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7

2004.01.08

대한전선 돈놀이 파이프 고장났나

부동산 개발회사 1300억원 대여 ‘후유증’ … 풍부한 유동성 사업 다각화 추진 중(?)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3-12-31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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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전선 돈놀이 파이프 고장났나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선인상가 매각차익이 대한전선의 ‘보이지 않는’ 개입으로 해외에 빼돌려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작은 사진은 선인상가 내부.

    대한전선 편법 상속 의혹비상장 계열사 이용 100억 세금 물고 회사 물려받아2003년 11월14일 현재 대한전선의 1대 주주는 32.44%를 보유한 설원량 회장(사진)이다. 2대 주주는 수·출입 및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삼양금속으로, 29.94%를 갖고 있다. 삼양금속은 1999년 말에는 대한전선 지분 18.83%를 갖고 있었으나 이후 꾸준히 장내 매수를 통해 지분을 확대, 2002년 말에는 30.92%까지 보유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대한전선이 삼양금속을 사업 지주회사로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설회장이 대한전선의 안정적인 지분을 확보했는데도 굳이 삼양금속을 내세워 대한전선을 지배하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삼양금속의 주주 구성을 보면 금방 풀린다.

    2003년 말 현재 삼양금속의 최대 주주는 설회장 장남 윤석씨로, 48%를 갖고 있다. 설회장 2남 윤성씨가 보유한 지분까지 합치면 설회장 두 아들은 이 회사 지분 81%를 가져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설회장 두 아들은 비상장 계열사인 삼양금속을 지배함으로써 대한전선 경영권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부 재벌 그룹이 즐겨 이용하는 비상장 계열사를 통한 편법 경영권 승계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더욱이 삼양금속은 직원이 3명인 단출한 회사다. 이 때문에 대한전선 경영권 상속을 위해 만든 ‘실질적인’ 페이퍼 컴퍼니가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삼양금속 관계자는 “삼양금속은 대한전선의 구리 수입을 대행할 뿐 아니라 부동산 임대업도 하는 등 실질적인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면서 “직원들의 업무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3명으로 충분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2002년의 경우 삼양금속 전체 매출액은 688억원. 이 가운데 615억원이 대한전선에 구리를 납품한 대금이다. 삼양금속 관계자는 “부당 내부거래를 통해 대한전선 자산을 부당하게 삼양금속으로 이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2003년 7월 국세청 조사에서도 별 문제가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설회장 두 아들은 99년 아버지로부터 현금을 증여받아 증여세 60억원을 낸 후 삼양금속 지분을 매입했다. 또 2000년과 2000년 두 번에 걸쳐 국세청으로부터 주식 이동조사를 받고 일부 세금을 추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설회장 두 아들은 100억원 안팎의 세금을 물고 2003년 9월 말 현재 총 자산 1조6760억원의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된 셈이다.

    LG전선과 함께 국내 전선업계를 선도해온 대한전선(회장 설원량)의 ‘현금 장사’에 탈이 났나.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부실기업을 인수하거나 다른 기업에 거액을 빌려줘 재계의 부러움을 샀던 대한전선이 한 부동산 개발회사에 대여한 1300억원으로 인해 ‘후유증’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대한전선측은 현금 대출 및 회수 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조하지만 이 부동산 개발회사는 대한전선의 ‘보이지 않는’ 개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며 법에 호소하고 나섰다.

    대한전선은 그동안 현금 대출로 본업 못지않은 쏠쏠한 재미를 봐왔다. 이 회사 공시자료에 따르면 2003년 12월 중순 현재 5곳에 총 3857억5700만원의 현금을 대여해주고 있다. ㈜진로 담보채권을 인수하는 데 2737억6600만원의 거액을 들인 것을 비롯해 선인사업㈜ 임차인조합에 810억9600만원, 르메이에르건설㈜에 200억원, ㈜지에프네트워크에 100억원, ㈜한터디앤디에 8억9500만원을 빌려준 상태. 이들 기업 입장에서는 대한전선이 은행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전선 돈놀이 파이프 고장났나


    대한전선 돈놀이 파이프 고장났나

    대한전선이 경영권 인수를 선언한 (주)진로의 소주 공장.

    대한전선의 풍부한 유동성은 무엇보다 이 회사가 지난 2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흑자를 기록해온 데다 최근 적자사업 부문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에도 성공했기 때문. 대한전선의 2003년 3·4분기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의 이익잉여금은 9월 말 현재 1540억원이나 된다. 여기에 2003년 여름 서울 시흥공장을 처분, 약 1300억원의 현금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목에 이르면 대한전선이 도대체 어떤 회사이기에 이처럼 튼실할까 하는 의문을 가질 법하다. 그러나 대한전선의 역사를 조금만 알면 그 의문은 금방 풀린다. 대한전선은 1950년대 재계 서열 4위였던 대한그룹의 후신으로, 초고압 케이블 광케이블 등 전선사업과 스테인리스가 주 사업이다. 창업자인 고 설경동 회장 3남 설원량 회장이 1대 주주다. 창업자의 장남과 차남은 대한방직, 4남은 대한제당그룹을 가지고 각각 독립했다.

    대한전선은 적어도 최근까지만 해도 ‘현금 장사’에서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요즘과 같은 저금리 시대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자금 운용은 없다고 할 정도다. 가령 르메이에르건설㈜에 대출해준 것은 서울 종로구 청진동 재개발과 관련한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다. 재개발 완료 후 발생하는 수익금 중 일부를 분배받기 때문에 수익률은 은행 금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2002년 6월 부동산 개발업체 ㈜지포럼에이엠씨(이하 지포럼)에 금융중개업체 클레리온 캐피탈(이하 클레리온)의 알선으로 1300억원을 대여해준 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물론 피상적으로 보면 대한전선은 연리 25%로 빌려주었기 때문에 큰 수익을 올렸다. 대한전선 공시자료를 보면 2003년 12월 중순 원리금 1718억원 가운데 907억원은 이미 현금으로 회수했고, 나머지 811억원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선인상가 임차인조합이 대신 갚기로 되어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 대해 지포럼측이 강력하게 반발한다는 점이다. 대한전선의 원리금 회수 과정에서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초 선인상가는 지포럼측이 대한전선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원 소유주였던 선인산업㈜으로부터 1400억원 가량에 매입했다. 지포럼은 이를 다시 선인상가 임차인조합에 2150억원에 매각할 예정이었다. 실제 이런 방향으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포럼으로서는 대한전선 대출금 원리금을 갚고도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 만도 했다.

    그러나 지포럼측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서 사태가 꼬이기 시작했다. 클레리온측은 지포럼측이 대출 기한 내에 대한전선 대출금을 갚기로 한 계약을 위반했다면서 자신들의 주도로 선인상가를 2150억원에 처분, 정산을 마쳐버린 것이다. 물론 지포럼측은 클레리온측이 오히려 계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양쪽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진실은 법정에서나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선인상가 매각을 통해 매각차익 432억원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지포럼측이 문제삼고 있는 대목은 바로 이 차익금의 행방이다. 지포럼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설사 지포럼측이 계약을 위반했다고 해도 대출금 원리금을 제외한 매각차익은 지포럼측에 떨어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포럼은 클레리온측이 사기 및 공갈로 매각 차익을 독차지했다고 2003년 11월 클레리온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소했다.

    지포럼 관계자들은 매각차익 가운데 상당한 금액이 해외 페이퍼 컴퍼니로 의심되는 L, S사에 송금될 예정이어서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지포럼 관계자는 “클레리온측이 L, S사를 설립했다고는 하나 상식적으로 선인상가 매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L, S사에 매각차익이 송금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이 때문에 대한전선이 클레리온이라는 위장 대리인을 내세워 매각차익을 해외로 빼돌리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대한전선이나 클레리온 관계자들은 이런 의혹에 대해 “한마디로 소설 같은 얘기”라고 일축한다. 대한전선 관계자는 “대출 만기가 지나도 상환되지 않자 클레리온측에 계약대로 ‘당신들이 대지급하든지 아니면 담보물건인 선인상가를 팔아서라도 상환하라’고 압박해 원리금 1718억원을 받은 것뿐이고, 그외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클레리온 관계자들도 “계약대로만 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클레리온의 실체를 의심해온 측에서는 대한전선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클레리온과는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라는 대한전선측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다는 것. 지포럼 관계자는 “클레리온의 미국 본사라는 클레리온 파트너스 주소는 한 개인의 아파트 소재지인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클레리온 파트너스는 이름만 존재하는 ‘유령 회사’라고 주장했다.

    클레리온측은 또 그동안 주로 대한전선측에서 자금을 융통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CC 파트너스가 쌍방울의 실질적 소유주였던 SBW홀딩스(이하 SBW)를 인수한 자금도 대한전선 지주회사 삼양금속에서 빌린 180억원이었다. 여기에 클레리온 관계회사로는 클레리온 캐피탈 아시아, 클레리온 파트너스, CC 파트너스 등이 있었지만 모두 서울 중구 다동 한미은행 빌딩 11층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있었다는 점도 의심스럽다는 것.

    진로 정리계획안 법원에 제출

    2003년 11월 무렵 이 사무실을 폐쇄한 배경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지포럼 관계자들은 “검찰에 고소한 이후 갑자기 사무실을 폐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클레리온 관계자들은 “지포럼측이 괴롭혀서 어쩔 수 없이 폐쇄했다”고 반박했다.

    한편 대한전선이 최근 보인 부실기업 인수 행보는 재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대한전선은 12월 말 쌍방울의 실질적인 최대 주주로 올라섬으로써 경영권 인수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을 낳고 있다. 대한전선은 이전에 쌍방울 지분을 8.3%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번에 장내 매수 및 경매낙찰 등의 방법으로 292만주를 116억원에 사들여 20.53%로 늘렸다.

    현재 쌍방울의 최대 주주는 2003년 11월 부도를 낸 SBW로, 20.76%를 가지고 있다. SBW는 국세 체납으로 남대문세무서가 11.99%의 지분을 압류함에 따라 지분율이 이전 32%에서 20.76%로 떨어진 상태. 쌍방울은 부실기업 이미지를 벗고 영업이익을 창출하는 등 미래 성장성이 높은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한전선은 또 2002년 1473억원을 투자해 무주리조트를 전격 인수했다. 이어 2003년 여름에는 2738억원을 들여 법정관리 중인 ㈜진로 담보부 채권을 확보, 실질적인 최대 채권자가 됨으로써 진로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금융기관을 제외하고 자산가치가 1조원이 넘는 기업 매물은 당분간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점에서 진로 인수전은 재계 판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로는 현재 매년 영업이익을 1000억원 이상씩 내는 알짜 회사로 변신했다.

    전선업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행보

    대한전선은 12월 중순 진로의 기업가치를 1조3000억원으로 평가하고 이 가운데 6000억원은 자본금으로, 7000억원은 부채로 떠안겠다는 내용의 정리계획안을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이 안에 대해 다른 채권자들이 동의한다면 진로는 대한전선의 손으로 넘어간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대한전선은 진로의 최대 담보권자여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는 평가다.

    대한전선의 최근 왕성한 ‘식욕’에 대해 재계에서는 전선이 사양산업이라고 판단, 사업을 다각화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대한전선은 2003년 여름 시흥공장 매각에 앞서 2000년에는 중국 현지법인을 청산하는 등 전선업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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