자 본보기 삼을 만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09-16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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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자엔 비둘기, 강자엔 호랑이

    한무제는 주변의 모략에도 고령의 원고생을 중용했고, 원고생은 직언일철로 임금을 보필했다. 사진은 최근 HCN 미디어 CHING을 통해 방영된 드라마 ‘한무제’ 포스터.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의 ‘세종시 계획 수정 불가피’ 발언을 놓고 야당은 “권력의 단맛을 보려는 욕심에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얄팍한 행태”라고 주장하며 자진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또 다른 야당은 인사청문회를 벼르고 있다.

    ‘곡학아세’는 ‘사기(史記)’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 제61을 펼치면 나오는데, 옳지 못한 학문을 하여 세속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자세라고 꼬집는다. 그런데 ‘곡학’도 언뜻 보면 정도(正道)와 같아 마치 도척(盜蹠)이 공자(孔子)의 말을 흉내 냄과 같다. 도척은 춘추시대의 대도적으로 수천명의 도적을 거느리고 천하를 발호(跋扈)하며 인명을 살생하고 재물을 탈취한 무뢰한인데도 유유히 부귀공명을 누리다가 제 명(命)에 죽었다.

    사마천(司馬遷)도 바로 이러한 사실에 경악해 개탄한 것이다. 그가 대규모 강도짓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길 때마다 먼저 ‘용(勇)’을 뇌까리고 마지막에는 ‘의(義)’를 소리쳤다고 하니, 공자와 맹자가 가르친 ‘용’과 ‘의’가 본다면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상모략 극복 ‘삼공 반열’에 올라

    전한(前漢) 무제(武帝·기원전 154∼87, 재위 141∼87)는 제위에 오르자 천하에 숨은 훌륭한 인재를 널리 구했다. 먼저 ‘시경(詩經)’의 전문가로 알려진 원고생(轅固生)을 선황(先皇) 경제(景帝·재위 기원전 157∼141)에 이어 다시 불러 박사로 삼았는데, 그는 산둥(山東) 태생으로 당년 구순의 노령이었으나 황제가 부른 것에 감격해서 “절대로 젊은이에게 지지 않겠노라”고 백발을 휘날리며 조정에 들어왔다.



    워낙 꼿꼿하고 대쪽 같아서 바른말을 참는 법이 없으며, 한 번 옳다고 주장하면 물러서는 법이 없는 이 ‘직언일철거사(直言一徹居士)’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종래 학계와 정계에서 판을 치던 엉터리 학자와 기회주의, 적당주의 선비들은 지레 불안하고 비위가 언짢아 어떻게 해서든 황제의 마음을 돌이켜놓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중상을 했다.

    “원고생은 이미 ‘구십객’으로 노망이 들었으니 차라리 시골구석에 그대로 박혀서 여생이나 곱게 보내도록 내버려둠이 가합니다.”

    그러나 황제는 주위의 치열한 모략을 들은 척 만 척하고 이 늙은 선비를 곁으로 불렀다. 이때 원고생과 함께 부름을 받고 올라온 이는 역시 산둥 사람인 공손홍(公孫弘)이라는 젊은 학자였다. 패기 넘치는 소장 학자로서 중앙의 엉터리 학자들보다 양심과 실력이 있는 청년이었으나 그도 원고생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세대차이도 있으려니와 천하에 자자한 늙은이의 성격이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입견이 있었던 관계로 반갑지 않은 눈초리를 보였으나 원고생은 아무런 반응도 없더니 하루는 공손홍과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지금 학문의 도는 문란해지고 속설(俗說)이 판을 치고 있소. 만약 이대로 방치해둔다면 유서 있는 학문의 전통이 드디어 가짜 등쌀에 그 자세를 잃게 될지 모르겠소. 당신은 나이도 젊거니와 듣자하니 매우 학문을 아끼고 사랑하는 선비라 합디다.

    그러니 부디 바른 학문을 공부해서 그 옳은 뿌리를 세상에 널리 꽂아주어야겠소. 결단코 자기가 믿는 학설을 굽힌다거나(曲學) 세상 속물들에게 아부하는(阿世) 일이 없도록…”이라고 했다. 이에 공손홍도 원고생의 선비다운 고결한 인격, 풍부한 지식, 탁월한 학설에 감복하고 크게 부끄러움을 깨달아 서슴지 않고 그 자리에 엎드려 무례를 빈 후 원고생의 제자가 됐다.

    약자엔 비둘기, 강자엔 호랑이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는 원고생의 사례를 거울삼아 대통령에게 직언과 고언을 아끼지 않는 총리가 돼야 한다. 왼쪽은 최근 정 내정자의 발언으로 논란이 된 세종시 공사 현장.

    지나치게 결백하고 강직한 원고생이 화를 입은 일화가 있다. 한무제의 아버지인 경제의 어머니 두태후(竇太后)는 일찍이 노자(老子)의 열렬한 ‘팬’으로 그의 학설이나 교훈을 지지하고 따르는 여인이었다. 태후는 어느 날 박사로 등용된 원고생을 친히 불러 “그대는 노자의 저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완고한 시인은 자기 신념을 그대로 피력해 “구태여 말을 하자면 노자의 저서 따위는 저 상스러운 가복(家僕)이나 노예들의 수작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의 말 같은 것은 사실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천하 경영을 논하는 선비가 문제 삼을 만한 가치는 조금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태후는 자신이 둘도 없이 존경하는 노자를 협잡꾼이며 가짜라고 몰아버리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황제에게 알리지도 않고 감옥에 가둔 다음 매일 돼지를 잡는 도살 노동을 시켰다. 구십을 넘은 늙은이로서 돼지를 잡는 일은 도저히 감당치 못할 테니 그 어려운 노동을 시켰다가 못하겠다고 하면 다시 구실을 만들어 다른 벌을 내릴 심산이었다.

    “도덕을 행하면 민중은 그 그늘로 뭉친다”

    태후와 원고생의 사이에 끼어 난처한 사람은 황제 경제였다. 태후의 처사를 마다할 도리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가 불러들인 노시인을 못 본 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다 못해 경제는 남몰래 예리한 칼을 구해서 옥중에 있는 원고생에게 전하게 했다. 원고생은 묵묵히 그 칼로 거대한 돼지의 심장을 찔러 단칼에 죽여버렸다. 태후도 더는 어찌할 수 없어 이 늙은 죄수는 풀려나와 박사 자리로 되돌아왔다.

    옳고 바른 일을 위해서는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권력을 두려워하거나 부귀를 탐낼 줄 모르는 그의 인품과 지조에 감복한 경제는 원고생을 나라의 삼공(三公) 가운데 하나인 청하왕태부(淸河王太傅)로 승진시켰다. 지금도 마치 군자와 같으나 실은 오랫동안 세속에 빌붙어서 주변을 감동시키고 칭송받을 뿐 결코 군자가 아닌 사이비(似而非) 인간이 도처에 깔려 있다.

    돌피는 잡초에 불과하나 벼 포기와 비슷해 사람을 현혹게 한다. 가까운 현대사에서도 너무나 많은 곡학아세가 있었다. 식민지시대에는 일제에 편승한 변절한 지식인이 난무했고, 해방 후 분단구조를 악용한 어용 지식인들, 그리고 군부독재 시절 침묵으로 일관한 지식인들 또한 돌피가 아니겠는가.

    청와대가 장고 끝에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국무총리로 내정하고 6개 부처 장관을 교체해 제2기 내각을 출범시켰다. 특히 정 국무총리 내정자의 발탁은 가히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중도실용과 친(親)서민, 국민통합, 지역화합, 경제 살리기 등을 국정과제로 추진해온 청와대의 수작(秀作)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그동안 정부가 표방해온 정책과 정 국무총리 내정자의 소신이 부딪치는 부분이 있어 대통령과 총리의 갈등이 예상되기도 한다.

    3·1 독립운동 이후 일어난 수원 제암리 사건을 널리 알려 민족대표 제34인으로 불리는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석호필·1889∼1970) 박사를 중학교 시절부터 친아버지처럼 존경한다는 정 국무총리 내정자. 그는 스코필드 박사가 평소에 강조한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으나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태도를 가져라”라는 충언을 늘 가슴에 새겨 대통령에게 직언과 고언을 아끼지 않는 총리가 돼야 할 것이다.

    맹자는 “군자란 오직 묵묵한 가운데 도덕적 본바탕에 서서 반복 실천할 따름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돌아가든 옳고 바른 도덕만을 행하면 민중도 그 그늘로 뭉쳐지는 법이요, 그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죄악, 모든 불의도 저절로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에서 갈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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