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5

2003.12.25

극한의 땅, 기회의 땅 ‘남극 도전’

세종기지 대원들, 미지의 땅에 대한 동경·연구 열정으로 추위·외로움 극복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3-12-18 15:2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남극에서는 언제 왔다 언제 간다는 말을 하지 말라.”

    남극을 방문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다. 극한의 자연 속에서 인간의 들고남을 기약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무려 1만7240km나 떨어진 미지의 땅. 연구를 위해 남극에 머물던 한 젊은이가 광활한 자연 한가운데서 숭고한 죽음을 맞았다. 11월20일 남극 땅을 처음 밟았던 전재규 대원(27)은 12월12일 싸늘한 주검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눈보라와 차가운 바닷물이 한 생명을 앗아갔지만, 극한 자연에 끝까지 맞선 전씨의 프런티어 정신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전씨의 죽음으로 ‘남극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영하 수십도에 이르는 살인적 추위와 위험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남극으로 떠나는가.

    살인적 추위·위험한 환경에도 매력적인 연구처

    숨진 전씨는 해양연구원 홈페이지의 자기소개서에 “남들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남극 생활을 경험하고, 자연환경을 알고 싶어서 남극에 간다”고 밝혀놓았다. 서울대에서 지구물리학 석사과정을 밟으며 지질학 연구에 매진했던 그는 남극 생활을 통해 논문에 대한 영감을 얻고자 했다. 아버지 전익찬씨(55)는 “재규는 과외공부 한번 안 시켰지만 성실하게 공부한 아들이었다”며 “살아 있다면 나라에 공헌하는 훌륭한 학자가 됐을 것”이라며 눈물을 삼켰다. 전씨와 함께 서울대 아마추어 천문동아리 ‘AAA’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기 임성묵씨는 “재규는 동아리에서 ‘학술세미나’를 자리잡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천문학 공부에 매달렸다”고 그를 기억했다. 달을 사랑해 ‘문 옵저버스 핸드북(Moon Observer’s Handbook)’이란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달의 역사’ ‘달의 운동’ ‘달의 물리적 상수’ 등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기도 했다. 주변인들이 말하는 전씨는 ‘무뚝뚝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전씨와 같은 연구원들에게 남극은 매력적인 연구처다. 남극은 기상, 지구물리, 지구중력, 지자기, 지진, 해수특성 변화, 고층대기특성 변화, 해양생물 등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하기 힘든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 때문이다. 세 차례 남극 세종기지에서 월동대 활동을 했던 정호성 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해외과학논문지인 SCI에 남극연구에 관련된 보고서가 상당 비중을 차지한다”고 소개했다. 매력적인 연구처이기 때문에 1년간 따르는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것. 반면 일각에서는 ‘남극기지’ 경험이 교수로 채용되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보수적인 대학들이 협소한 한 분야의 전문가보다 보편적 학문을 공부했던 학자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남극에 다녀오는 것이 연구의 흐름과 감각을 저해하기 때문에 그곳에 가기를 꺼리는 학자도 많다고 한다. 현실적 어려움과 극한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극으로 향하는 것은 ‘채 밝혀지지 않은 곳에 대한 동경’이 크게 작용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나 시설·장비를 담당하는 대원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들의 임무는 ‘연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보조역할’이기 때문이다. 극지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기술직의 경우 대개 한국에 머무는 것보다 나은 ‘경제적 혜택’ 때문에 남극행을 택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경제적 혜택으로만 이들의 남극행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연차가 얼마 되지 않는 기술직 대원은 연봉 3000만원을 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15차 월동대에서 전기전자를 담당한 설동욱씨는 “남극에 다녀온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인 것이 자랑스럽다”며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서 일하며 사회에 환원하는 보람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극한의 땅, 기회의 땅 ‘남극 도전’

    남극 세종기지는 남극 대륙의 끄트머리에 있는 킹조지섬에 자리잡고 있다. 남극 세종기지에 마련된 고 전재규 대원의 분향소에서 동료대원들이 절을 하고 있다(왼쪽부터).

    실제로 남극에 다녀온 사람들의 수는 400여명에 달한다. 1988년 세종기지가 마련된 이래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17차례 월동대를 파견했다. 1년에 한 번씩 새로운 월동대가 파견되는데, 한 월동대는 모두 16명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연구원 6명 외에 다른 대원들은 의료, 중장비, 전기전자, 기계설비, 기상, 발전, 통신통역, 조리를 각각 담당한다. 16명의 대원들이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의 생존 공동체를 이룬 셈이다. 매해 기상청은 파견 공무원을 1명씩 남극에 보내며, ‘공중 보건의’ 역할을 수행 중인 의사들도 남극행을 자원한다. 여성으로서 유일무이하게 1년간 10차 월동대원으로 활동했던 의사 이명주씨(33)는 당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여의사의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며 당차게 남극행을 자원했다. 현재 영등포보건소 보건의로 근무 중인 이씨는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은 경험을 해봤다는 게 소중한 추억이지만, 여성으로서 홀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는 남극행을 지원했던 ‘프런티어’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생존의 위협과 고립을 감내하며 ‘남극’을 택한 프런티어들. 이들에게는 과학적 자료수집, 그리고 향후 개발될 남극의 자원과 수산물을 탐사하는 막중한 의무가 있다. 하지만 거창한 첫출발과 달리 정부는 매년 세종기지에 고작 30억원을 지원하는 데 그쳤고, 안전장비마저 충분히 지급하지 못했다. 세종기지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쇄빙선조차 갖추지 못했다. 1000억원의 예산이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더욱이 국가가 주관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월동대원들의 신분은 대부분 ‘계약직’이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남극의 ‘프런티어’를 이름에 걸맞게 대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