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보고서

중국 가전업체, 레드오션 생존기

장기 침체에 사업 다각화, 신성장동력 발굴 노력

  • 자오유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zhaoyu@lgeri.com

    입력2016-08-12 16: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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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가전시장은 지난해 역신장한 데 이어 올해 1분기 역시 부진한 실적을 냈다. TV,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 4대 가전제품 가운데 TV만 전년 동기 대비 4% 성장하고 나머지는 각각 2%, 8%, 16%씩 판매량이 줄어든 상태다. 중국 공업정보화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가전제조업종의 주 영업 매출과 이윤 증가율도 3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처럼 시장이 부진하지만, 가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업체나 부품업체들이 자체 브랜드 제품 생산에 나서면서 경쟁자는 더 늘었다. 레드오션이 더 붉어진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메이디(美的·Midea), 거리(格力·Gree), 하이얼(海·Haier) 등 중국 가전업계 선두기업들은 저마다 생존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세간의 이목을 모은 회사는 메이디다. 메이디는 6월 글로벌 4대 로봇회사 가운데 하나인 독일 쿠카(KUKA)와 투자협의를 했다고 공개했다. 가전 제조보다 기술적으로 한 차원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로봇 분야 진출을 통해 신성장동력을 찾겠다는 계산이다. 중국에서 로봇산업은 지난해 5월 정부가 ‘중국제조 2025’ 규획(規劃)을 발표하면서 로봇산업을 10대 핵심 산업 분야로 지목한 것 등에 힘입어 뜨거운 관심을 끌고 있다. 메이디가 로봇산업에 진출한 또 다른 목적은 가전공장 생산라인을 개조해 제조비용을 절감하고 시장 변화에 대한 반응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이미 자회사 샤오톈어(小天) 세탁기 공장에 이를 적용해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로봇 제작, 신에너지업계 진출

    반면 거리는 신에너지 분야에 자원을 집중하는 분위기다. 3월 거리는 신에너지 자동차업체 주하이인룽(珠海銀隆)의 인수 구상을 공개했다. 주하이인룽은 리튬배터리, 전기자동차, 에너지 저장 설비 분야에서 연구개발부터 판매에 이르는 산업라인을 갖추고 있는 회사다. 일각에서는 거리가 이 회사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관련 분야에 대한 정부 보조금 때문이라고 폄하하지만, 거리의 구상은 좀 더 원대한 것으로 보인다. 거리가 지난해 태양광 중앙 에어컨을 출시한 게 근거다. 당시 거리는 에너지 저장 설비와 가정용 전기기기를 연결하고, 이를 모바일 디바이스 등을 통해 제어하는 스마트홈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렇게 하나의 생태계를 구축하려면 에너지 저장 설비가 필수적이다. 둥밍주(董明珠) 거리 회장은 5월 주주총회에서 “주하이인룽을 인수한 건 자동차를 생산하려는 것이 아니라 리튬배터리와 에너지 저장 설비라는 두 가지 경쟁력 있는 기술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 하나의 중국 대표 가전업체인 하이얼은 최근 인터넷 플랫폼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하이얼은 2014년 기존 폐쇄적 조직구조를 깨고 프로젝트 중심으로 인력을 재배치했다. 연구개발 인력, 일반 직원, 심지어 물류배송 인력까지 모두 ‘샤오웨이(小微)’라 부르는 소창업자로 나서게 했다. 더불어 샤오웨이를 지원하는 투자·금융 플랫폼도 설립했다. 현재 이 플랫폼에는 1개의 모(母)투자기금과 7개의 자(子)투자기금이 세워져 샤오웨이가 제시한 창업 아이디어의 사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특정 샤오웨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하이얼이 해당 샤오웨이를 인수하거나 지분을 투자할 수 있고, 샤오웨이가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하이얼 플랫폼에는 연매출 1억 위안(약 170억 원) 이상 샤오웨이 기업이 100여 개 있다. 하이얼의 최종 목표는 이 플랫폼을 자사의 본업인 백색가전 플랫폼으로 전환하는 것. 하이얼은 자사 가전제품을 더는 ‘전기기기’가 아닌 ‘네트워크 기기’라고 부르는데, 인터넷을 통해 스마트하게 구동되는 기기라는 의미에서다. 이 아이디어의 핵심은 바로 샤오웨이로 하여금 소비자와 소통하며 그들이 제품 설계와 제조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하이얼의 혁신은 기업의 플랫폼화, 직원의 창업자화, 고객(제품)의 개성화를 실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중국 3대 가전기업의 공통점은 각 기업이 추진하는 로봇, 신에너지, 인터넷 창업 등이 중국 정부의 정책 방향에 부합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보조금 수령으로 신규 사업 진출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반면 중국에 진출한 외국 가전기업들의 레드오션 돌파 전략은 좀 다르다. 1990년대 초 중국에 진출한 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던 독일 가전기업 보쉬지멘스는 프리미엄 전략을 세운 뒤 중국시장에서 입지를 굳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독일에서 생산 설비를 수입하고, 품질기준을 자사의 글로벌 기준에 맞췄으며, 최신 제품을 유럽과 중국에서 동시 출시했다. 또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로 외국 가전기업은 물론 로컬기업조차 중국을 떠나거나 투자를 줄이는 상황에서 9000만 유로(약 1126억 원)를 들여 안후이(安徽)성 추저우(州)에 냉장고 생산라인을 증설하는 등 생산능력도 확대했다. 이러한 보쉬지멘스의 노력은 2013년 이후 중국 내수시장의 소비 고도화 추세가 두드러지면서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보쉬지멘스의 지난해 중국시장 매출은 전년보다 5.2% 성장했다. 



    프리미엄 전략으로 틈새시장 확보

    외자계 전자업체 가운데 중국에 처음 진출해 중국 가정의 TV 시대를 열었던 일본 파나소닉은 제품 포트폴리오를 큰 폭으로 바꿈으로써 위기에 대처했다. TV 생산을 과감히 접고 경쟁력 있는 다른 가전제품, 즉 백색가전과 소형가전 쪽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한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 가전사업 조직도 대폭 바꿨다. 가전사업 부문을 ‘AP차이나’라는 회사로 독립시키고, 이 회사에 의사결정권을 상당 부분 넘겨줘 중국 제품의 연구개발과 가격 등을 자체적으로 결정하게 했다. 목표 고객은 중·고소득 계층으로, 목표 시장은 진정한 프리미엄 제품으로 잡았다. 중국 소비자들이 ‘일본에서 생산한 것과 똑같은 수준의’ 품질을 느낄 수 있도록 중국 생산라인에 일본 생산기술을 그대로 접목하기도 했다. 품질관리도 강화했다. 그 덕에 최근 파나소닉은 소형가전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토스터기 판매량이 350만 대를 돌파했고, 특히 1000위안 이상 프리미엄 제품 시장에서는 파나소닉 점유율이 93%에 달한다.

    중국시장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외국 기업 가운데 눈에 띄는 또 다른 회사는 네덜란드 필립스다. 필립스의 TV 판매량은 2014년 80만 대에서 지난해 180만 대로 껑충 뛰었다. 이색적인 건 현재 필립스가 네덜란드 모회사의 간판만 내걸고 있는 중국 기업이라는 사실이다. 중국 소비자는 잘 모르지만 필립스는 2010년 중국 업체 관제(冠捷·AOC)와 함께 출자해 ‘TP Vision’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자사의 TV 브랜드 사용권을 AOC 측에 넘겼다. 이후 3년간 TV 판매량이 계속 떨어지자 자사의 TP Vision 지분도 전량 AOC에 팔았다. 다만 해당 회사가 필립스라는 브랜드를 계속 사용할 수는 있게 해줬다. 이처럼 AOC가 전권을 갖게 되자 필립스 TV는 오히려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필립스가 네덜란드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하되 중국 업체 특유의 원가 경쟁력으로 가격은 낮춰 소비자에게 ‘귀하지만 비싸지는 않다’는 이미지를 심은 덕분이다. 결과적으로 필립스 본사는 지금 AOC로부터 받는 브랜드 사용료로 중국에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중국 가전시장은 분명 레드오션이다. 그러나 위의 기업들처럼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치열한 경쟁은 중국 로컬기업들에게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을 수밖에 없는 계기로, 글로벌 기업에게는 각자의 역량에 맞춰 전략적 변화를 시도하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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