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2

2017.01.18

국제

키신저, 善인가 惡인가

다시 불붙은 트럼프의 외교 가정교사 공과(功過) 논쟁

  • 신석호 동아일보 국제부장 kyle@donga.com

    입력2017-01-13 18: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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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칠레의 결정은 잘한 것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아주 잔인하게 대하세요. 그래야 카터 대통령이 이해합니다.”

    1979년 10월 초. 77년 제럴드 포드 행정부의 국무장관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헨리 키신저가 뉴욕 맨해튼 자택으로 에르난 쿠비오스 칠레 외무장관을 초대해 이렇게 말한다. 재임 시절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고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수립을 도왔던 키신저가 퇴임 뒤에도 피노체트 정권에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 장면이었다.

    키신저가 칠레 군사정부에 카터 후임 행정부에 반하는 컨설팅을 한 사연은 이렇다. 키신저가 퇴임하기 직전인 1976년 9월 피노체트는 당시 워싱턴 싱크탱크에 체류하던 반체제 인사 오를란도 레텔리에르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칠레 정보당국의 사주를 받은 쿠바 난민들이 백악관 근처에서 레텔리에르가 탄 차를 폭파한다.

    미국 내에서 일어난 첫 ‘정부 지원 테러행위’를 조사한 미국 정부는 카터 행정부 취임 후인 1978년 8월 칠레 정보당국자 3명을 기소하고 이들을 미국 법정에 세우고자 칠레 피노체트 정부에 이들의 추방을 요청했다. 79년 10월 군부의 압력을 받은 칠레 법원이 미국의 요청을 거절한 가운데 양국관계가 악화된다. 키신저와 쿠비오스의 은밀한 만남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도프만의 비판

    자흐 도프만 미국 카네기카운슬 선임연구원이 1월 6일 비밀 해제된 미국 외교문서를 근거로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폭로한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어두운 과거’다. 도프만은 “키신저가 자신의 위상을 이용해 사적인 목적을 추구하거나 때로는 미국 국가이익에 반하는 일을 꾸몄다. 때론 현직 대통령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키신저는 1980년 선거에서 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설 것으로 기대했고, 테러에 대한 응징보다 칠레 반공 정부와 동맹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차기 정부에서 다시 미국의 외교 사령탑을 차지할 것처럼 말이다. 83년 국제컨설팅회사인 키신저협회를 창설한 뒤 그가 어떤 나라를 상대로 무엇을 조언했는지, 그것이 미국 국가이익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도프만의 비판이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 출신으로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중국과 데탕트 외교를 이끈 키신저는 ‘당대 최고전략가’라는 칭송 못지않게 미국 이익을 위해선 약소국쯤은 쉽게 짓밟아버리는 책략가이자 비밀외교의 신봉자라는 악평에 시달렸다. 소련 공산진영 봉쇄를 목표로 피노체트 정권 같은 독재정권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고 베트남전쟁을 장기화해 무수한 인명 피해를 낳았다는 논란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공화당과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현직 대통령에 대한 칠레의 공격을 두둔했다는 도프만의 비난은 한 발 더 나아간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미국 외교무대에 다시 떠오른 그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대선 전 트럼프의 ‘외교 가정교사’로 주목받은 그는 트럼프 당선인이 추진하는 친러시아 정책을 지지하면서 상종가를 치고 있다. 1972년 2월 역사적인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20년 뒤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언했던 그는 지난해 12월 28일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와 인터뷰에서 “크림반도가 러시아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자”며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다. 이를 두고 블룸버그의 엘리 레이크는 1월 4일 ‘키신저의 워싱턴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고 선언했다.

    1970년대 키신저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베이징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으로 궁지에 몰린 소련은 3개월 뒤 닉슨 대통령을 모스크바로 초대해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체결했다. 이른바 동서 데탕트의 시작이다. 올해 94세인 그가 이번에는 역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 봉쇄에 활용하는 21세기 판 이이제이 외교에 다시 성공할지 여부는 미국 외교 차원을 넘어 국제정치학 차원의 관심거리가 된 상황이다.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

    철두철미한 국제정치 현실주의자인 그는 당대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이 평화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한 국가가 독점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국가 또는 세력 사이에 힘이 분산된 국제체제가 더 평화롭고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국가가 자신의 힘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외교에 이데올로기나 윤리를 개입시키는 것도 경계했다. 1977년 발간된 ‘키신저 박사와 역사의 의미’에서 저자 피터 딕슨은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어린 시절 경험도 현실주의적 인식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여름 미 공화당 경선후보였던 트럼프의 외교 가정교사라는 보도가 나온 뒤 미국 언론은 키신저의 공과 논쟁을 다시 벌여왔다. 폴리티코가 지난해 10월 미국 역사학자 10명에게 ‘키신저는 선인가 악인가’라는 주제로 긴급 설문조사를 한 결과 역시 평가는 팽팽하게 엇갈렸다.

    니컬러스 톰프슨 ‘뉴요커’ 편집인은 “그의 중국 정책은 냉전 시절 미국의 성과 가운데 하나”라며 “그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레이 베스 프린스턴대 교수는 파키스탄 군사정권 지원 등에 대해 “도적적 흠결이 있고 전략적으로도 재앙 수준의 정책이 적잖았다”고 지적했다. 키신저는 과거 자신의 정책에 대한 평가를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을 제어하겠다는 시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그가 살아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키신저가 중국을 마치 죄인처럼 몰아붙이는 트럼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중국은 지금 내부 개혁을 진행하고 있고 그동안 미국과 공존한 것이 국가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라며 환율조작이나 무역역조 등에 대해 중국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도 미국과 중국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북한 정권은 붕괴할 것입니다. 그럼 한반도 북반부에 공백이 생기겠죠. 그때 모든 주변국이 그 공백 속에 뛰어들지 않도록 미·중 양국은 북핵 문제뿐 아니라 그 후에 대해서도 상호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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