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9

2008.08.19

영화 ‘라쇼몽’ 무대에 오르다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입력2008-08-13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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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라쇼몽’ 무대에 오르다

    권투 경기장처럼 네 면이 모두 열려 있는 ‘시왓아이워너시’의 독특한 무대.

    “현재 공연 중인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은 대부분 아이들이나 멍청한 관객을 대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쇼일 뿐이다.”

    지난달 자신이 작사, 작곡, 대본을 담당한 뮤지컬 ‘시왓아이워너시’(See What I Wanna See·하비에르 구티에레스 연출)의 한국 초연에 즈음해 방한한 마이클 존 라키우사의 말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부시 행정부의 세계 정책을 혐오하는 반골 기질과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라는 마이너리티의 감수성, 그리고 도발적인 주제 선정을 즐기는 예술적 성향에서도 기인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남녀간 애정문제를 다루는 여타 뮤지컬의 플롯에서 한 발짝 떨어져 인간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을 주조로 한다.

    라키우사는 그동안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 ‘메디아’를 각색한 ‘마리 크리스틴’, 조셉 몬큐어 마치의 동명 서사시를 각색한 ‘와일드 파티’, 스페인의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베르나르도 알바의 집’을 각색한 ‘베르나르도 알바’ 등 다양한 작품을 뮤지컬로 만들어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다. ‘시왓아이워너시’ 역시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중 ‘덤불 속에서’ ‘용(龍)’ ‘게사와 모리토’를 원작으로 한 옴니버스 형태의 뮤지컬이다. 특히 라키우사는 ‘덤불 속에서’를 각색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을 보고 ‘과연 진실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으로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1막 ‘라쇼몽’은 1950년대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한 남자의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목격한 경비원, 도둑, 아내, 영매(靈媒)에게 영혼이 실린 죽은 남편이 각자의 관점에서 모두 다른 주장을 펴면서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2막 ‘영광의 날’은 9·11테러 사건(극에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음) 이후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 신부가 센트럴파크에서 거짓으로 신의 재림을 설파하고 주변 사람들(방송기자, 한물간 여배우, 실직한 회계사,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모)이 이를 맹신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또 1막과 2막 도입부에는 불륜에 빠진 남녀가 상대방을 죽이는 내용인 ‘게사와 모리토’가 각각 노래 한 곡의 짧은 장면으로 삽입돼 있다.



    뮤지컬로 만난 ‘라쇼몽’은 네 사람의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어야 하는 원작에 비해 다소 헐겁고 거친 플롯에 대사와 가사, 마임이 관념적으로 압축되어 전개된다. 각각의 캐릭터가 주장하는 진실은 재즈, 현대음악, 성가의 요소가 접목된 다양한 음악으로 펼쳐진다. 2막 ‘영광의 날’은 1막의 배우들이 역할을 바꿔 등장하는데, 고뇌하는 신부를 중심으로 배우들이 고른 기량을 선보여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일등공신 구실을 했다. 경비원/신부 역의 강필석은 단연 발군의 실력을 자랑한다. 자기가 보는 관점에 따라 성격이 바뀌는 1막의 캐릭터와는 달리, 2막에서 강필석이 맡은 신부 캐릭터는 드라마 진행에 따라 절망에 빠진 나약한 존재에서 대중을 호도하는 선동가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변신한다. 강도/기자 역의 홍광호(더블캐스팅 정상윤)와 모리토/남편/회계사 역의 양준모의 안정된 노래 실력도 인상적이었다. 케사/아내/한물간 배우를 넘나들며 쉽지 않은 노래와 연기를 소화하는 김선영은 팜므파탈적 요부나 한물간 여배우보다는 순진무구한 아내 역이 더 자연스럽다.

    1막 출연 배우들 2막에선 다른 배역으로 노래와 연기

    영화 ‘라쇼몽’ 무대에 오르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를 뮤지컬 형식으로 재구성한 1막 ‘라쇼몽’.

    극장에 들어서면 사각의 권투 경기장처럼 네 면이 모두 열려 있는 마당극 스타일의 무대가 먼저 눈에 띈다. 이러한 무대는 이 작품의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초연은 물론 재공연에서도 시도되지 않은 실험적 시도다. 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관극 체험을 통해 ‘보이는 것만 본다’는 주제 의식을 구현하려는 의도로 보이나, 이 때문에 발생하는 사각지대의 존재와 관객이 느끼는 불편함, 잦은 암전에 의한 어수선한 등·퇴장 등은 감내해야 할 몫이다. 사면의 무대는 배우들의 연기 방식도 바꿔놓았다. 관객에게 고른 시야를 제공하기 위해 배우들은 서로를 향해 교감하듯 연기하기보다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연기한다. 특히 거의 퇴장을 하지 않고 무대와 객석 사이에 앉아 또 다른 동작을 하는 모습은 신체극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한편 무대 상단에 설치된 네 개의 대형 스크린은 배우들의 클로즈업 이미지와 파편화된 풍경 스틸컷을 공연 내내 반복적으로 뱉어낸다. 하지만 과도한 영상의 사용은 오히려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킬 위험성도 있다. 공연은 8월24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리며, 이후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로 자리를 옮겨 9월6일부터 11월2일까지 이어진다(문의 02-501-7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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