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8

2006.03.28

이진영 호수비는 ‘도쿄돔 효과’ 덕?

지붕 열린 구장에선 타구 더 휘어 캐치 어려웠을 것 … 취재팀 숙소 안 잡았다 4강 가자 ‘부랴부랴’

  • 애너하임=김성원 중앙일보 JES 기자 rough1975@jesnews.co.kr

    입력2006-03-22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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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이 세계 야구의 지붕에 오르기까지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김인식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감독의 ‘믿음의 야구’, 세계 홈런왕으로 도약한 이승엽, 그리고 변함없는 활약으로 최고의 솜씨를 보여준 해외파 맏형 박찬호와 김병현 등 한국의 영웅들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숨은 MVP’들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꿈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의 오판에서 비롯한 이진영의 호수비 등 행운도 따라줬다.

    김인식 감독은 3월5일 한-일전에서 나왔던 이진영의 신기에 가까운 호수비와 관련한 일화를 공개했다. 이 수비 하나로 한국팀은 되살아났고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는데, 김 감독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판단미스였다”고 밝혔다. 당시 오른쪽 타석에 들어선 니시오카가 당겨칠 것이라고 판단한 김 감독은 긴급히 외야 수비수 위치를 왼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바깥쪽 높은 공이 들어오고 니시오카의 배트가 나가는 순간 밀어친 타구가 원래 이진영의 위치에까지 뻗어나갔다. 애초의 수비 위치라면 쉽게 잡을 수 있는 ‘이지 플라이’였던 것이다.

    교포 사장님, 멕시코 종업원 때문에 ‘응원도 눈치’

    다행히 이진영이 쏜살같이 달려가 다이빙캐치 하는 호수비 덕분에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만일 그 공이 빠졌다면 한국의 역전승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공을 빠뜨렸다면 이런 ‘후일담’은 코칭스태프의 비밀로 묻혔을지 모른다. 김 감독은 이진영의 호수비엔 ‘도쿄돔 효과’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붕이 열린 구장에서였다면 밀어친 타구는 더욱 오른쪽으로 휘어나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공기의 영향을 덜 받아 타구는 직선으로 뻗어갔고, 힘차게 발을 옮긴 이진영의 글러브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한-일전 승부를 가름한 수비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셈이다.

    3월13일 멕시코전을 앞두고 로스앤젤레스(LA)의 한국 교민들은 은근히 걱정을 했다. 한국과 멕시코전은 ‘한국인 사장 대 멕시칸 종업원’의 대리전이 되기 때문이다. 한인타운에서 요식업, 슈퍼마켓 등 장사를 하는 교민들은 대부분 멕시칸을 종업원으로 두고 있다. 윌셔가에서 한인 교민들을 상대로 24시간 해장국집을 하는 C 사장은 “이기더라도 크게 이기면 안 된다. 또 지더라도 크게 지면 안 된다”고 걱정했다. “크게 이기면 멕시칸들이 파티를 하고 술을 진탕 마신 뒤 다음 날 출근을 안 해 업무가 마비된다. 반대로 크게 져도 분통이 터져서 술 먹고 안 나온다.”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투수전 끝에 2대 1, 한국의 한 점 차 승리였다. 교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당연. 그러나 한국팀이 연승을 하자 불똥이 미디어로 번졌다. WBC 미국 본선 취재에 나선 한국 언론은 3월14일 미국전 종료 뒤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당초 1승2패, 또는 전패로 4강에서 탈락한 뒤 귀국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방송 3사와 스포츠신문, 그리고 일간지 취재진 대부분이 본선 2라운드 일정까지만 비행기, 숙소 예약을 했던 터라 부랴부랴 출국 날짜를 다시 잡고 준결승전, 결승전이 치러지는 샌디에이고의 호텔 예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행복한 해프닝’ 또 하나. 미국을 상대로 이승엽의 홈런이 터져 한국 기자 몇 명이 박수를 치자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 장내 방송으로 “미디어석에서의 박수와 환호성을 자제해달라”고 ‘경고’했다. 4회 대타 최희섭의 스리런 포가 터져나오자 일부 한국 기자들과 대회 서포터스로 온 한국야구위원회 이진형 홍보팀장은 박수를 치지 말라는 경고 탓에 눈물을 글썽이며 입술을 질끈 깨물기도 했다. “박수 치고 싶은데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는 게 이 팀장의 이야기다.

    미국전에 앞서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의 조작실에선 직원들의 전광판 조작 예행연습이 있었다. 직원의 실수였을까, 아니면 패배를 예감했을까. ‘한국 2점, 미국 1점’이라는 자막이 약 1분간 떠 한국 팬들의 함성과 미국 팬들의 야유가 엇갈렸다. 경기는 한국의 7대 3 승리. 경기가 끝난 뒤 전광판을 조작했던 직원의 표정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WBC의 주관 중계방송사인 ESPN의 선택도 묘했다. ESPN은 이날 한-미전을 생중계하지 않고 녹화해뒀다가 경기 종료 후에야 내보냈다. ESPN이 미국의 패배를 예감한 것은 아니었을까.

    WBC 이모저모

    성적 따라 말 바꾼 미 언론 “WBC는 시범경기”


    ●WBC는 메이저리그 시범경기? 심판의 잇따른 ‘도움’(?)에도 4강에 진출하지 못하자 미국은 망연자실한 표정. 상황이 이런데도 ‘입’은 살아 있었다. 스포츠 칼럼니스트 빌 플라스케는 “그냥 상황을 잊어도 괜찮다. 어차피 시범경기에 불과하다”며 느닷없이 대회를 평가절하. 거창하게 ‘클래식’이라는 이름까지 붙여놓은 이들이 결과가 좋지 않자 ‘자기 최면’에 들어간 것이다. 야구평론가 루이스 맥클렙은 TV 토크쇼에서 김병현을 가리키며 “대표팀에서는 저렇게 잘하면서 왜 보스턴에선 그리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거리기도.

    ●“남는 중계 박스 어디 없어요?” WBC 본선 라운드 중계를 위해 공중파 3사가 총출동. 준결승전과 결승전이 열리는 샌디에이고 현지 생중계를 꼼꼼히 준비해온 케이블 TV 엑스포츠와 달리 이들 3사는 2라운드가 열린 에인절스타디움에만 중계석을 마련. 준결승전과 결승전이 열리는 샌디에이고 펫코 파크의 중계석은 벌써 예약이 꽉 찼다고. KBS 관계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중계석을 확보하라”는 ‘윗선’의 특명에 샌디에이고로 무작정 달려갔고, SBS는 화면을 받아 한국의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오프 튜브(off tube)’로 대신. 쩝쩝, 이렇게 잘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찬호야 살살 던져라”(?) 3월11일 대표팀이 샌디에이고와의 평가전을 치른 뒤 샌디에이고 브루스 보치 감독이 박찬호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박찬호의 어깨를 감싸고 귓속말. 박찬호는 4, 5선발을 놓고 유망주들과 경쟁하는 상황. 보치 감독이 박찬호에게 안부를 전하고 컨디션을 물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스프링캠프에서 몸을 만들어야 할 주축 투수가 경기를 뛰는 게 내심 못마땅했을 터. 박찬호와 ‘자리 경쟁’을 벌이는 팀 스토퍼가 이날 한국 타자들을 상대한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다소 어색. 어쨌거나 박찬호는 이번 대회 내내 ‘아직 시들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감동의 세리머니도 갖가지. 서재응은 3월16일 일본을 꺾은 뒤 태극기를 들고 에인절스타디움 마운드로 달려갔다. ‘미국 야구의 심장’에 태극기를 꽂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태극기와 자신의 배번 26이 새겨진 목걸이에 키스. 3월14일 미국전 4회초 2사 만루서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밤하늘을 향해 날린 김병현의 어퍼컷 세리머니에 미국 더그아웃은 일순간 숙연해지기도. 스즈키 이치로(사진)의 패배 세리머니도 압권. 오승환이 아라이와 다무라를 연속 삼진으로 잡고 경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하자 이치로는 더그아웃에서 ‘괴성’을 질렀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날”이라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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