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2

2006.09.12

당대 최고 소리꾼들의 발자취

  • 윤융근 기자 iyunyk@donga.com

    입력2006-09-11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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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 최고 소리꾼들의 발자취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여~.” 명창 고 박동진 선생이 모 제품 광고에 등장해 들려준 광고카피로, 선생의 친근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걸쭉한 입담과 타고난 소리로 시대를 풍미한 선생은 생전에 ‘광대’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소리광대로서 대중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던 애정 어린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명창이 되기 위한 소리꾼들의 소리공부 과정에 얽힌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전해진다. 득음을 하기 위해 폭포 아래서 피를 쏟는 고통을 참아내기도 하고, 끼니를 굶으면서 수련과정을 감내했던 모습은 소리와 예술에 대한 그들의 집념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소리광대들의 뜨거운 열정과 한국 판소리사를 담고 있다. 수많은 명창들은 독공(득음을 위한 발성연습)을 통해 다양한 창법을 만드는 성악가, 새로운 장단과 더늠(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듬어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을 창조하는 작곡가, 그리고 사설을 창작하는 민중시인으로서 특출난 기량을 펼치며 시대를 풍미했다.

    양반 출신의 광대 혹은 한량으로 가극에 능해 광대로 행세하는 사람을 비가비(비갑)라고 한다. 1841년 세상을 떠난 명창 권삼득이 바로 비가비였다. 그는 남원 구룡폭포 아래서 수년간 수련을 쌓아 마침내 득음했지만, 집안 망신시킨다는 이유로 문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또 문중 어른들이 멍석말이를 하려 하자, 그는 마지막 소원으로 거적 밑에서 비절한 소리를 뽑아내 죽음을 면하고 족보에서 축출됐다고 전해진다.

    ‘일고수 이명창(一鼓手 二名昌)’이란 말이 있다. 첫째가 고수요, 그 다음이 소리꾼이란 말이다. 하지만 청중에게는 역시 소리꾼이 제일이다. 철종 때 태어나 고종 때 타계한 송광록이 소리꾼으로 입신하게 된 내막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가 고수를 때려치우고 소리꾼을 택한 데는 형인 송흥록 명창을 따라다니면서 받은 불만이 크게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는 어느 날 종적을 감추고 제주도로 간다. 5년 동안 소리공부에 전념한 끝에 득음하고 뭍으로 올라와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다.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17세기 말 이전, 즉 300년이 조금 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초창기 판소리는 지금과는 전혀 달리 연회 중간에 불리는 민요, 잡가, 타령과 마찬가지로 그저 막간 음악 정도로 추정된다. 18세기 들어 열두 마당을 형성한 판소리는 19세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는다. 음악성이 완성되고 동편제와 서편제 등의 유파도 이즈음 완숙됐으며, 판소리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생겨 명창들의 생계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소리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송만갑 명창. ‘가왕’의 칭호를 들었던 송흥록, 아우 광록과 그의 아들 우룡, 그리고 우룡의 아들이 바로 만갑으로 소리광대 3대를 이은 타고난 소리꾼이었다. ‘판소리의 중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는 송만갑은 동편제 소리를 배반해 가문에서 축출되기도 했지만 지방순회 공연으로 민중의 선망이 됐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어전에서 소리를 하여 ‘송 감찰’이라는 벼슬도 받았다. ‘송만갑의 사진만 보아도 소리에 기가 죽는 명창’이 있었을 정도로 그는 당대 최고의 ‘명창 중 명창’이었다.

    책은 이밖에 새타령을 하면 소리판으로 새들이 날아들었다는 명창 이날치, 소리 하나로 통정대부 벼슬을 받은 국창 이동백, 농군의 아낙에서 판소리에 반해 가출 소리꾼이 된 이화중선 등 전기 8명창, 후기 8명창, 근대 5명창을 소개한다.

    판소리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고 어깨를 들썩이게 하며 혼을 쏙 빼놓는다. 또한 그 명맥을 이어가며 진보를 거듭하고 있다. 명창들의 사연은 고수의 ‘얼씨구’ ‘좋다’ 추임새를 타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윤석달 지음/ 작가정신 펴냄/ 328쪽/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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