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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두 얼굴’의 탈북자

성공이란 이름의 ‘평범한 삶’

탈북 4인의 정착 이야기 … 따가운 시선·배신 등 좌절 딛고 안정된 직장·단란한 가정 ‘꿈이 현실로’

성공이란 이름의 ‘평범한 삶’

‘김용 재벌 되다.’ 지난달 초 국내 언론들은 앞 다투어 탈북자 김용씨(44)의 성공 스토리를 기사화했다. 전국 39개 체인을 거느린 외식업체 ‘모란각’ 대표 김씨가 중국 톈진의 국제호텔까지 인수해 명실상부한 국제 사업가로 거듭났다는 내용이었다. 김씨 외에도 한의사 박수현(37)·석영환씨(39), 치의학 박사 김은철씨(36) 등 이름을 널리 알린 탈북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과연 이들만을 ‘성공한 탈북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의 성공은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2886명(2002년 12월 말 현재 통일부 집계)의 평범한 탈북자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정작 탈북자들이 꿈꾸는 삶은 큰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낯선 남한사회에서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남쪽 사람들과 구별되는 ‘탈북자’가 아닌 진정한 이웃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갖은 고통을 딛고 바로 그 평범과 안정을 이룬 이들. 소박해서 더 찬란하고 눈부신 탈북자들의 성공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보자.

바이메드 전자상거래팀장 김은철씨

성공이란 이름의  ‘평범한    삶’

지난해 팀 매출을 2배 이상 끌어올린 성공한 직장인 김은철씨가 한국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탈북자들 사이에서 김은철씨(33)는 단연 ‘성공한 직장인’으로 꼽힌다. 2002년 의료기기 전문 인터넷 쇼핑몰 바이메드(www.buymed.co.kr) 전자상거래팀장을 맡은 후 1년 만에 팀 매출을 전년과 비교해 2배 이상 끌어올린 ‘스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성과로 매출액의 10%를 인센티브로 받았고, 경영이 어려워 문 닫을 위기에까지 몰려 있던 회사를 살린 주역이 됐다.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상거래 분야에서, 인터넷이라는 최첨단 도구를 이용해 김씨가 얻어낸 성과는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1999년 11월 남한에 정착한, 아직은 ‘새내기’ 탈북자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김씨가 밝힌 성공 비결은 간단하다. 스스로 탈북자라는 것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마음을 여는 것. 김씨는 “북에서 온 사람들은 남쪽의 용어나 표현에 서툴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모르는 걸 아는 척하기보다는 ‘난 북에서 와서 잘 모른다. 설명해달라’고 하면 상대방도 나를 자연스럽게 대하게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사실 북에서 신의주고등중학교 물리교사로 5년간 근무했던 교육자 출신. 북한에서 이미 컴퓨터를 상당히 배웠을 만큼 엘리트였다. 하지만 97년 탈북 후 바로 남한에 들어오지 못하고 2년간 중국을 떠돌면서 북에서의 지위와 명예는 모두 잊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한에 들어온 후 대학에 들어갔으나 한 학기 만에 적응에 실패하고, 이어 가장 가깝게 대해주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정착지원금 1200여만원을 모두 날린 후에는 “이제 정말 열심히 사는 도리밖에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자고 마음먹자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아파할 것도 없었다고 김씨는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날 무시한다고 느낄 때면 ‘지금은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너보다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이를 악물었어요. 밤을 새워가며 인터넷을 배우고 영어를 공부했죠.”

김씨는 스스로 익힌 인터넷 실력으로 구직 사이트를 검색했고, 이메일로 이력서를 보내 직장을 구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는 취업 1년 만에 팀장으로 임명될 만큼 능력을 인정받으며 화려한 보상을 받았다.

“여름 시즌을 맞아 쇼핑몰을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김씨는 “내가 열심히 일하고,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를 찾았다는 점에서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며 밝게 웃었다.

성공이란 이름의  ‘평범한    삶’

한용수씨 부부와 16개월 된 딸 가연이. 남한에 정착한 지 8년째인 한씨는 이제 100% 한국인이다.

서울지하철공사 2호선 기관사인 한용수씨(29)는 탈북자라는 수식어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95년 만 스무 살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는 북에 부모 형제를 남겨둔 채 홀로 월남한 북한군 탈북자였다. 하지만 8년이 흐른 지금, 한씨는 사랑하는 부인과 16개월 된 딸 가연이와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 이제 그의 삶에서 ‘탈북’은 젊은 시절 스쳐 지나간 한 사건일 뿐 전체를 규정짓는 요소가 아니다.

그는 7년째 한 직장에 근속하는 성실한 회사원이고, 주말이면 식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며, 남한을 말할 때 ‘우리나라’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있다.

물론 지금의 안정과 평화를 누리기까지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씨는 사실 북에서 꽤 좋은 출신성분을 타고났었다. 어머니는 북한의 고등교육기관 중 최고로 꼽히는 만경대 혁명가 유자녀학원과 원산농대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아버지도 치과의사였다. 그러나 유복한 환경은 오히려 그에게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워주었다. 미국 중국 출장을 다니던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외국 문물을 접하며 꿈을 키우던 한씨는 결국 군에 입대한 후 탈출을 단행했다.

하지만 한씨는 남쪽 세상이 그의 생각만큼 따뜻한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정착금으로 받은 전 재산을 아는 사람에게 투자했다가 고스란히 떼인 것. 스스로 “순진하고 어렸다”고 말하는 탈북 초반 몇 년 사이에 한씨가 사기당한 금액은 8000만원이 넘는다. 한씨는 “그래도 직장이 있어 굶어죽지 않고 살았다”며 웃었지만 사실 그 사이 빚 때문에 월급을 압류당한 것만 세 차례나 됐다.

하지만 한씨는 이때의 경험이 비싼 수업료였다고 생각한단다. 오랜 고통을 겪는 동안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알게 됐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제 자신과 평생 함께 살아갈 식구를 만났기 때문이다.

2000년 10월 한씨와 백년가약을 맺은 이는 김광숙씨(31). 87년 1월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한국에 온 김만철씨 가족의 막내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생활을 한 ‘준한국인’ 광숙씨와 처가 식구들이 한씨가 안정과 평화를 얻는 든든한 울타리가 됐다. 한씨는 결혼 후 작지만 소중한 보금자리도 마련했고, 남은 빚도 매달 열심히 갚아나가고 있다.

그의 장래 계획은 소박하다. 가연이를 열심히 키우는 것, 그리고 돈 많이 벌어서 큰 집으로 이사하는 것.

한씨는 “모든 탈북자들의 꿈은 남쪽 사람들처럼 평범한 생활인이 되는 것”이라며 “그 기준에 따른다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성공이란 이름의  ‘평범한    삶’

탈북 여성 가운데 최초로 석사모를 쓰게 된 이애란씨와 북에서 데려온 아들 철구군.

2003년 8월이면 분단 이후 탈북 여성 가운데 최초의 석사가 탄생한다. 97년 10월 아들과 함께 남한에 온 이애란씨(39)가 이화여대 식품영양학 대학원을 졸업하는 것. 이씨는 지금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남한 내 북한주민들의 식생활 특성’에 관한 논문을 마무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실 탈북자 사회에서 이씨는 꽤 알려져 있는 인물. 그는 99년 모 보험사에 생활설계사로 입사해 전국 6만여명의 설계사 중 15위를 차지할 정도로 좋은 실적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씨는 ‘성공한 생활설계사’로 사는 동안 정작 속마음은 불편하고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저는 북한에 있을 때 발효 공학을 전공하고 관련 분야에서만 13년간 일했던 전문가였거든요. 남쪽에 내려와 아들과 함께 살려면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보험 일을 한 거지, 사실 제 적성에는 맞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조금만 더 하면 ‘보험여왕’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저는 계속 공부하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 없었죠.”

결국 이씨는 한 달에 수천만원을 벌어들이는 ‘잘나가는’ 생활설계사 일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관심 있었던 남북한 음식문화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이대 대학원에 들어갔고, 생계를 위해 운영하던 식당까지 포기하며 공부에 매달렸다. 학위를 따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토플시험이 북한 출신의 이씨에게는 넘기 어려운 고비였기 때문이다.

“7개월 동안 꼬박 대학원 수업시간 외에는 영어 공부만 했어요. 운전중에도 영어 테이프를 틀어놓을 정도로 열심히 하니까 드디어 졸업 기준 점수를 넘을 수 있더군요.”

탈북자 출신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인 영어라는 고비를 넘어선 이씨는 석사를 마친 후 바로 박사과정에 지원할 생각이다.

이제 그의 꿈은 계속 열심히 공부해 통일 후 남북한의 음식 문화 교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북한에서 데리고 온 아들 철혁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다. 이씨는 매일 밤 이제 일곱 살이 된 철혁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남쪽 사회에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라는 소망을 전한다고 한다.

성공이란 이름의  ‘평범한    삶’

박상학씨(오른쪽)는 지난해 11월 같은 탈북자인 박춘씨(왼쪽)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4월1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만난 박상학씨(36)는 ‘국제 컴퓨터·소프트웨어·통신 전시회’에서 최신 소프트웨어를 홍보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전시회 부스에 서서 관람객을 맞고 있는 그는 귀에 설은 북한 사투리만 빼면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98년 어머니, 동생 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탈북한 박씨는 2002년 3월 ㈜아이모바일 테크놀로지(i-mobile technology)의 전략마케팅부에 입사한 후 1년째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국내 마케팅뿐 아니라 해외사업도 그의 몫. 탈북하기 전 북한 최고의 대학인 김책공대에서 정보통신을 전공했던 경력이 지금 업무에 큰 도움이 된단다.

“북에서 결혼식을 20일 앞두고 갑자기 탈북을 하게 됐어요. 집안 식구들과 다 함께 넘어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죠. 처음 남에 왔을 때는 고향 생각, 약혼녀 생각 때문에 힘들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것 같아요. 새로 가정도 꾸몄고, 모든 게 편안하거든요.”

박씨는 투박한 이북 사투리로 지금까지의 사연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박씨는 “나는 북에서 온 것을 조금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투리를 고치지 않는다”며 “북과 남은 체제가 다를 뿐이지 누가 우등하고 열등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당당하게 산다”고 말했다. 그의 이 같은 ‘자존심’과 ‘배짱’은 어색하고 힘든 남쪽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힘이 됐다.

박씨는 지난해 11월 같은 탈북자인 박춘씨(33)와 결혼도 했다. 부인 박씨는 북한군 고사총부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다 2002년 3월 단신 입국했다.

박씨 부부의 아파트 같은 동 옆집에는 남동생 부부, 아랫집에는 어머니와 여동생 가족이 산다. 그리고 다섯 달만 지나면 둘의 사랑의 결실인 2세도 태어날 예정이다.

그는 이제 일주일에 한 장씩 재미로 로또 복권도 사고, 주말이면 온 식구가 모여 교회를 찾는 등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처음 북에서 넘어올 때는 죽을 고비도 넘겼고, 중국에서 도망 다닐 때도 한동안 참 많이 위험했어요. 그 과정을 거치며 진짜 중요한 건 마음의 안정과 평화라는 걸 깨달았죠. 자본주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 일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잖아요. 그 안에서 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으니, 이게 성공이라면 성공인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는 박씨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주간동아 2003.04.24 381호 (p18~20)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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