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4

2006.02.28

‘충절과 명예’ 이미지 … 실제는 죽음의 칼날 걸으며 고독

  •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1627@hotmail.com

    입력2006-02-27 1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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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절과 명예’ 이미지 … 실제는 죽음의 칼날 걸으며 고독
    영화 ‘바람과 라이언’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강인한 인물로 나온다. 미국의 천연기념물 격인 그리즐리 곰 흉내를 내며 으르렁거리는 루스벨트는 실제로도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니 대단한 아이러니다.

    1900년대 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재정난 때문에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맺으려고 하는데, 이때 중재에 나선 이가 루스벨트다. 결국 양국은 포츠머스조약을 맺는데, 사실은 일본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하는 부당한 조약이었다. 이 조약의 바닥에는 이른바 카쓰라-태프트 밀약, 즉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양해한다는 담합이 있었다. 이 밀약은 뒷날 을사조약의 시발점이 된다.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조약이긴 했지만 루스벨트는 개인적으로도 일본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계기는 ‘무사도’라는 책이었다. 당시 서구 사회의 베스트셀러였던 ‘무사도’는 서구에 일본을 신비롭고 우아한 나라로 인식시켰다. 무사도가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를 가리키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서구에서 동양문화에 대한 신비감은 일본이라는 ‘창’을 통하는 경우가 많다. 적잖은 서구인들은 동양문화 하면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와 동일시해버린다. 긴 칼을 차고, 주군에 대한 충절과 명예를 위해 할복도 서슴지 않는 사무라이의 이미지는 사실 서구인들에게는 매력적인 것으로 비치기 쉽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킬빌’에서 드러내는 것도 사무라이에 대한 경배심이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브라이드는 총이 아니라 일본도를 휘두르며 복수에 나선다.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도 사무라이 숭배자다. 그는 영화 ‘라쇼몽’을 보고 구로자와 아키라를 흠모해 아키라가 만든 사무라이 영화 ‘가케무샤’의 제작을 지원했다.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의 할리우드 버전이 바로 ‘황야의 7인’이다.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로닌’은 ‘낭인’을 영어식으로 옮긴 것이다.



    사무라이는 한국 어린이에게도 파고들고 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만화 ‘바람의 검심’은 메이지유신 일파의 최고 칼잡이였던 히무라 겐신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사무라이는 사실 군인이자 선비였다.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주인공인 알그렌 대위는 사무라이 부대에 포로로 사로잡힌 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사무라이 정신에 마음을 빼앗긴다.

    최고의 사무라이로 알려진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는 검술서이면서도 수양서로, ‘합리적으로 사물의 이해와 득실을 분별할 것’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본질을 감지할 것’ 등의 9계명은 매우 철학적이다.

    최근 일본의 보수지 요미우리(讀賣)신문의 와타나베 회장 겸 주필이 고이즈미 총리 비판에 나서 화제다. 흥미로운 대목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에 대해 “‘천왕폐하 만세’를 외치며 용맹과 기쁨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한 것이다. 사무라이 정신의 계승자를 가미카제 특공대였던 것으로 알고 있던 이들에게는 충격적인 고백이다.

    할리우드도, 일본도 늘 죽음의 칼날 위에서 치열하게 삶을 성찰했던 고독한 사무라이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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