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4

2008.05.06

인간과 종이 다른 생명체의 교류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입력2008-04-30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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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과 종이 다른 생명체의 교류

    영화 ‘꼬마 돼지 베이브’의 한 장면. 농부 역을 맡은 제임스 크롬웰은 이 영화를 촬영한 후, 축산농장의 비윤리성을 깨닫고 채식주의자가 됐다.

    장자가 혜자에게 피라미가 헤엄치는 즐거움을 아느냐고 묻자, 혜자는 “당신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아는가”라고 반문했다. 장자는 “당신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느냐”고 따졌다. 혜자는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오”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장자는 “당신은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물었기에, 나도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소”라고 응수했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편에 나오는 장자와 혜자의 논쟁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 더구나 인간과는 종이 다른 생명체를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던져준다.

    박쥐·돼지 등 영화에서 자주 등장

    미국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논문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1974년)에서 인간이 박쥐를 속속들이 안다 해도 박쥐의 경험, 느낌, 생각을 다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 ‘닥터 두리틀(Dr. Dolittle)’에서 동물이 된 주인공은 동물과 말을 하고, 동물의 감정을 ‘장자처럼’ 알아낸다. 또 영화 ‘꼬마 돼지 베이브’에서 농부 역을 맡은 제임스 크롬웰은 영화촬영 후 돼지들의 감정과 지성에 감명을 받은 뒤, 축산농장의 비윤리성을 깨닫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영화이거나 한 개인의 경험일 뿐이므로 혜자의 질문에 충분한 답은 될 수 없다. 몽테뉴의 말마따나 우리는 고양이와 놀아준다고 하지만, 고양이가 우리와 놀아주는 것인지 어찌 알 수 있는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쿳시의 ‘동물로 산다는 것’(평사리)은 2000년 전 장자와 혜자의 논쟁에 참가라도 한 듯한 소설집이다. 단편소설 ‘철학자와 동물’ ‘시인과 동물’은 쿳시가 1997~98년 프린스턴대학에서 한 강연을 소설화한 것인데, 소설적 화자는 강연자인 페미니스트 여류소설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다. 코스텔로는 애플턴대학에서 연례 강연을 한 후, 그 대학 물리천문학과 교수인 아들 존의 집에 머물렀다. 하지만 며느리인 노마와 손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저녁 식사도 아이들과 따로 한다. 할머니는 채식주의자이고 손자들은 고기 반찬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노마는 ‘시어머니의 까다로운 감수성(채식)’을 맞추고자 일부러 아이들을 식사에 부르지 않는다.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심리철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노마는 ‘장자처럼’ 동물을 아는 게 가능하다고 하는 시어머니의 작품 메시지가 유치하고 감상적이라고 타박한다.



    하지만 코스텔로는 강연에서 자신이 카프카의 소설 ‘학회 보고’에 나오는, 원숭이었다가 인간에 가까운 무언가로 상승 중인 빨간 피터와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농장, 도살장, 저인망 어선, 실험실 등 세계 도처에서 가해지는 잔혹한 동물학대를 성토한다. 특히 ‘인간은 신과 유사하고 동물은 사물과 유사하다’ ‘동물은 기계다’라고 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처럼, 서구철학은 동물을 사유가 불가능한 존재로 규정해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강화해왔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사람을 동물처럼 대한 예라면서 작금의 동물학대 또한 나치즘이나 진배없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도살당한 가축을 나치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에 비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코스텔로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시(詩)처럼 ‘동감’이나 ‘연민’이 인간과 동물의 억압적·이분법적 구도를 부수고, 결국 동물을 ‘장자처럼’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시인인 스턴은 “유대인이 가축처럼 대우받았기 때문에 가축이 유대인처럼 취급받는다고 할 수는 없다”며 만찬장에 참석하지 않는다.

    이 소설집에는 쿳시의 강연에 패널로 참가했던 4명이 (코스텔로의 강연에 대해) 소설식 논평을 한 것이 실려 있다. 이중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쓴 소설 ‘불이 나면, 아빠는 누구를 구하실까?’가 흥미롭다. 소설에서 싱어는 딸 나오미에게 자신의 동물권(Animal Rights)은 생명체가 지닌 ‘이익은 동등한 고려의 대상(equal consideration of their interests)’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감정·고통·지각을 지닌 모든 생명체는 평등하고 인간은 다른 종을 ‘장자처럼’ 인식할 수 있으며, 또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나오미는 아버지에게 “불이 나면, 아빠는 맥스(개)와 ‘나’ 중에 누구를 먼저 구할 거예요?”라고 묻는다.

    싱어는 나오미라고 한다. 왜냐하면 나오미는 이런 걸 걱정하고 커서 무엇이 될지 이야기하는데, 맥스는 내년 여름, 아니 다음 주에 무엇을 할지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또 나오미는 논문 때문에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환경운동과 관련 있는 직장을 구할 수도 있고, 맥스보다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먼저 구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소설 속 싱어는 평등의 원칙을 동물에게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물해방의 선구자’인 현실의 싱어와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동물(맥스)과 인간(나오미)을 차별하고 있지 않은가.

    풀기 어려운 21세기 마지막 편견

    이 모순을 해결하는 답이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철학과현실사)에 있다. 싱어는 여기서 자의식, 과거와 미래 개념을 지닌 생명체를 ‘인격체(person)’라고 부르면서 동물이라 해도 그런 능력이 있는 개, 돼지,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보노보 등은 인격체이고 인간이라 해도 그런 능력이 없는 태아나 영아, 심각한 정신장애인은 비인격체라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 인격체가 아니고, 결코 인격체가 될 수 없는 인간 존재를 죽이는 것보다 동물일지라도 인격체를 죽이는 게 더 나쁘다고 한다. 싱어 처지에서는 갓난아이나 정신질환자보다 인격체의 특징을 더 가지고 있는 유인원을 동물실험에 이용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싱어는 나오미가 감각 자체를 느낄 수 없다고 하는 생후 18개월의 영아라면, 맥스를 먼저 구할 수도 있다. 그의 실천윤리학대로라면 말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맥스와 나오미는 분명히 모두 인격체다. 그럼 인간인 딸을 먼저 구하는 것은 차별 아닌가?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동물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나오미의 미래지향적인 모습 같은 것 말이다. 그렇기에 도덕적으로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싱어는 말한다. 때문에 애완견 맥스보다 딸 나오미를 먼저 구하는 게 정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배아 연구 허용, 안락사 찬성, 임신중절은 윤리적이지만 돼지 도살은 비윤리적이라고 하는 싱어는 민족우수성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를 죽인 나치와 무엇이 다르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차별은 부당하고, 인격체인지 비인격체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정당한가’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또 설사 딸이 영아나 정신질환자일지라도 불이 나면 애완견보다 딸을 먼저 구하려는 게 보통 아버지의 동물적 본능(?)일 것이다. 싱어의 논리대로라면 이 본능도 윤리에 어긋나는 것인가?

    그래서 싱어도 평등의 원칙을 동물에게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윤리적 근거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인간이 다른 종을 알아가는 과정은 장자처럼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고 혜자처럼 난해한 문제라는 투의 고백을 잊지 않았다. 한마디로 싱어의 말처럼 노예차별, 여성차별을 넘어 21세기의 마지막 편견이라고 하는 종차별은 이렇게 지난한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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