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6

2004.08.05

패러디 발 묶는 것은 어리석은 길

  • 최영일 / 디지털경제칼럼니스트 woody01@lycos.co.kr

    입력2004-07-30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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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디 발 묶는 것은 어리석은 길
    패러디의 수난시대가 도래했다. 야당 지도자에 대한 풍자 패러디가 벌집을 쑤셔 정가와 국회가 시끄러웠는가 하면, 총선 전 정치가들에 대한 패러디를 만든 대학생은 벌금형에 처해졌다(150만원! 대학생에겐 적지 않다). 당사자는 항소의 뜻을 밝혔고, 법조계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처사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인터넷은 패러디의 파라다이스다. 정치인만 패러디되는가? 아니다. 연예인을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패러디된다.

    필자도 패러디된 적이 있다. 어느 날 아침 인터넷 게시판에 들러보니 영화 ‘해피엔드’ 포스터에 전도연과 나란히(황송하게도!) 등장해 있었다. 물론 서로 아는 사이버 친구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에서의 장난이었다. 그만큼 패러디는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 즉 ‘언제든 나도 패러디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패러디의 역사는 생각보다 장구(長久)하다.

    아마도 인류 역사, 특히 의사소통과 기록의 역사에서 앞장을 차지할 것이며 패러디라는 말 자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등장할 정도다. 우리나라 문화 속에서도 ‘패러디’라는 말이 안 붙었을 뿐 탈춤과 판소리, 한글소설과 풍속화 등에 패러디의 전통은 풍부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성향이 패러디에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패러디 현상 또는 운동은 사회적 고통과 소외, 신분과 빈부의 격차가 심할 때 더욱 강하게 일어나고 확산된다. 억압된 한과 분노를 직격탄이 아닌 우회적 풍자와 해학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풀고 대중적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춘향전’ 끝에 등장하는, 이몽룡이 변사또에게 써 보인 한시(漢詩)는 당시 온 백성의 한을 대변한 패러디 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패러디는 여타의 예술처럼 한 창작자의 개인 산물이 아니다. 널리 확산되는 패러디일수록 대중적 기반이 뿌리 깊다는 사회 구조적 분석이 필요하다. 독창성과 창의력도 중요하지만 좋은 패러디는 시대정신, 시대정서의 핵심을 꿰뚫을 때 생겨난다. 처음 볼 때는 엉뚱해서 웃지만 보면 볼수록 어울리지 않는 것의 조합이 절묘하다는 공감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디의 특성이 인터넷 매체의 익명성, 파급력과 어울려 과도한 패러디 공화국화되는 것에 역기능이 숨어 있지만 쓰레기더미 속에서 간혹 보석이 나오는 것이 원래 패러디의 생리인 것을 어쩌랴. 나쁜 의도에 의해 선전 선동의 도구로 패러디가 활용될 때 당사자에게는 사이버테러가 될 수 있으나 패러디 전체를 싸잡아 발을 묶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대응이다. 먼저 패러디 창작자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 즉 자신이 패러디물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받아들일 만한가 하는 기준을 갖고, 대부분 명망가와 공인들인 당사자가 좀더 여유로운 품성과 도량을 발휘한다면 좋겠다. 가장 재미없는 것이 결과적으로 패러디와 히스테리의 결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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