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6

2004.05.27

11가구 그들만의 전쟁터 ‘풍동’

거주민들, 주공 강제철거에 맞서 물리적 충돌 … 현실성 없는 보상책에 ‘외로운 사투’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05-19 19: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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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가구 그들만의 전쟁터 ‘풍동’

    검은 스키마스크를 쓴 남자들이 풍동 철거촌을 지키고 있다.

    ”거기 서요. 어디서 왔습니까?”검은 스키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한 남자가 건물 망루 위에서 소리쳤다.

    5월13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구 풍동 369-16번지 철거지역. 막 폭격을 맞은 듯 참혹한 풍경의 거리를 복면 쓴 사내들이 지키고 있었다. 거의 모든 건물이 철거돼 폐허가 된 거리에 을씨년스레 서 있는 풍동 철거민대책위원회(이하 풍동 철대위) 건물 쪽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시커멓게 전소한 채 방치돼 있는 승용차와 거리에 가득한 깨진 유리더미, 곳곳에 굴러다니는 불발 화염병과 유리구슬은 이곳이 일산이 아니라 이라크의 어느 격전장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살풍경했다.

    기자를 확인한 풍동 철대위 채남병 위원장(45)이 건물 밖으로 걸어나올 때까지 10여분간, 거리는 ‘저 자가 적인지 아군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풍동에 재개발이 본격 시작된 시점은 2000년 10월. 인근 25만3000여평을 개발하는 대한주택공사(이하 주공)가 가옥주들을 이주시키고 철거를 시작하면서 이에 불응하는 이들과의 갈등도 시작됐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당수 주민들이 이곳을 떠났지만, 아직도 이주를 거부하는 11가구 주민들이 한 건물에 모여 ‘현실적인 주거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상태. 5월8일 바로 이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주공이 고용한 용역회사 직원들이 들어오면서 풍동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참혹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화염병·새총 등장 … 양측 부상자 속출

    “오전 3시 반에 갑자기 ‘용역’들이 들이닥쳤어요. 지금처럼 몇몇이 망루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한꺼번에 200여명이 몰려드는데 당할 방법이 없었지요. 그쪽에서 먼저 화염병을 던지고, 새총으로 유리구슬을 쏘아 우리 주민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그날 오후 8시까지, 16시간 넘게 계속 대치했으니 이 정도 피해도 다행 아닙니까. 주민들이 예민해져 있을 수밖에 없어요.”

    풍동 철대위는 이날 용역회사 직원들이 화염병과 유리구슬 등을 준비해 철거민을 ‘선제 공격’했다며 분노하고 있었다. 풍동 철대위 측이 찍어 공개한 사진에는 용역 직원들이 트럭을 이용해 화염병과 새총을 옮기는 모습, 주변 건물 옥상의 벽을 방패막이 삼아 조직적으로 새총을 발사하는 모습, 불을 지르는 모습 등 갖가지 ‘공격’ 장면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때문에 서민을 위한 주택을 짓는다는 주공이 폭력까지 동원해 강제철거를 시도한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상태다.

    11가구 그들만의 전쟁터 ‘풍동’

    풍동 철대위 건물을 향해 새총을 쏘고 있는 용역 직원들(위)과 그 새총에 맞아 부상한 주민.

    문제는 앞으로 이 같은 충돌이 다시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 주공 관계자는 “물리적 충돌이 벌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법을 넘어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부 주민들 때문에 주공과 다수의 입주 예정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일단 주민들이 무단점거를 풀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했다. “현장에서 봤을 때 용역 직원들이 가한 폭력보다 철거민들이 저지른 폭력이 훨씬 심했다. 조직적으로 불법점거와 폭력을 일삼는 이들을 그냥 둔 채 철거 자체만 문제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700만원 받고 나가라니 … 길에 나앉을 판”

    하지만 이주를 거부하고 있는 풍동 철대위 소속 주민들은 “주공이 이런 폭력까지 사용한 마당에 무엇이 더 두렵겠느냐. 이곳에서 결코 떠날 수 없다”며 주공이 현재 내놓은 보상책을 받을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4월 말부터 주공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단전 단수된 집에서 살고 있는 주민 김안숙씨(77)는 “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주위의 임대료가 갑자기 두세 배씩 껑충 뛰었다. 그 전에는 보증금 500만원, 월세 20만원 정도 하던 집들이 갑자기 1000만원에 50만원을 달라고 할 정도다. 그런데도 주공은 4인 가족 기준으로 700만원가량의 이주지원금을 받거나,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를 따로 내는 공공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아서 무조건 나가라고 한다. 월 수입 100만원 선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냥 거리로 나앉으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11가구 그들만의 전쟁터 ‘풍동’

    풍동 철대위 건물 위에서 한 주민이 보초를 서고 있다(왼쪽). 풍동 주민들은 용역 직원들이 새총에 골프공까지 넣어서 쏘았다고 말한다. 당시 건물 안으로 들어온 골프공, 유리구슬 등을 들어 보이는 주민 김안숙씨.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주택 값이 무리하게 오르지 않도록 일단 가수용 시설을 지어주고, 영구 임대주택을 건설해 주민들이 입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지금껏 살던 지역에서, 지금껏 지내온 수준의 주거 환경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주민들과 주공 사이에 개발을 둘러싼 기본적인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 이창수 경원대 도시학과 교수는 “개발업체는 낙후된 지역을 개발해 더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원주민들은 주거 환경이 나아지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살아온 지역에서 계속 살기를 바란다. 관점의 차이가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98년 입주가 완료된 성동구 옥수 8구역의 경우 원주민 입주율이 12.7%에 불과할 정도로, 재개발 이후 원주민이 그 지역에 다시 터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상실감이 커지고, 철거 반대 싸움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채위원장은 “지금의 재개발은 가옥주를 세입자로, 세입자를 노숙자로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자기가 살던 지역에서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나 훨씬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내몰려야 하는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며 “지금이라도 돈 많은 이에게 또 한 채의 집을 살 기회를 제공하는 재개발 정책을 버리고 원주민에게 나은 주거 환경을 보장하는 방향의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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