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1

2006.01.31

한국 블록버스터 ‘이유 있는 재앙’

100억대 제작비 들인 ‘태풍’ ‘청연’ 참패, 44억 투입 ‘왕의 남자’ 대박 … 돈보다 ‘드라마’가 성패 갈라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6-01-25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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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블록버스터 ‘이유 있는 재앙’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가운데 작은 사진) 이후 돈을 많이 쏟아부은 영화들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기획력 부재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청연’ ‘아 유 레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9로스트메모리즈’ 그리고 최근작 ‘태풍’(위부터).

    영화홍보사 ‘영화인’ 직원들은 요즘 서로 눈치가 보여 “사무실보다 외근이 편하다”고들 말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명암이 엇갈린 세 편의 영화 홍보를 이 회사가 맡았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사상 최대 제작비(150억원, 홍보비 포함 190억원)를 쓴 ‘태풍’과 한국 영화사상 최대 관객 수 동원(21일 만에 500만명 동원)을 꿈꾸는 ‘왕의 남자’, 2006년의 ‘재앙’이 될 것이 확실시되는 블록버스터 ‘청연’(1월8일 현재 50만명 동원)이 이 회사의 홍보작이다.

    ‘영화인’의 한 직원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들을 홍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번처럼 극단적으로 비교되기는 처음”이라고 말한다. 흥행 성적의 향배는 기본적으로 제작자 측에 달려 있지만, 홍보대행사로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제멋대로식 제작과 방만한 운영으로 제작비 낭비 ‘심화’

    스크린 확보 수의 추이를 보면 세 영화의 운명은 더 극명해진다. ‘태풍’이 개봉 첫 주 540개관에서 현재 105개관으로 줄어든 데 비해, ‘왕의 남자’는 255개관에서 시작해 388개까지 늘어났다가 현재 361개관을 유지하며 ‘설 연휴 때 가장 보고 싶은 영화 1위’로 꼽히고 있다. 330개관으로 개봉했던 ‘청연’은 파장 분위기가 역력하다.

    ‘왕의 남자’는 ‘키드캅’ ‘황산벌’을 찍은 이준익 감독의 세 번째 작품. 순제작비 44억원(2005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한국 영화의 평균 순제작비는 27억3000만원, 영화정보회사 아이엠픽처스가 집계한 상업영화 평균 제작비는 45억원이다), 특A급으로 분류되지 않는 감우성과 정진영이 출연했다. 반면 2001년에 818만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태풍’은 엄청난 제작비에 아시아의 스타 장동건과 이정재를 내세웠고, 더욱이 CJ 투자배급(CGV)이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갖췄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남자’가 ‘태풍’을 잠재울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태풍’이 지나가자 그동안 숱하게 제기됐던 질문이 다시 나오고 있다. ‘한국적 블록버스터’는 ‘불완전한 기획과 도박’의 동의어일 따름인가. 2006년에 선보일 또 다른 블록버스터인 ‘괴물’ ‘중천’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블록버스터란 ‘규모의 경제’ 논리에 입각해 스타 캐스팅과 대규모 제작비를 투입한 뒤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주로 여름철 전 세계 영화관객을 대상으로 ‘기획’하는 영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지금도 ‘제작비를 많이 쓴 영화’ 이상의 의미를 얻지 못하는 실정. 1999년작 ‘쉬리’(제작비 35억원)에 “돈이 많이 들었다”고 자랑하던 홍보성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형 블록버스터=재앙’이라는 현상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한국 블록버스터 ‘이유 있는 재앙’

    ‘단돈’ 44억원을 쓴 ‘왕의 남자’. 성공한 연극을 영화화함으로써 영화화에 따르는 부담을 최소화했다.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제작 뒷얘기를 들어보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중간급 영화로 시작했다가 현장에서 감독의 ‘예술성’을 만족시키느라 예산이 두 배로 늘어나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된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 어떤 작품은 영화에 필요한 무기나 도검류를 간단하게 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밀수해오다 불필요한 돈과 시간을 낭비했고, 대규모 인원이 해외 로케이션을 갔으나 현지 엑스트라들과 의사소통이 안 돼 촬영분을 다 버리고 다른 나라에서 재촬영한 경우도 있었다. “제멋대로 제작과 방만한 운영”(영화평론가 정성일)이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한마디 말로 다 양해가 됐던 것이다. 제작비가 클수록 투자자가 몰리는 기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영화계는 ‘2002년 충무로 3대 재앙’으로 꼽히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아 유 레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로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그 뒤로도 지하철 재난영화 ‘튜브’(2003년), 애니메이션 ‘내추럴시티’(2003년), ‘역도산’(2004년), ‘남극일기’(2005년) 등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으나 실패한 블록버스터들이 잇따랐다.

    ‘아유레디?’ ‘튜브’ ‘역도산’ ‘남극일기’도 잇단 흥행 실패

    참패의 원인은 거의 같았다. ‘드라마가 없다’는 것. 관객을 분석하고 철두철미한 사전작업을 하는 일에 제작비가 쓰인 것이 아니라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부분에 소모됐기 때문이다. ‘태풍’의 최대 취약점도 드라마를 신파(영화에서 ‘뽕끼’라 부르는)로 대충 때우려고 한 스토리에 있다는 게 중평. ‘태풍’의 최소 손익분기점인 국내 관객 500만명을 채우려면(이는 국민 10명 중 한 명이 영화를 봐야 한다는 얘기다) 다양한 층위의 의미가 필요하다. ‘왕의 남자’의 경우 젊은층에겐 ‘크로스섹슈얼’ 코드, 장년층에겐 ‘우리 것’, 진지한 사람들에겐 정치적 함의, 오락물 소비자에겐 떠들썩한 소극(笑劇)으로 이해된다.

    “곽경택 감독이 영화사를 직접 운영하면서 ‘태풍’을 아시아권 블록버스터로 만들겠다는 부담감이 컸던 것 같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돈을 벌려면 기획단계에서부터 아시아 대중의 관점에서 봐야지 단순히 한류 스타를 쓴다고 블록버스터가 되는 건 아니다. 제작비 60억~70억원이 넘는 영화를 만든다면 무조건 아시아권 영화로 기획해야 한다. 아시아에서 어필하지 못할 것 같은 영화라면 과감히 ‘내수용’으로 바꾸고 규모를 줄여야 한다. 그것이 돈을 댄 투자자에 대한 제작자의 양심이다. 한국인만을 위해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것은 자살행위다.”(영화제작자 K 씨)

    덩치 큰 블록버스터 영화의 성패는 영화산업 전체에 영향을 준다. ‘쉬리’가 성공하자 창투사들의 돈이 충무로에 넘쳐났다가 ‘충무로 3대 재앙’ 이후엔 거의 빠져나갔다. 당시엔 강우석 감독과 강제규 감독조차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해외시장을 전전했을 정도였다.

    요즘 한국 영화계엔 ‘돈은 넘쳐나는데 시나리오가 없다’는 아우성이 높다. 2006년 1월 현재 한국영화진흥위원회가 참여한 영상투자조합만 21개에 2370억원(출자액) 규모이고, 이외에 기업들이 500억원을 투자해 영상투자조합을 만드는 등 돈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실패한 블록버스터가 날린 돈은 결국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한 ‘수업료’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 영화가 외국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블록버스터가 선봉에 서야 한다”는 문봉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국내기획팀장의 말이 그런 맥락이다.

    올해 개봉할 3편의 블록버스터 역시 어떤 식으로든 영화계를 뒤흔들 것이다. ‘괴물’(봉준호 감독, 제작비 90억원)을 제작하는 ‘청어람’ 최용배 대표는 “컴퓨터 그래픽에 예산의 절반이 들어간다. 바이어들은 괴물의 모습이 사실적이라면 유럽에서도 팔릴 것”이라고 자신한다. ‘괴물’은 한류 스타 없이 기획만으로 일본에 선(先)판매됐다고 한다.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충실하게 만들고 있다는 얘기다. ‘태풍’의 후폭풍은 이미 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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