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8

2004.06.10

“제품결함 어디 한번 걸려봐라”

기업 상대로 맹활약하는 리콜 투쟁가들 … 전문지식·끈기로 무장 ‘업계엔 눈엣가시’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6-02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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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품결함 어디 한번 걸려봐라”

    ‘자동차 10년 타기 시민운동연합’의 임기상 대표

    이미 화장품 과장광고로 홈쇼핑업체가 2억4000여만원의 과징금을 물었는데, 화장품 수입업체가 소비자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에요.”

    카페 ‘로뎀사태대책모임’(http://cafe.daum.net/ro111)의 운영자 이지원씨(30·여·대학강사)는 5월18일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날아온 출두요구서를 받고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씨는 지난해 CJ홈쇼핑의 ‘천연화장품’ 과장광고로 논란이 된 로뎀화장품(주간동아 394호 보도)의 문제를 인터넷을 통해 알린 바 있다.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던 이씨는 “유럽에서 유명하다는 로뎀화장품이 프랑스 화장품 수백 종을 모아놓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왜 빠졌나”라고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CJ홈쇼핑은 로뎀화장품에 비타민C가 들어 있는 것처럼 허위광고를 했고, ‘전 유럽의 인기제품’이라며 과장광고를 해온 것. 비슷한 소비자들의 불만이 이어지자, CJ홈쇼핑은 소비자의 리콜 요구를 받아들였고,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억대의 과징금을 물고 사태가 일단락됐다.

    하지만 화장품 수입업체 ㈜게비스 코리아가 뒤늦게 이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 것.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업체가 정작 로뎀화장품의 방부제 문제를 이슈화한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에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씨는 “소비자의 알 권리를 위해 글을 쓴 것뿐인데 소송을 당하다니 어이가 없다. 만만한 소비자 한 명을 재물로 삼는 게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고 말했다.

    “제품결함 어디 한번 걸려봐라”

    ‘리콜뉴스’의 이동준 대표

    이처럼 소비자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리콜 투쟁을 벌이는 데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기술진과 법무팀, 자본력을 갖춘 기업에 맞서는 소비자는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기업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홍보성 정보에 반기를 들고 상품의 문제를 지적하는 소비자들이 있었기에 리콜제도가 더욱 빨리 정착할 수 있었다. ‘주간동아’는 한 사람의 소비자에서 활발한 리콜운동가로 변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리콜 자동차 절반이 임기상씨 문제제기로 이뤄져



    “제 별명이오? 자동차 업계의 오사마 빈 라덴이죠.”

    ‘자동차 10년 타기 시민운동연합’의 임기상 대표는 한국에서 ‘자동차 리콜 문제’를 이슈화한 대표적 인물이다. 우리나라 리콜 품목의 대부분이 ‘자동차’인 점을 감안할 때 그를 리콜제도 정착의 선구자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자동차 10년 타기 시민운동연합’ 사이트에 접수되는 자동차 불만 관련 사항은 하루 평균 100여건. 이는 건설교통부가 관리하는 ‘자동차제작결함 정보전산망’(www.car.go.kr)의 접수 건수를 훌쩍 넘어서는 수치다.

    자동차정비센터를 운영하던 그가 ‘리콜투쟁 활동가’로 변모한 때는 1998년 1월 ‘자동차 10년 타기 시민운동본부’를 개설하면서부터다. 시민운동본부는 1000여개 정비소들이 가입하여 시민운동연합으로 성장했다. 임대표는 99년 현대자동차 EF소나타의 엔진오일 누유 증상을 밝힌 일을 비롯해 최근에는 엔진 출력을 과장광고한 자동차 3사를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하기도 했다. 국내 리콜된 자동차들 가운데 절반은 임대표의 문제제기로 이뤄졌을 정도다. 임대표는 자동차 업계의 ‘눈엣가시’지만 동시에 없어선 안 될 ‘조언자’다.

    “제품결함 어디 한번 걸려봐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DVD의 리콜을 이끌어낸 윤형용씨

    “1987년부터 자동차정비센터를 운영하면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거나 장애인이 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지요. 남들은 자동차가 뒤집히면 운전자 탓만 했지만, 제 눈엔 자동차의 결정적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인터넷동호회·안티사이트들도 소비자 목소리 대변

    대학시절부터 자동차를 전공한 ‘자동차통’이지만, 한 개인이 대기업인 자동차 회사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는 건 쉽지 않았다. 최근엔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법률 지식을 쌓는 데도 여념이 없다. “1996년도 40여대에 그쳤던 자동차 리콜 대수가 2003년엔 120만대까지 늘어났다”며 “소비자 의식 수준의 성장이 가장 반가운 일”이라고 말한다.

    “제품결함 어디 한번 걸려봐라”

    레조 운전자들이 지난해 6월21일 인천 부평구 GM대우차 정문 앞에 모여 레조 엔진 결함과 관련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리콜제도의 갈 길은 멀다고 생각한다.

    “일부 기업의 늑장 리콜로 인해 답답한 소비자들이 먼저 수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자동차 관련법에 변제보상 규정이 없어 소비자는 이미 돈을 다 써버리고 제작사는 뒤늦게 생색만 냅니다. 이왕 해줄 것 빨리 해주는 게 좋지 않나요?”

    임대표가 자동차 리콜의 대부라면 ‘리콜뉴스’(www.recall news.co.kr)의 이동준 대표(38)는 모든 소비재에 대한 리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대표의 본업은 중앙대 창업보육센터의 웹 프로그래머. 하지만 최근엔 부업인 ‘리콜뉴스’ 사이트 운영이 주업이 됐다. 이 사이트의 가입자들은 다양한 리콜뉴스를 접하고 리콜 품목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이대표는 1999년 10월 새로 구입한 H사 승합차가 말썽을 일으키면서 리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비업체에 수리를 맡기고 해당업체에 항의도 해봤지만, 어디에서도 ‘속시원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미국 사이트를 검색하면서 ‘리콜제도’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리콜 사유가 어떤 것이고, 자신이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리콜로 골머리 앓는 사람들을 위해 아예 소비자를 대변하는 정보 사이트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이런 생각 끝에 2000년 3월 탄생한 것이 바로 ‘리콜뉴스’다.

    “제품결함 어디 한번 걸려봐라”

    DVD동호회 사이트에 올라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DVD에 관한 문제점 철저 해부기. ‘로뎀사태대책모임’의 홈페이지. ‘자동차 10년 타기 시민운동연합’의 홈페이지(위부터).

    ‘리콜뉴스’ 역시 각 업체에서 수십 건에 이르는 자발적 리콜을 이끌어냈다. 2002년 이 사이트의 회원들이 SK텔레텍이 출시한 ‘SKY IM-2100’ 전화기 케이스의 연결 부분에 대한 결함문제를 지적하자, SK텔레텍은 즉시 해당 전화기를 전량 회수하고 무상으로 케이스를 교체해주었다. 지난해 현대자동차의 아토즈 세미오토 기종의 리콜도 리콜뉴스의 작품이다. 이대표는 다른 소비자단체와 연대해 각 제품의 품질검사와 법령 해석·소송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때로는 회원을 직접 방문해 리콜 문제를 상담해주기도 한다.

    ‘소비자 리콜시대’의 또 다른 주체는 각종 인터넷동호회와 안티사이트들이다. 자동차동호회, 디지털카메라동호회, DVD동호회, 휴대전화동호회 등의 회원들은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으로 제품 개발에 직접 참여하거나 품질개선을 요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2002년 12월 한 DVD동호회 사이트(www.dvdprime.com·대표 박진홍)에 올라온 아이디 ‘디비거’의 글은 DVD제작사 대원C&A의 자발적 리콜을 이끌어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업체가 제작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DVD가 타이틀 구동시 화면에 가로줄무늬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 논란이 됐다. 소비자들은 이 DVD에 대한 플레이어별 구동실태 조사까지 벌이며 제작사를 압박했지만 업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나 ‘디비거’란 아이디로 활동한 윤형용씨(32)가 ‘센과 치히로 문제점 철저 해부’란 글을 통해 이 DVD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분석해내자 제작사가 리콜 요구를 받아들이고 공식사과문까지 발표했다. 그의 필력과 풍부한 전문성 앞에 제작업체가 무릎을 꿇은 것.

    VOD용 동영상을 만들어온 윤씨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당시 최고 판권 금액을 기록한 명작인 만큼 소비자로서 문제제기는 당연했다”며 설명했다. 그러나 윤씨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소비자 스스로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소비자들의 무리한 요구를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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