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9

2006.11.07

‘본드 걸’도 와서 보면 울고 갈걸!

국정원 여성 요원 종횡무진 맹활약 … 세심함과 책임감 높아 정보업무 특히 강점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6-11-01 15:4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본드 걸’도 와서 보면 울고 갈걸!
    지난해 11월 중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 참가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묵은 부산 해운대구 조선비치호텔 앞. 취재진이 카메라를 꺼내들자 진을 친 정보요원들이 기자들을 막아섰다.

    당시 부시 대통령의 경호와 관련해,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과 미 중앙정보국(CIA) 사이에서 징검다리 구실을 한 것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었다. CIA 한국지부장인 H 씨가 그 주인공. H 씨는 한국에 부임한 첫 여성 지부장이라고 한다.

    ‘미즈 에이전트’는 영화 소재로 자주 이용될 만큼 호기심을 자아내는 직업이다. 그렇다면 국정원에서도 CIA 한국지부장처럼 여성들이 주목할 만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 한국의 여성IO(Information Officer)들도 남성IO 못지않은 활약을 하고 있을까.

    국정원의 15년차 베테랑 요원 이난희(가명·40대 초반) 씨도 APEC 때 부산에 있었다. 그는 국정원에서 테러 요인을 봉쇄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는 대공수사 업무를 하다가 수년 전 대(對)테러 파트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전 세계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인 부산 APEC 때는 세계 각국에서 시시각각 들어오던 테러 가능성을 암시하는 첩보 때문에 무척 긴장해야 했다. 신경이 곤두섰던 만큼 행사가 무사히 끝난 뒤에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국정원에는 이 씨의 여자 선배가 거의 없다. 국정원이 여성 요원을 처음으로 뽑은 것은 20여 년 전인 안기부 시절이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성 요원은 통틀어 1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여성 국정원 요원의 역할이 일반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87년 ‘KAL 858기 폭파 사건’ 때다. 폭파범인 김현희 씨를 호송하는 안기부 여성 요원이 카메라에 잡혔고, 한 여성 요원은 김 씨와 함께 생활하면서 심문을 하기도 했다.

    “국정원에 들어온 것은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국가안보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다.”

    이 씨가 국정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여성 요원들의 임무는 여성 피의자 조사 등에 제한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여성 요원들은 남성 요원과 마찬가지로 정보수집, 공작 분석, 방첩 등 전 영역에서 활약 중이다.

    80년대 중반까지 통틀어 10여 명

    지난해 5월 인천국제공항. 인천발 콸라룸푸르행 항공기가 이륙을 위해 굉음을 내며 시동을 거는 순간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기내로 들이닥쳤다. 이 남자들은 곧바로 한 승객에게 다가섰다.

    ‘본드 걸’도 와서 보면 울고 갈걸!

    국정원 직원들이 사격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과 공수훈련을 받고 있는 여성 신입요원(오른쪽).

    “이젠 다 끝났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Y사가 6000여 억원을 들여 개발한 핵심 반도체 기술로 해외에 공장을 차리려던 용의자가 “무슨 일이신데요”라고 반문했지만, 표정은 이내 일그러졌다. 첨단기술의 해외 유출을 간발의 차이로 막아낸 순간이었다.

    산업스파이 일당이 Y사의 핵심기술을 빼돌리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국정원이 내사에 나선 때는 2개월 전. 국정원 요원들은 K씨 등이 범행을 준비하고 있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 B사 사무실 주변에서 두 달 가량 잠복수사를 벌였다.

    주차장 관리인, 음식점 종업원, 꽃가게 배달원 등으로 위장한 요원들이 K 씨 주변을 감시했고, 인근의 구두미화원 등을 ‘망원’으로 포섭해놓기도 했다. 18년차의 베테랑 여성 요원 강지윤(가명·40대 초반) 씨는 옆 사무실의 직원으로 위장해 용의자들에게 접근했다.

    ‘용의자들이 기술을 유출해 해외에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용의자 중 1명이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려고 한다.’

    요원들은 시시각각 B사와 관련된 첩보를 전해왔다. 다수의 결정적 첩보를 낚은 사람은 바로 강 씨였다. 용의자들은 살갑게 접근해온 그가 국정원 요원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흔치 않은 여성 요원이라는 점이 사무실 직원으로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나는 안기부 시절에 입사했는데,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막연히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며 지원했다. 예전(대공수사 분야에서 일할 때)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데, 요즘엔 국민들이 인정해주는 것 같아 더욱 힘이 난다. 기업체에서 ‘국정원이 제대로 일을 한다’며 감사를 표시할 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강지윤 씨)

    대공수사 분야에서 일하다가 산업보안 쪽으로 옮겨온 강 씨는 국정원이 디지털위성방송과 첨단의료장비 기술 유출 사건을 적발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민간 기업체를 대상으로 보안교육과 보안컨설팅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진선(가명·30대 중반) 씨는 국정원에서 ‘사이버 테러’를 봉쇄하는 일을 맡고 있다. 여성 요원들은 이 씨가 맡고 있는 대(對)사이버테러를 비롯해 국제범죄 대(對)테러 산업보안 등 이른바 ‘정보의 블루오션’에서 적지 않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국정원은 대북정보 못지않게 이들 영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이버테러는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는 국가의 주요 정보를 훔치거나 파괴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군사통신, 금융망 등에 관련된 테러는 미래전의 핵심전술 중 하나다. 북한은 사이버전에 대비하기 위해 해커부대는 물론 사이버 심리전부대까지 만들어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월 중순의 어느 날 새벽 1시 무렵, 국정원 국가사이버안전센터 상황실. 해킹정보를 감시하던 이 씨가 눈을 벼리기 시작했다. A국으로부터 해킹 시도가 감지된 것이다. 전북을 시작으로 서울, 경기, 인천 등에서 해킹 징후가 나타났으며 더욱이 OO개발원, OO금융 등 공공기관을 포함해 약 180개 기관에 대한 동시다발 공격이었다.

    국가사이버안전센터는 국가사이버안전대책회의에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 보고하는 한편, 전체 국가·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최고 수준의 경계태세 유지를 알리는 적색경보를 발령했다. 이 씨는 부하 직원들을 이끌고 서버에 비밀자료가 다수 보관된 서울 광화문 소재 한 정부기관으로 긴급 출동했다. 이 씨 등의 발 빠른 대응으로 이날의 동시다발 사이버공격은 실행되지 못했다.

    북한 ‘정보전사(해커)’들의 실력은 수준급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무사에 따르면, 북한은 벌써부터 해킹부대를 통해 남한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미래전에서 이 씨 같은 정보전(情報戰) 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요한 까닭이다.

    “산업보안, 국제범죄, 대(對)테러 분야 등에서 여성 요원들의 활약이 특히 확대되고 있다. 해마다 새로 들어오는 여성 요원의 수도 꾸준히 늘고 있다. 공수훈련 때 보면 여성 신입요원들이 체력은 약하지만 악바리 근성이 강하다. 그래서 군사훈련도 남성들보다 더 잘 소화한다.”(국정원 관계자)

    국정원 신입요원들은 1년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6개월 가량 합숙훈련도 거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커리큘럼엔 정보요원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역량 교육뿐 아니라 군사훈련, 무술교육 등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 요원도 남성과 똑같이 이들 훈련을 받아야 한다.

    여성 비율 10% 안팎 … 활용도 더 높여야

    공수훈련은 특전사에서 일반 군인들과 함께 받는다. 교육내용과 강하 횟수 역시 특전사 신임과 똑같다고 한다. 또 해안에 있는 모 부대에 입소해 고무보트(IBS)를 이용한 해양훈련도 받는다. IBS 훈련 때는 여성 요원 대부분이 탈모에 시달리며 얼굴을 못 알아볼 만큼 구릿빛으로 변한다.

    “공수훈련 때는 접지훈련(지상에 착지하는 동작을 반복 연습하는 것)을 비롯한 체력훈련이 무척 고됐다. 힘들고 지친 나머지 막상 강하를 할 때는 별로 무섭지 않았다. 공수훈련을 마치고 나니‘비행기에서도 뛰어내렸는데 더 이상 뭐가 두렵겠느냐’는 배짱이 저절로 생겼다.”(유수연 씨·가명·30대 초반)

    유 씨는 국정원 내에서도 알아주는 ‘마약통’이다. ‘국제범죄정보센터 연구원’이라는 명함을 건넨 그는 앳된 얼굴의 미인이었다. 6년째 국정원에서 마약 관련 정보업무를 맡아온 그는 담당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 소리를 들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마약 관련 국제회의 때마다 한국을 대표해 참석하기도 한다.

    “인터넷, 국제택배 등을 이용한 마약 거래가 성행하면서 마약에 대한 접근성은 높아진 반면 단속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만큼 정보를 통한 사전 예방이 매우 중요해졌다. 한국은 단속을 제외한 치료, 재활 등 여타 분야에서 중국과 일본보다 뒤처져 있다.”

    유 씨는 검·경 마약 수사관들의 ‘과외 선생’ 구실도 하고 있다. 수사관들에게 마약 유통 정보를 전달하고, 신종 범죄 수법을 가르치는 것. 마약이 국제범죄화한 뒤 경찰의 마약수사는 상당 부분 국정원에 의존하고 있다. 유 씨는 신종 마약인 살비아디비노럼의 국내 유입과 확산을 차단하는 데도 주도적 구실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국정원에서 여성 요원들의 존재감이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 그러나 국정원의 여성 인력 비율은 현재 10% 안팎에 그친다. 여성 요원들은 여전히 ‘현장’보다는 ‘내근’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국정원 한 중견 간부의 얘기다. 선진국 정보기관에 비해 여성 인력 활용도가 크게 낮은 편.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국정원에 지원하는 여성이 늘면서 여성 요원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면서 “여성 특유의 세심함, 책임감,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정보업무에서 강점으로 드러난다. 경쟁력 있는 선진 정보기관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앞으로 여성 인재의 활용도를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