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8

2009.01.06

아리 아라리 굽이굽이 정선으로 나를 넘겨주게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12-31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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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 아라리 굽이굽이 정선으로 나를 넘겨주게
    노래는 자신을 낳게 한 산야의 물형을 닮는다. 만약 이 지구에 ‘한국’이 유일한 나라이고 한국인들이 외적 영향 없이 유사 이래 삶을 가꾸어왔다고 한다면, 그리하여 오늘의 도시 문명을 주축으로 하는 경우에 도달했다고 한다면, 과연 ‘가요 톱10’ 1위곡은 어떤 양식이 될까? 아리랑? 판소리? 아악? 글쎄, 아마도 노바디가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앞의 양식들은 대도시의 수직선을 닮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직선의 삶, 곧 자신의 처지(A)에서 어떤 목표(B)를 향해 가장 빨리 도달하려는 이 질주하는 욕망은 구불구불하고 순환적인 양식을 원치 않는다.

    직진하는 강렬한 비트가 오늘날 대중문화의 주조인 것은 미국의 팝 음악 영향 때문이 아니라, ‘현대’라는 직선의 삶이 그와 같은 비트를 낳게 한 토양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지형지물 닮은 옛 가락

    잠시 상상 속에서 한반도를 내려다보건대, 우리의 옛 노래들도 서로 엇비슷해 보여도 나름의 고유한 가락과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노래들을 생성시킨 산하의 지형지물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경상도 땅의 상주, 예천, 밀양 등지에서 불렸던 아리랑을 떠올려보자. 경상 내륙지방의 지형은 우람하면서도 결코 위압적이지 않은 듬직한 산과 완만하고 너른 들판이다. 그 사이로 유유히 물이 흐른다. 사람들은 산과 물 사이, 너른 들의 양지바른 곳에 모여 산다.

    사계절이 순조롭게 순환하는 곳이다. 봄에는 꽃이 피어 씨앗을 뿌린다. 여름에는 땡볕이 곡식을 여물게 하고 가을에는 볕 좋은 추수가 기다린다. 그리고 기나긴 겨울에는 들판에 눈이 내리고 옹기종기 들어앉은 집들마다 굴뚝 위로 허연 연기가 피어올라 소박한 정경을 마무리한다.

    이런 정경에서 불리는 노래는, 그러니까 상주아리랑이나 밀양아리랑은 음보와 격이 단정하다. 계절의 순환성에 어울리는 보폭이다.

    아리 아라리 굽이굽이 정선으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 5일장’에 가면 약초, 태백산 산나물이 대처 손님을 기다린다.

    저 남도의 해안으로 가면 노래는 구성지게 흐트러진다. 해안가의 삶은 농촌의 한해살이와 다를 바 없으면서도, 어떤 절박함이 있다.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넓디넓은 갯벌이 드러나고 그 생명의 진창 속으로 사람들은 들어간다. 농부가 논에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지만, 노동의 형태와 길이는 사뭇 다르다. 이 지구의 제3세계 민요가 공통적으로 나눠 갖는 ‘call and response’, 즉 능숙한 선창자가 먼저 소리를 매기고 이를 여러 명의 후창자가 받아치는 전형이 남도 해안에서는 절묘하게 이어진다. 진도아리랑이나 군산, 부안 일대의 뱃노래를 들어보라.

    그리고 육자배기가 있다. 이 진실로 거룩한 소리는 바닷가의 노래가 아니면 안 되는 절창으로 이어진다. 전남 장흥이 고향인 이청준이나 한승원이 육자배기를 변용한 작품을 숱하게 썼듯, 이 노래는 바닷가 사람의 깊은 정한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예술로 끌어올린다. 1992년에 출시한 음반에서 안숙선 명창은 광막한 바다 위를 향해 애절한 소리를 치받아올리듯, 도저히 옥타브를 헤아릴 길이 없는 고고성으로 첫머리를 시작한 바 있다. 듣는 순간, 머리가 쭈뼛해진다.

    춥다 춥다 내 품 안으로 들어오너라

    벼개가 높거든 내 팔을 베고 내 사랑 간간이

    잠을 이루어볼거나

    내 정은 청산이요 임의 정은 녹수로구나

    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 변할쏘냐

    아마도 녹수가 청산을 못 잊어 휘휘 감고만

    도는구나

    추야장 밤도 길더라 님도 이리 밤이 긴가

    밤이야 길까마는 님이 없는 탓이로구나

    언제나 알뜰한 님 만나서 긴 밤 짤루워볼거나.

    고깃배가 멀리 떠나고, 언제 돌아올지, 만선이 되어 돌아올지, 혹시 참사를 겪지나 않을지 전전긍긍하면서 갯벌의 아낙은 ‘육자배기’를 부르는 것이다. 평야지대의 논농사와는 정한이 다르다. 한번 아차 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바닷가의 ‘일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육자배기’의 절실한 애련이 피어나는 것이다. 이청준은 해변의 육자배기에서 이렇게 썼다.

    “아기를 볼 때나 길쌈 일을 할 때나 남도 여인들은 흔히 그 한숨을 내뿜는 듯한 이상스런 가락의 노랫소리 같은 걸 웅얼대길 잘하는데, 말이 곧 노래가 되고 노래가 곧 말이 되는 그 육자배기 가락 같은 웅얼거림 소리는 여인네가 모이는 밭머리 근처엔 더구나 흔했다. 어머니 역시도 밭을 매면서 언제나 그 웅얼거림을 지녔었다. 입으로 소리를 웅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당신의 소리를 지니고 다니면서 이랑이랑 그것을 뿌리고 다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의 괴상한 소리였다. 그것이 마치 어머니가 누려온 끈질긴 삶의 찬가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의 삶이 다할 때까지 쉬임 없이 지니고 불러내야 하는 필생의 노래나 되듯이 말이다. 어머니는 그 당신의 소리에 젖어서 당신의 일을 끝내는 것도 잊은 듯이 보였다.”

    아리 아라리 굽이굽이 정선으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아라리’를 닮은 강원 정선군의 풍광.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

    이제 강원도 정선으로 가보자. 험준한 산들이 하늘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버리는 압도적인 기세 밑에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아왔다. 논밭을 일구어 연명하는 것이야 한반도의 전형적인 삶의 양식이거니와 이 정선 일대로 오면 거기에 더하여 화전이며 약초 캐고 나무를 해서 생존했다. 반듯하게 정비된 ‘정선 5일장’에 가면(요즘은 ‘5일장’이 간판일 뿐이고, 대도시의 재래시장처럼 언제나 장이 열린다) 수십 년 세월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날 아침에 가리왕산, 중왕산, 백운산, 저 멀리 함백산이나 태백산에 난 듯한 약초며 산나물이 대처의 손님을 기다린다.

    이곳의 노래가 경상도의 평야나 전라도의 해안이 배태한 것과 엇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르고 호흡이 다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평평한 토지에서 농사짓는 사람의 호흡과 해발 1500m가 넘는 험준한 산을 오르고 또 오르며 한숨 내쉬면서, 마지못해 한마디 노래하는 정선 사람들 호흡이 같을 리 없는 것이다. 남도의 육자배기가 들려주는 아득한 정한 못지않게 깊은 산중에서 큰 나무를 구하여 이를 뗏목에 얹어 굽이굽이 동강 따라 남한강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정선 땅 뱃사람의 정한 또한 막막한 서정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고, 쉬는가 하면 또 이어지는 정선아라리(혹은 정선아리랑)의 호흡은 험준한 가리왕산과 그 발밑께에 흐르는 동강의 폐곡선이 빚어내는 원형의 소리인 것이다. 국악인들이며 유명한 가수들이 노래를 저마다의 감흥으로 남겨놓았으나 역시 ‘정선아라리’는 고 한창기가 주도했던 뿌리깊은 나무의 ‘한반도의 슬픈 소리’에 실린 것이 진실로 아름답다. 정선의 산골 노인네가 가리왕산이며 중왕산으로 약초를 캐러 올라갔다가 바위턱에 잠시 앉아 한 호흡 불러보고, 또 오르고 올라서 주목 군락지 옆에 앉아 한 소절 불러보는 아득함이 알알이 배어 있는 기록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먼 샅에 검은 구름이 다 모여드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세월아 황천아 오고 가지 말어라.

    알뜰한 청춘이 다 늙어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무정한 기차전차는 나를 실어다 놓고

    한 고향에 살자질 줄을 왜 몰라주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북망아 산천아 말 물어보자.

    임 그리워 죽은 무덤 몇몇이나 되느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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