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9

2008.01.15

서구 선진국들의 이기적인 세계화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8-01-14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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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 선진국들의 이기적인 세계화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 군중.

    맥루한이 1962년 저서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말을 처음 쓴 후, 시어도어 레빗은 80년대 중반 국가 기업시대를 예측하면서 ‘시장의 세계화’란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제 토머스 프리드먼은 개방과 정보화로 상징되는 지구촌의 세계화는 일시적인 현상이나 흘러가는 유행이 아닌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한다. 프리드먼은 자신의 책 ‘렉서스와 올리브나무’(1999, 창해)를 통해 도요타의 고급 승용차인 렉서스를 세계화의 아이콘으로 지목했다. 이 책에는 정치·경제·문화 등에서 초국가적 동질화·표준화·시장화를 상징하는 렉서스와 함께 개별국가, 지역공동체 문화, 종족보호주의 등을 뜻하는 중동의 대표적 수종인 올리브나무가 등장한다.

    보호무역 덕에 성장하고도 개도국에 자유무역 강요

    프리드먼은 지구촌의 세계화로 인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갈등을 빚는 역사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마빈 조니스 시카고대학 국제정치경제학 교수가 ‘빅맥이냐 김치냐’(지식의날개)에서 작금의 지구촌을 빅맥(세계화)과 김치(지역화)의 충돌로 진단한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조니스 교수가 빅맥의 일방적 승리를 예견하지 않고 ‘김치’로 대표되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세계화와 현지화의 병행)이 진정한 세계화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 반면, 프리드먼은 렉서스의 일방적 승리를 당연하게 본다. 그래서 프리드먼은 패배자 올리브나무의 세상은 렉서스의 ‘황금구속복(golden straitjacket)’을 입지 않으면 살길이 막막하다고 본다. 올리브나무 세상을 구원한 복음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 정책, 즉 국영기업의 민영화, 작은 정부, 무역 자유화, 외국인 투자와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 완화, 외환 자유화 등을 뜻한다.

    하지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에서 황금구속복은 서구 선진국만 살찌우고 후발 개도국에는 불평등과 양극화를 초래한다고 일갈했다. 황금구속복이란 부자 나라들이 스스로 보호무역과 보조금 정책으로 성장했으면서도 개발도상국들에는 자유무역만이 최고인 양 호도하는 이중 잣대이기 때문이다. 보호무역 덕에 발전한 강대국이 약자들에게 그 반대의 길을 걸으라고 하는 것은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는 척하며 돈을 강탈한 ‘성경’의 ‘나쁜 사마리아인’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1841년 당시 후발자본주의 국가인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정상의 자리에 이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올 수 없게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버리는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의 실상을 고발한 바 있다. 자신들은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을 통해 부를 쌓고, 다른 나라에는 자유무역을 권하는 영국의 몰염치를 비아냥거린 것이다. 보호무역을 통해 성장한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10달러짜리의 얼굴마담인 미국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1755~1804)은 후진국 미국의 발전을 위해 ‘국가전략 산업’을 보호, 육성해야 한다며 보호무역의 대명사인 유치산업이란 말을 만들었다. 장 교수는 반(反)덤핑 관세 등을 주장하며 자유무역의 본산인 양 행세하고 있는 현재 미국의 행태가 나쁜 사마리아인이 국익 극대화를 위해 끊임없이 저질러온 극도의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자유무역이 진정한 세계화의 왕도가 아니라는 것은 렉서스를 생산하는 도요타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1958년 미국에 처음 수출한 도요펫이 쓴맛을 봤을 당시 일본은 뽕나무의 나라였다. 자유무역 이론을 따른다면 당시 일본은 자동차를 포기하고 비교우위 산업인 방직산업에 ‘올인’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수입 자동차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자동차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규제하는 한편, 도요타가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는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보호무역 정책으로 지금의 렉서스를 생산하는 자동차 강국이 될 수 있었다. 만약 프리드먼식으로 자유무역만 고집했다면 일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소득수준이 비슷한 개도국으로 남아 당시 주요 수출품이던 견직물 생산을 위해 뽕잎이나 재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노키아로 잘 알려진 핀란드 역시 보조금 정책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침엽수림에 국가 경제의 존망을 걸었을 것이고, 한국의 포스코는 포항 앞바다에 떠보지도 못했을 것이며, 삼성은 설탕이나 밀가루 요리를 팔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 교수는 외국인 투자에 대한 ‘슬기로운 규제’가 ‘묻지마 개방’보다 낫다고 주장한다. 후발 개도국들은 ‘나쁜 사마리아인 삼총사’인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세계무역기구(WTO)가 강요하는 황금구속복을 무조건 받아입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IMF는 돈이 궁한 개도국 정부에 고금리를 들이대는 국제 사채업자이며, WTO는 미국이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금융·지적재산권·서비스로 교역 범위를 크게 확장하고, 세계은행은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 재무부와 금융권의 논리를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의 세계화를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로 보지 않는 이들은 도둑맞은 세계화, 허울뿐인 세계화, 빈곤의 세계화, 세계 없는 세계화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현재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인데, 정체는 가짜 세계화라는 것이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한스 페터 마르틴과 하랄트 슈만은 ‘세계화의 덫’(영림카디널)에서 세계화의 귀결을 ‘20대 80 사회’라고 결론지었다. 현재 강대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지구촌 전체에서 20%의 사람들만이 좋은 일자리와 안락한 환경에서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 뿐, 나머지 80%는 실업자가 되거나 불안정한 일자리에 매달려 거친 음식과 저질 문화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진단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강대국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자 불평등의 확산일 뿐이라고 말한다.

    “IMF, IBRD, WTO는 나쁜 사마리아인 삼총사”

    그렇다면 미국 주도로,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세계화가 아닌 진정한 세계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칼럼니스트 조지 몬비오는 자신의 책 ‘도둑맞은 세계화’(창비)에서 역발상을 주문한다. 그는 세계화가 역설적이게도 빈곤·환경·노동·불평등·인권 등 세계적 수준으로 논의돼야 할 문제들을 전 세계적 문제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나쁜 사마리아인 삼총사가 이끌어온 지금까지의 세계화를 민주적으로 선출된 세계의회, 안전보장이사회의 권한을 박탈한 유엔총회, 채무 축적을 예방하는 국제청산동맹 그리고 공정무역기구 등의 설립을 통해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 교수 역시 “기울어진 경기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장애인과 최홍만이 K-1 경기를 한다면 동일한 규칙 속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약자에게 무언가의 어드밴티지를 적용해줘야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 교수는 여섯 살 먹은 아들 진규가 바로 지금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해 ‘적절한 보호무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성인에 비해 사회적 약자인 진규가 지금 직업전선에 뛰어들지 않고 교육을 받은 뒤 진출하게 해야 하는 것처럼, 강대국에 비해 약소국인 개도국은 자국의 유치산업을 보호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진규가 나중에 경쟁사회에 뛰어들면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장 교수의 생각이 틀렸다면 올리버 트위스트는 ‘생각이 짧은 착한 사마리아인’ 브라운로 씨의 손에 구조되는 것보다는 ‘늙고 나쁜 사마리아인’ 악당 페긴을 위해 소매치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말인즉슨, 어린 진규의 경쟁력을 키워주는 교육이란 후진국의 유치산업에 대한 국가보조금과 구제조처 같은 ‘적절하고 정당한’ 보호무역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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