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1

2005.02.01

“태평양전쟁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입력2005-01-26 19: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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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협정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이 자료는 당시 한국 정부가 무책임하게 일본 정부와 야합한 흔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문서대로라면 한국 정부는 당시 경제 재건을 위한 청구권 자금 액수에 집착하는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구걸에 나선 정부의 전략 부재와 초초함도 읽힌다. 일본 정부의 부도덕도 보인다. 일본은 이를 이용,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보다 한국인 강제동원 희생자 관련 자료를 감추고 주도면밀하게 개인 청구권마저 소멸시키려는 작태를 보였다.

    한-일협정 문서는 이를 추인하는 역사적 증명이다. 해방 이후 60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보상도,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떨고 있는 희생자들은 이 턱없이 어두운 현실에 절망한다. 그들은 정부를 향해 “태평양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부르짖는다. 정부는 과연 그들에게 무엇이고, 지금 정부는 그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정부는 지금이라도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에게 개별 보상하거나 생활안정 지원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특히 국민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밑거름으로 작용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희생자 개별 보상 제의를 거부하고 받은 무상자금 3억 달러 가운데 상당 부분을 포항제철 및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 개발에 사용했다.

    한일 정부, 전쟁 피해자 보상 ‘바람직’

    합리적 방안을 제시한다면, 한국 정부는 보상에 준하는 생활안정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일본 정부도 재협상을 통해 추가 보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관련자료 일체를 제공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 나아가 정부는 한-일회담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위안부, 근로정신대, 원폭피해자, 사할린 거주 한인 등에 대한 재협상과 추가 보상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보상보다는 생활안정 지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부는 1975년과 77년 사이 희생자 8552명에게 1인당 30만원씩 제한적이나마 보상을 실시했다. 그 후 보상에서 제외된 피징용자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재판부는 한-일협정 및 보상입법을 통해 종료된 사안이라고 기각했다(96년 10월). 16대 국회 때 위안부생활안정지원법이 제정된 선행 입법례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상보다는 지원 방안이 설득력이 높다고 생각한다. 물론 보상이냐, 지원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합의는 도출해야 할 선결과제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희생자를 개별 보상할 경우, 부실한 것으로 드러난 한-일협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일본 정부의 배상 및 보상 책임에 면죄부를 줄 우려도 있다. 정부는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와 생존자협회 등 관련단체들이 “배상과 보상은 일본 정부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도 상기해야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해 필자는 ‘태평양전쟁 희생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안’(이하 생활지원법안)을 마련해 2004년 6월 대표 발의한 바 있다. 또 다른 특별법을 마련,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자는 의도로 제출된 이 법안은 태평양전쟁 희생자 관련단체와 사전협의를 거친 것이다. 재적의원의 40%에 달하는 117명의 여야 국회의원들도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그런 만큼 이 법안을 수정·보완하여 조속히 입법을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생활지원법안은 일제에 강제 동원되었던 군인, 군속, 노무자, 여자근로정신대, 일본군위안부 등의 생존자 및 유족에 대해 생활안정지원금과 생계 및 의료급여 등을 지원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법안심의 과정에서 한-일협정 당시 제기되지 않은 원폭피해자, 사할린 거주 한인 등에 대해 정부 책임이 없더라도 인도적 견지에서 지원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한-일협정 당시 제기되었으나 보상·지원이 되지 않은 상이자, 유족 지원, 미신고 피해보상 등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는 책임지고 생활안정을 지원해야 한다.

    한-일협정 문서 공개는 이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벌써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국회 내에 설치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국회 차원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면 일본 의회와 협력하여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의회에 과거사 청산 및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기구 구성 방안을 모색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한-일협정 외교문서 공개나 피해자 지원 문제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일은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다. 정치권과 정부는 이 점을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역사가 E.H.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동남아 지진해일 피해복구에 5억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 일본은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된 한국인 희생자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 그들이 전향적 자세를 보인다면 한국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도 환영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 복 심 /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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